“그건 그렇지만……간만에 맛있는 걸로 배를 채웠는데, 이거 다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네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멀리 안 갈게.”
차는 잠시 후 한적한 산길 앞에서 멈춘다.
“자, 내려.”
“뜬금없이 등산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냥 바람도 쐬고 좋은 공기도 마실 겸, 좀 걷자.”
“여긴 어째 인적도 없네.”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를 따라 나선다. 조용한 산길을 승우와 함께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저녁 되니까 바람이 좀 차다. 춥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승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춥냐고? 갑자기 체온이 급상승해서 땀이 날 정도다. 그의 팔이 내 몸을 감싸는 순간, 온 몸이 불가마에 들어가기라도 한 양 후끈후끈해진 것이다.
‘그래, 요즘 우리가 너무 건전하기는 했어. 가벼운 뽀뽀가 고작이고……우리가 유치원생인가? 승우 녀석도 내색은 안하더니 은근히 엉큼한 구석이 있잖아? 이런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오다니…….’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그러자 승우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뭐야? 왜 갑자기 실없이 웃어?”
“어, 그냥……공기가 좋아서…….”
대충 대꾸는 했지만 갑자기 불안해진다.
‘저 퉁명스런 태도를 봐라? 이거……나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는 거 아냐? 그냥 말 그대로 산책하자고 데려온 걸 나만 엉큼한 생각하고 있는 건…….’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 지, 승우는 나를 데리고 계속 산길을 올라간다. 마침내 해는 져서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 벌써 캄캄하잖아.”
“조금만 더 올라가자. 너 운동도 좀 해야지.”
막무가내로 승우는 나를 잡아끈다. 확실히 운동 부족이긴 한가 보다. 벌써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버팅기려 하는데, 마침내 승우가 걸음을 멈췄다.
“자, 다 왔다.”
그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별히 이곳까지 올만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둘러 봐도 울창한 나무 밖에 없는데…….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어두운 밤, 인적도 없는 숲속이란 으스스한 기분까지 든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나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안하고, 승우가 내 눈을 응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아영아…….”
녀석의 눈빛이 어쩐지 묘하다. 드디어 나에게 엉큼한(?) 짓을 하려는 걸까?
“어, 왜 그래…….”
나도 모르게 몸을 배배 꼬며, 어울리지 않는 내숭을 떤다. 아무리 나라도 남자가 다가오는데 얼씨구나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첫 키스를 내가 달려들다시피 해서 마음이 걸리는데…….
“아영아…….”
다시 한 번 승우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아니, 저 녀석은 왜 자꾸 이름만 불러대는 거야? 남자가 마음을 먹었으면 화끈하게 행동해야지! 내가 또 입술이라도 쭉 내밀고 있어야 제대로 할 거야?
힐난하듯 승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녀석의 눈빛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새까만 눈동자. 그 눈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바라보고 있다.
‘호, 혹시 이건……늑대의 눈빛? 난 그저 뜨거운 키스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녀석은 더 엄청난 짓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 아냐? 하긴, 겨우 키스 정도 하려고 이런 산 속까지 끌고 온다는 건 이상하긴 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물론 승우를 사랑하긴 하지만, 난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됐는데……. 더구나 이런 산 속에서?
“승우야, 안 돼! 우린 아직 준비가……. 이건 너무 빠르잖아!”
두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성을 잃은 늑대는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면서…….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승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이성을 잃은 늑대의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 그제 서야 살짝 실눈을 떠봤다.
‘어라? 그, 그런 게 아니었나?’
승우는 내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를 무척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가 또……앞질러 생각한 건가?’
난감하다. 멀쩡한 사람을 늑대 취급하며 소리소리 질렀으니……. 아, 이 창피한 상황을 어떻게 넘긴다지?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하여간 엉큼하다니까.”
승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놀려대자, 내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누가 엉큼한 생각을 했다고 그래? 그럼 야밤에 인적도 없는 산속으로 사람을 끌고 오니……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어? 도대체 이런 곳에 왜 데려온 거야?”
“난 어디까지나 순수한 의도를 갖고 있었을 뿐인데 늑대로 몰아세우다니……. 이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늑대로 변신이라도 해야 하나?”
“자꾸 놀릴래? 나 갈 거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휙 돌아섰다. 망할 녀석, 사람을 갖고 놀고 있어.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든 건 저 녀석인데, 괜히 나만 우스운 꼴 됐잖아!
‘저런 녀석이 어디가 좋다고! 미쳤지, 내가 미쳤어!’
혼자 성큼성큼 산길을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승우가 내 손목을 휙 잡아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승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내가 널 그냥 이렇게 보낼 것 같아? 이렇게 내 품에 안고, 한 순간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게 내 진심인데…….”
승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귓전에서 울린다. 화난 기분은 어느 새 봄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나도 한 마리 늑대이고 싶어. 하지만……네가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이 기분 알아?”
승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키스보다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으며, 언제부터인가 나는 수줍게 떨며 승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런 나를 품에 꼭 보듬으며 승우는 말을 이었다.
“아영아, 우리……결혼하자.”
헉, 간만에 분위기 좋다 생각했는데, 또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부 이것을 위한 전초전이었단 말인가!
‘그 놈의 복수!’
발끈해서 그의 품을 빠져 나와 소리친다.
“너 또 그 얘기야? 이제 아주 입에 붙었어. 도대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와 결혼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네 말도 안 되는 복수를 위해 너하고 결혼할 것 같아?”
단번에 로맨틱한 분위기가 산산조각난다. 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산속에서 울려 퍼진다. 나는 녀석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본다. 녀석도 날카로운 눈빛을 내게 되돌렸다.
‘아니, 도대체 지가 뭘 잘했다고 날 저렇게 째려보는 거야?’
씩씩거리며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쏘아보는데, 마침내 승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하여간……넌 지상 최고의 바보다.”
“뭐야? 내가 왜 바보야?”
“정말 내가 복수 때문에 너랑 결혼하려 한다고 생각해? 겨우 그깟 복수에 내 인생을 걸만큼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해?”
“전에 분명히 그랬잖아. 아버지한테 복수하기 위해 결혼하자고…….”
“무슨 농담을 못해요. 다른 건 그렇게 의심하면서, 어떻게 그냥 한 농담은 철떡 같이 믿어?”
농담이었다고? 그렇게 진지한 농담이 어디 있어! 혹시 이것도 복수를 하기 위해 나를 현혹시키는 거 아냐?
승우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믿는다고 했지?”
“응. 하지만…….”
“자, 눈을 감아 봐.”
“뭐? 갑자기 왜 눈을…….”
“날 믿는다면 그냥 눈을 감아 줘.”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눈을 감으라는 거야?
‘혹시 이 산속에 날 버리고 도망이라도 가려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어처구니없는 투덜거림을 내뱉었지만, 사실 승우가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를 믿으니까…….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스산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산속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다는 건, 묘한 불안함과 조바심을 느끼게 했다. 그 전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산의 속삭임이 들려왔고, 정말 철저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승우가 손이라도 잡고 체온을 느끼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아니, 목소리라도 들렸으면…….’
다행히도 불안한 순간은 짧게 끝났다(물론 내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지만). 잠시 후, 승우가 다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이제……눈을 떠.”
승우의 말에 따라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다시금 눈을 감아 버렸다.
‘뭐, 뭐야?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조심스레 다시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나 내 눈이 잘못 된 것은 아니었다. 좀 전에 나의 눈을 놀라게 했던 빛은 여전히 내 눈앞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빛이지? 좀 전까지 캄캄하던 곳이 갑자기 왜 이렇게 밝아진 거지?’
마침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그 빛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작은 꼬마전구들이었다. 내 주위의 모든 나무들에 형형색색의 꼬마전구들이 가득히 감겨져,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에 으스스한 산속이 아름다운 천국과도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승우가 있다.
“승우야…….”
이걸 모두 승우가 해놓은 걸까? 한 두 그루도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이 모든 나무에 꼬마전구를 달아 놓은 것이……바로 승우일까?
“이런 짓은 나도 처음이라…….”
승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퉁명스러움은 쑥스러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승우가 나를 위해 이런 걸 준비하다니……. 이런 간지러운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이것들이 가만히 남아날지 알 수 없어서……이렇게 부득이 하게 산속에 마련했다.”
승우는 어디엔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한 아름이나 되는 해바라기로 만들어진 꽃다발.
“붉은 장미로 준비할까 했지만, 어쩐지 네게는 해바라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어. 하늘을 향한 씩씩한 자태와 밝은 미소와도 같은 느낌이…….”
승우는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드디어 그의 체온을 내게 나눠준다.
“이래도 내가 엉뚱한 생각으로 네게 결혼하자고 하는 것 같니? 내 사랑이 의심스러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뺨 위에 흘러내리던 눈물이 허공에 흩뿌려질 만큼. 벅찬 감동 때문에 차마 입을 열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와 결혼하자. 최선을 다해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한 순간도 빠짐없이 너에게 충실 할게.”
행복하다. 승우의 로맨틱한 청혼. 그 어느 영화 속 장면보다 내게는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그 어떤 꿈조차도 이토록 황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아직도 망설임이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너무 빠른 게 아닐까? 우리, 아직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승우의 촉촉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 눈은 흔들림 없는 확신과 결의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사랑이 변할 것 같니? 조금 더 시간을 가지면 우리의 사랑이 퇴색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절해도 좋아.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시간이 지나도 나의 사랑은 절대 변함없을 거라는 걸. 넌 확신할 수 없니?”
“그렇지 않아. 내 마음도……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간을 갖는 게 굳이 필요한 걸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난 널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네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거야. 하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그렇다. 일 분 일 초도, 더 이상 너와 떨어져있고 싶지 않아…….”
그 이상 어떤 달콤한 프러포즈의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의 이 말을 거절할 수 있을까?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확신이 들어섰다. 지금까지 살아온 25년 동안, 이런 확신이 든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답했다. 눈물이 스며들어 얼룩진, 그러나 다부진 목소리로…….
“응, 나도 더 이상 너와 떨어져있고 싶지 않아. 우리……결혼해.”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가 햇살처럼 빛난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나를 포옹한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해바라기 꽃다발이 짓눌렸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빛의 정원과도 같이 반짝이는 나무들 사이에서……우리는 입 맞추며 웃음 짓는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영원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한다 말하고, 또 되뇌어 말해 봐도……진실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해피엔딩. 우리는 영원히 사랑하고 행복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온통 불운의 연속이었지만, 결말은 마치 동화와도 같다. 더 이상 나는 ‘불운을 몰고 다니는 여자’가 아니다. 이제 나는 그 불운을 극복해내고, 진정한 행복을 쟁취했으니까.
비록 나의 두 번째 소설이 나의 체험기는 아니지만, 제목만큼은 나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 억세게 재수 없는 그녀의 운명 탈출기. 그래, 바로 내 이야기이다. 나는 드디어 억세게 재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탈출하고야 만 것이다. 바로 사랑의 힘으로……. 그가 바로 나의 진정한 ‘행운’이다.
행운 예감 - 제 12 장 - 억세게 재수 없는 그녀의 운명탈출기 [38]
3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는 거야?”
레스토랑을 나와 차에 오르자, 승우는 또 다시 집이 아닌 어딘가로 차를 달렸다.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자. 너 그 동안 글 쓰느라 머리가 많이 혹사당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간만에 맛있는 걸로 배를 채웠는데, 이거 다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네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멀리 안 갈게.”
차는 잠시 후 한적한 산길 앞에서 멈춘다.
“자, 내려.”
“뜬금없이 등산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냥 바람도 쐬고 좋은 공기도 마실 겸, 좀 걷자.”
“여긴 어째 인적도 없네.”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를 따라 나선다. 조용한 산길을 승우와 함께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저녁 되니까 바람이 좀 차다. 춥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승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춥냐고? 갑자기 체온이 급상승해서 땀이 날 정도다. 그의 팔이 내 몸을 감싸는 순간, 온 몸이 불가마에 들어가기라도 한 양 후끈후끈해진 것이다.
‘그래, 요즘 우리가 너무 건전하기는 했어. 가벼운 뽀뽀가 고작이고……우리가 유치원생인가? 승우 녀석도 내색은 안하더니 은근히 엉큼한 구석이 있잖아? 이런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오다니…….’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그러자 승우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뭐야? 왜 갑자기 실없이 웃어?”
“어, 그냥……공기가 좋아서…….”
대충 대꾸는 했지만 갑자기 불안해진다.
‘저 퉁명스런 태도를 봐라? 이거……나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는 거 아냐? 그냥 말 그대로 산책하자고 데려온 걸 나만 엉큼한 생각하고 있는 건…….’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 지, 승우는 나를 데리고 계속 산길을 올라간다. 마침내 해는 져서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 벌써 캄캄하잖아.”
“조금만 더 올라가자. 너 운동도 좀 해야지.”
막무가내로 승우는 나를 잡아끈다. 확실히 운동 부족이긴 한가 보다. 벌써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버팅기려 하는데, 마침내 승우가 걸음을 멈췄다.
“자, 다 왔다.”
그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별히 이곳까지 올만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둘러 봐도 울창한 나무 밖에 없는데…….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어두운 밤, 인적도 없는 숲속이란 으스스한 기분까지 든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나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안하고, 승우가 내 눈을 응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아영아…….”
녀석의 눈빛이 어쩐지 묘하다. 드디어 나에게 엉큼한(?) 짓을 하려는 걸까?
“어, 왜 그래…….”
나도 모르게 몸을 배배 꼬며, 어울리지 않는 내숭을 떤다. 아무리 나라도 남자가 다가오는데 얼씨구나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첫 키스를 내가 달려들다시피 해서 마음이 걸리는데…….
“아영아…….”
다시 한 번 승우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아니, 저 녀석은 왜 자꾸 이름만 불러대는 거야? 남자가 마음을 먹었으면 화끈하게 행동해야지! 내가 또 입술이라도 쭉 내밀고 있어야 제대로 할 거야?
힐난하듯 승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녀석의 눈빛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새까만 눈동자. 그 눈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바라보고 있다.
‘호, 혹시 이건……늑대의 눈빛? 난 그저 뜨거운 키스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녀석은 더 엄청난 짓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 아냐? 하긴, 겨우 키스 정도 하려고 이런 산 속까지 끌고 온다는 건 이상하긴 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물론 승우를 사랑하긴 하지만, 난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됐는데……. 더구나 이런 산 속에서?
“승우야, 안 돼! 우린 아직 준비가……. 이건 너무 빠르잖아!”
두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성을 잃은 늑대는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면서…….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승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이성을 잃은 늑대의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 그제 서야 살짝 실눈을 떠봤다.
‘어라? 그, 그런 게 아니었나?’
승우는 내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를 무척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가 또……앞질러 생각한 건가?’
난감하다. 멀쩡한 사람을 늑대 취급하며 소리소리 질렀으니……. 아, 이 창피한 상황을 어떻게 넘긴다지?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하여간 엉큼하다니까.”
승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놀려대자, 내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누가 엉큼한 생각을 했다고 그래? 그럼 야밤에 인적도 없는 산속으로 사람을 끌고 오니……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어? 도대체 이런 곳에 왜 데려온 거야?”
“난 어디까지나 순수한 의도를 갖고 있었을 뿐인데 늑대로 몰아세우다니……. 이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늑대로 변신이라도 해야 하나?”
“자꾸 놀릴래? 나 갈 거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휙 돌아섰다. 망할 녀석, 사람을 갖고 놀고 있어.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든 건 저 녀석인데, 괜히 나만 우스운 꼴 됐잖아!
‘저런 녀석이 어디가 좋다고! 미쳤지, 내가 미쳤어!’
혼자 성큼성큼 산길을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승우가 내 손목을 휙 잡아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승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내가 널 그냥 이렇게 보낼 것 같아? 이렇게 내 품에 안고, 한 순간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게 내 진심인데…….”
승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귓전에서 울린다. 화난 기분은 어느 새 봄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나도 한 마리 늑대이고 싶어. 하지만……네가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이 기분 알아?”
승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키스보다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으며, 언제부터인가 나는 수줍게 떨며 승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런 나를 품에 꼭 보듬으며 승우는 말을 이었다.
“아영아, 우리……결혼하자.”
헉, 간만에 분위기 좋다 생각했는데, 또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부 이것을 위한 전초전이었단 말인가!
‘그 놈의 복수!’
발끈해서 그의 품을 빠져 나와 소리친다.
“너 또 그 얘기야? 이제 아주 입에 붙었어. 도대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와 결혼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네 말도 안 되는 복수를 위해 너하고 결혼할 것 같아?”
단번에 로맨틱한 분위기가 산산조각난다. 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산속에서 울려 퍼진다. 나는 녀석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본다. 녀석도 날카로운 눈빛을 내게 되돌렸다.
‘아니, 도대체 지가 뭘 잘했다고 날 저렇게 째려보는 거야?’
씩씩거리며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쏘아보는데, 마침내 승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하여간……넌 지상 최고의 바보다.”
“뭐야? 내가 왜 바보야?”
“정말 내가 복수 때문에 너랑 결혼하려 한다고 생각해? 겨우 그깟 복수에 내 인생을 걸만큼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해?”
“전에 분명히 그랬잖아. 아버지한테 복수하기 위해 결혼하자고…….”
“무슨 농담을 못해요. 다른 건 그렇게 의심하면서, 어떻게 그냥 한 농담은 철떡 같이 믿어?”
농담이었다고? 그렇게 진지한 농담이 어디 있어! 혹시 이것도 복수를 하기 위해 나를 현혹시키는 거 아냐?
승우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믿는다고 했지?”
“응. 하지만…….”
“자, 눈을 감아 봐.”
“뭐? 갑자기 왜 눈을…….”
“날 믿는다면 그냥 눈을 감아 줘.”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눈을 감으라는 거야?
‘혹시 이 산속에 날 버리고 도망이라도 가려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어처구니없는 투덜거림을 내뱉었지만, 사실 승우가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를 믿으니까…….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스산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산속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다는 건, 묘한 불안함과 조바심을 느끼게 했다. 그 전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산의 속삭임이 들려왔고, 정말 철저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승우가 손이라도 잡고 체온을 느끼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아니, 목소리라도 들렸으면…….’
다행히도 불안한 순간은 짧게 끝났다(물론 내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지만). 잠시 후, 승우가 다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이제……눈을 떠.”
승우의 말에 따라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다시금 눈을 감아 버렸다.
‘뭐, 뭐야?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조심스레 다시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나 내 눈이 잘못 된 것은 아니었다. 좀 전에 나의 눈을 놀라게 했던 빛은 여전히 내 눈앞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빛이지? 좀 전까지 캄캄하던 곳이 갑자기 왜 이렇게 밝아진 거지?’
마침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그 빛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작은 꼬마전구들이었다. 내 주위의 모든 나무들에 형형색색의 꼬마전구들이 가득히 감겨져,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에 으스스한 산속이 아름다운 천국과도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승우가 있다.
“승우야…….”
이걸 모두 승우가 해놓은 걸까? 한 두 그루도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이 모든 나무에 꼬마전구를 달아 놓은 것이……바로 승우일까?
“이런 짓은 나도 처음이라…….”
승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퉁명스러움은 쑥스러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승우가 나를 위해 이런 걸 준비하다니……. 이런 간지러운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이것들이 가만히 남아날지 알 수 없어서……이렇게 부득이 하게 산속에 마련했다.”
승우는 어디엔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한 아름이나 되는 해바라기로 만들어진 꽃다발.
“붉은 장미로 준비할까 했지만, 어쩐지 네게는 해바라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어. 하늘을 향한 씩씩한 자태와 밝은 미소와도 같은 느낌이…….”
승우는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드디어 그의 체온을 내게 나눠준다.
“이래도 내가 엉뚱한 생각으로 네게 결혼하자고 하는 것 같니? 내 사랑이 의심스러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뺨 위에 흘러내리던 눈물이 허공에 흩뿌려질 만큼. 벅찬 감동 때문에 차마 입을 열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와 결혼하자. 최선을 다해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한 순간도 빠짐없이 너에게 충실 할게.”
행복하다. 승우의 로맨틱한 청혼. 그 어느 영화 속 장면보다 내게는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그 어떤 꿈조차도 이토록 황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아직도 망설임이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너무 빠른 게 아닐까? 우리, 아직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승우의 촉촉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 눈은 흔들림 없는 확신과 결의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사랑이 변할 것 같니? 조금 더 시간을 가지면 우리의 사랑이 퇴색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절해도 좋아.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시간이 지나도 나의 사랑은 절대 변함없을 거라는 걸. 넌 확신할 수 없니?”
“그렇지 않아. 내 마음도……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간을 갖는 게 굳이 필요한 걸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난 널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네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거야. 하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그렇다. 일 분 일 초도, 더 이상 너와 떨어져있고 싶지 않아…….”
그 이상 어떤 달콤한 프러포즈의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의 이 말을 거절할 수 있을까?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확신이 들어섰다. 지금까지 살아온 25년 동안, 이런 확신이 든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답했다. 눈물이 스며들어 얼룩진, 그러나 다부진 목소리로…….
“응, 나도 더 이상 너와 떨어져있고 싶지 않아. 우리……결혼해.”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가 햇살처럼 빛난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나를 포옹한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해바라기 꽃다발이 짓눌렸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빛의 정원과도 같이 반짝이는 나무들 사이에서……우리는 입 맞추며 웃음 짓는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영원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한다 말하고, 또 되뇌어 말해 봐도……진실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해피엔딩. 우리는 영원히 사랑하고 행복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온통 불운의 연속이었지만, 결말은 마치 동화와도 같다. 더 이상 나는 ‘불운을 몰고 다니는 여자’가 아니다. 이제 나는 그 불운을 극복해내고, 진정한 행복을 쟁취했으니까.
비록 나의 두 번째 소설이 나의 체험기는 아니지만, 제목만큼은 나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 억세게 재수 없는 그녀의 운명 탈출기. 그래, 바로 내 이야기이다. 나는 드디어 억세게 재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탈출하고야 만 것이다. 바로 사랑의 힘으로……. 그가 바로 나의 진정한 ‘행운’이다.
************************************************************************************
오늘도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사실 이 쯤에서 글을 끝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어쩐지 저도 독자분들도 아쉬움이 남을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래서 에필로그 식의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마도 내일은 완결편이 되겠군요.
아, 은혜의 소식에 대한 이야기는 한참 넣을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고민한 결과, 모든 사람들의 뒷 이야기를 넣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삭제했는데...은혜 소식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군요.
은혜 이야기를 넣으려면 지난 회 글에 넣었어야 하는 건데...좀 때늦은 후회를 해봅니다.
제 원고상으로는 이야기를 첨가시킬 수 있으나, 이미 연재 한 이야기는 어쩔 수가 없네요..ㅜ.ㅜ
그냥 은혜 역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주세요^^;(아, 무책임하여라~)
모두들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알라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