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상 문화를 가장 많이 파괴한게 바로 기독교일걸?
각지의 문화를 야만으로 몰아 언어와 종교 각종문화를 모조리 개박살...
한국에서도 기독교가 각종전통문화를 야만으로 몰아 개박살낸게 한두개가 아니지.
일본이 전통문화 파괴햇다고 욕을 먹는데 기독교가 처먹을 욕은 곱하기 100은 되지 않겠냐?
기독교전방위 ‘작전’에 고유문화 파괴
2002-07-12 19:28
멕시코 치아파스에 사는 초칠 족의 음악은 500년 동안의 한과 슬픔을 담고 있지만, 마치 가톨릭의 영가처럼 들린다. 원주민들은 그들의 언어로 말은 하지만 그들 고유의 습속과 이미지는 파괴되거나 대부분 기독교의 유럽 문명 아래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페루 원주민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16세기의 유럽이 치른 이미지 전쟁은 철저했고, 놀랄 만한 효과를 거두었다.
1525년 우상파괴 작업을 시작한 프란시스코 교단은 서구의 문자와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킨다. 1523년 멕시코에 온 플랑드르 출신 페드로 데 간테 신부는 1572년까지 이미지 전쟁에서 주요한 몫을 수행한다. 어차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어려웠기에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는 삽화를 곁들인 그림책이 주로 이용되었다. 인쇄문화의 중심지에서 온 페드로 신부는 원주민들의 과거 이미지를 백지(tabla rasa)로 만들고, 그 위에 새롭게 그리는 임무를 맡게 된다.
우선 신부는 원주민 예술가들이 전통적으로 만들던 예술품의 생산을 크게 제한하고, 서구예술의 복제품을 생산하도록 유도한다. 15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쇄문화는 판화와 삽화의 유행을 불러왔다. 당연히 멕시코에서도 생산과 유통이 쉬웠던 삽화가 기독교 이미지의 확산에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사도신경이나 십계명도 모두 삽화로 그려져 초기의 선교에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페드로 신부 덕분에 멕시코에는 플랑드르 양식의 문자, 그림, 삽화, 조각이 유행하게 되었다.
1553년에 출판된 그의 교리문답서에도 플랑드르 양식과 독일 양식의 종교적 삽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원주민 자제들에게 읽기, 쓰기, 그리기 등을 통해 서구 이미지의 확산을 꾀했다. 이로써 서적과 삽화, 문자와 이미지의 관련성은 신세대 원주민 엘리트들에게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미지 전쟁은 건축물에도 적용되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의 신전을 모두 헐고 그 곳의 돌로 웅장한 주교좌 성당과 수도원을 건설했다. 성당 건물 안팎에는 성서의 상징과 인물들을 조각하거나 벽화로 채웠다. 프레스코 벽화나 성화는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훌륭한 선교 수단이 되었다. 성화는 대상의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 문명이 가지고 있는 총화의 표현이다. 이런 그림이나 벽화를 통해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서구적인 감정표현 방식이나 제스처에 익숙해졌고, 나아가 인과율, 결정론, 자유의지 같은 개념에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성극(聖劇)도 이미지 전쟁의 주요 도구로 동원되었다. 1533년 멕시코의 틀랄텔롤코에서 이 상연되었다. 죄에 대한 형벌과 세계의 종말을 다룬 이 성극은 근절하기 힘들었던 원주민들의 다신교적 성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539년 멕시코시 및 틀락스칼라에서 공연된 과 은 엄청난 소도구와 인원이 동원된 스펙터클이었다. 그리스 도시와 무슬림 도시의 모형이 세워졌고, 여기에 대형 함대의 모형도 가세했다. 원주민들은 자연스레 십자군 전쟁의 논리를 체화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익혔고, 성궤를 회복하려는 환상까지 공유하게 되었다.
연극은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생생한 배우의 연기와 무대장치라는 시각효과를 통해 실제와 차이를 소멸시킨다. 원주민은 성극을 통해 감동과 감화의 눈물을 흘렸고, 그들의 환상과 꿈마저 유럽적, 기독교적 이미지에 자리를 내주었다.
1.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⑭이미지 전쟁 2: 이미지의 식민화/유럽화
이성형/세종연구소 초빙 연구위원·fernandor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