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로니모 임’을 아십니까 최초발굴-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 투쟁 벌이고 고위직까지 올랐던 쿠바 한인 임은조씨 지난 50년대 소수의 게릴라투쟁으로 시작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쿠바혁명. 그 쿠바혁명의 역사 한가운데에는 뜻밖에도 헤로니모 임이라는 한인이 있었다. ‘헤로니모 임’(73), 우리말 이름은 ‘임은조’. 아바나 외곽에 있는 그의 집에 걸려 있는 지하투쟁 메달, 쿠바공산당 창건 당원, 내무성 훈장, 동아바나지역인민위원장 당선증 등은 쿠바혁명과 함께한 그의 ‘경력’을 말해 준다. 마탄시스 종합대학에서의 ‘봉기’ 쿠바의 한인들 가운데 최초로 종합대학에 입학한 임씨가 쿠바변혁운동에 뛰어든 것은 18살 때인 1940년대. 쿠바의 마탄사스주 종합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그에게 당시 쿠바사회의 부패와 폭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쿠바사회의 최하층인 한인으로 살아오며, 쿠바사회의 모순을 보아온 임씨는 한순간에 쿠바 혁명의 대의에 몸과 마음을 뺏겼다. “한번은 태풍(허리케인)이 쿠바를 덮쳐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수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정부관리들은 수해지원품을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지요. 이를 본 헤로니모는 다니던 마탄사스 종합대학에서 동료 학생들을 규합해 반정부 투쟁에 나섰습니다.” 임씨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장(71)씨는 아마 그때가 임씨가 쿠바혁명에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한 최초의 사건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임씨는 그 일로 구속돼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다니던 대학교수들의 호소로, 그해 겨울 석방된 임씨의 각오는 오히려 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임씨는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임씨의 지도교수였던 쿠바공산주의의 대부 지바스는 임씨의 결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대학의 반정부 투쟁을 주도한 뒤 마탄사스에선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반체제 인물로 찍힌 데다 경제적 형편마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임씨는 아바나로 거처를 옮겨 다시 아바나 종합대학을 다녔다. 낮엔 험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일과가 이어졌다. 강의를 듣지 못하고 시험만 치는 악조건 속에서도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던 임씨는 결국 학업을 중단했다. 그즈음 쿠바혁명의 기폭제로 불리는 ‘7·26투쟁’이 벌어졌다. 1955년 7월26일 피델 카스트로는 36명의 청년들과 함께 쿠바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자리잡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물론 당시의 습격은 무모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쿠바에는 이른바 ‘7·26운동’으로 불리는 무력투쟁노선이 전면에 부각됐다. 임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이 운동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산 속 게릴라투쟁이 아닌 수도 아바나에서의 지하투쟁이 맡겨졌다. 도시지역에서 비밀리에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나아가 도시지역의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일종의 도시게릴라 활동이었다. “헤로니모의 도시투쟁은 사실 산 속의 게릴라투쟁보다 훨씬 위험했습니다.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던 게릴라 동지들과 달리 동료들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적진에서의 비밀활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임씨의 부인 크리스티나 장씨는 “당시 아바나에서 비밀조직원으로 벌이는 도시투쟁은 피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며 “헤로니모는 여러 차례 체포 위기를 극적으로 넘겼다”고 회상했다. “혁명을 위한 삶, 후회는 없다” 가장 큰 위기는 52년 결혼 직후였다. 바티스타 정부의 경찰과 정보요원들이 불시에 임씨 집을 들이닥쳤다. 누군가 임씨의 활동을 고자질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였다. 바로 전날 우연히 집 안에 있던 중요 자료와 무기를 옮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59년 쿠바 동부 시에라마에스타 산맥의 산악지역에서부터 게릴라투쟁을 시작한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게릴라들은 이제 새로운 정부의 관료로 변신했다. 도시게릴라 임씨도 새 정부의 관료가 됐다. 경찰청장으로 부임한 혁명군사령관 아메 헤이가스의 보좌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임씨의 경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대다수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새 정부조직을 이끌 전문가가 많지 않았던 것이지요. 결국 종합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지식인이었던 나는 지식인들이 필요했던 경제부처로 가야 했습니다.” 임씨는 61년 경제부처인 공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뒤 임씨는 30여년 동안 쿠바의 공업부와 식료품공업부에서 고위 관료생활을 하다 지난 93년 차관보를 끝으로 퇴임했다. 하지만 임씨는 퇴임 직후 다시 동아바나 지역 인민위원장(차관급)으로 선출돼 2년간 쿠바의 한인으로서는 최고위직을 경험했다. “우리가 지난 40∼50년대 목숨을 걸고 한 일은 누구에게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혁명을 위한 삶이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임씨는 지난 인생을 돌이켜볼 때 “개인적 목적으로 일하고 살았다 할 수 없고, 우리는 오직 쿠바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며 전체 쿠바인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살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90년대 들어 쿠바사회가 좀 어렵기는 하지만, 혁명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에서 쿠바인들이 살고 있는 데 큰 긍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혁명유공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임씨 가족들은 쿠바의 지도층에 속한다. 아들 넬손(36)과 딸 파트리시아(31)는 모두 최고학부인 종합대학을 마쳤다. 특히 경제학자의 길을 택한 아들은 오리엔테주 종합대학 부총장이 됐다. 또 아들도 얼마 전 공산당원이 돼 임씨 가족은 모두 3명이 당원이다. 철저한 사회주의자답게 임씨는 인민위원장 퇴임 뒤 택시운전을 한다. 물론 택시운전은 쿠바 정부가 그에게 베푼 최소한의 ‘특혜’인 측면도 있다. 관광객을 상대로 달러를 쉽게 벌 수 있는 개인택시 운전기사는 요즘 쿠바에서 가장 인기있는 직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쿠바 한인들의 뿌리찾기 요즘 택시운전을 하는 임씨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쿠바에 사는 ‘코레아노’(한국인)들의 결집과 한인사회의 구성이다. 그 일은 임씨의 부친이던 쿠바 내 한인지도자 임천택씨가 마지막까지 소망했던 것이다. 그는 택시운전을 하면서 6개월여 이상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쿠바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얼마 전 협회설립신청서를 쿠바 정부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쿠바의 한인들도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의 한반도를 논의하고 기원했으면 좋겠습니다.” 노혁명가 임씨의 남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