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붓을 물에 빨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가 말을 건넸다.
그의 말이 환각처럼 그녀의 여린 가슴에 선연한 상처를 냈다.
한 마디의 말. 그렇게 사랑이 그들을 찾았다.
당시 그녀의 부친은 일본 제일의 제벌 화사의 계열사 책임자였으니, 식민지 청년인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패륜이나 다름 없었다.
1945년 4월, 미군의 일본 공습이 무차별 개시되자 상황은 반전했다. 일본은 패색이 짙어지자 전전긍긍했다.
그녀의 가족은 안전한 시골로 대피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독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원산으로 그를 찾았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었던 그녀는,
상류사회의 안정된 지위와 긍지 등을 모두 쓰레기처럼 내던지고
그에게 귀의했다.
그녀는 야마모토 마사코에서 이남덕李南德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중섭李仲燮의 아내가 되었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이들은 잠깐 행복했다.
한반도의 허리를 토막낸 전쟁의 공포가
다시 그들의 사랑을 위협했다.
일제의 식민제체마저 극복했던 그들이었으나,
참혹한 6.25전쟁 앞에 그만 굴복했다.
그들은 부산으로, 제주로, 다시 부산으로 부표浮漂했다.
그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했다.
허기와 가난에 찌들렸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사랑을 위해 초개처럼 버린 조국 일본을 다시 택했다. 두 아들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하면서.
그녀는 짓이겨진 자존심을 자탄할 틈도 없이 쓸쓸하게 귀환했다.
그리고. 그만이. 홀로 남겨졌다.
아내와 두 아들이 떠난 뒤, 그는 매일 절망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자신의 마음을 엽서에 담는 것.
사랑을 실은 엽서 속에 자신의 마음을 회화적으로 재현했다.
다시. 그림엽서가 시작됐다.
그래서일까, 엽서그림은 그토록 애절하다.
그는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서한을 보냈다.
내 마음을 끝없이 행복으로 채워주는 오직 하나의 천사,
나의 남덕군, 내가 최고로 사랑하는 남덕군,
작년 8월에
당신과 태현이와 아고리(턱이 길다고 붙인 그의 애칭)군 셋이서
히로시마로부터 도쿄로 가서 꿈과 같은 닷새 동안을 보내고 온 일을
지금 생각하고 있소
뭐니뭐니해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소
(중략)
하루 빨리 만나고 싶어 못견디겠소
『화가와 가족』,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그리움은 사무치는 원형에의 집착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원형광태圓形狂態. 그는 둥근 형상을 통해
대상과의 원만한 합체, 심리적 안정을 도모했다.
그는 원형 상징을 통해 가족과의 일체감을 거푸 토해냈다.
따라서 원형광태는 역설적으로 결핍의 현재진형형이다.
결핍과 갈증이 생성한 또 다른 모습이다.
영원한 하나를 염원하는 슬픈 몸짓이다.
원형에의 집착은 곧 결핍의 슬픈 고백이며,
완벽한 형식에 귀의하여 결핍을 해소하려는 몸부림이다.
그넌 아내와 두 아이를 가슴으로 포옹하며 둥근 원을 만들어
격리된 가족과의 영원한 결합을 기원했다.
가족을 안은 그의 얼굴에 잔뜩 만족감이 서려 있다.
가족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포옹하며
뜨거운 가족애를 나누는 중이다.
영원히 함께 하기를......
『황소』종이에 유채, 32.3×49.5cm, 개인 소장
1955년 1월, 그의 생애를 통해 본격적인 개인전이,
과장하자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다.
관람객은 성황을 이루었고 개인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전시회의 성공으로 일본으로 향할 자금은 물론,
차후 가족과 결합하여 가정을 꾸리기 위한
경제적 기반까지 마련코자 했다.
그런점에서 전시회의 성공은 고무적이었다.
최소한 그에게 경제적 도움을 약속하는 듯 했으니까.
그러나 성공은 역으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수익이 있었으나 무차별 소비됐고 사기까지 당했다.
그는 다시 절망했다.
희망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늘 경제에 문외한이었고 빚에 허우적거렸다.
육신만으로 다시 세상에 던져졌다.
그는 이제 무인도처럼 고립됐다.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자신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린 자화상
그는 자신의 그림을 태우거나 우물에 쳐넣는 것으로
시대와의 불화를 가학적으로 표현했다.
끊임없이 남덕이가 밉다고 울부짖었다.
아내가 밉다며 손등을 찢는 자학증세가 점점 심각해졌다.
영양실조와 간장염마저 그의 육신을 갉았다.
그는 거듭 음식을 거절했다.
정신이상의 징후마저 발견되어 정신치료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슬픈 자화상을 가까스로 조형하며
정신이상증세에 대한 소문을 일축시켰다.
그는 청량리 뇌 병원에서 몇 번의 발작을 일으켰고
서대문 적십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시멘트 바닥에 손을 짓이기며 아내를 원망했다.
손에서 흐르는 피가 지혈이 불가능할 것처럼 참혹하게 흘렀다.
수습되지 않고 물처럼 흐르는 피가 그들의 사랑을 대변했다.
가학 증세가 이제 멈추었다.
1956년 9월 6일 11시 40분, 그는 삶을 접었다.
가족들은 물론, 그 어떤 사람도 그곳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했다.
병든 짐승처럼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아무도 그의 슬픈 종말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무연고자로 취급되었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시체실에 방치되었다.
며칠 후 비로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는데,
9만원의 장례비 중 5만원을 친구 김광균이 지불했다.
그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봉원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오지 않는다고.
-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출처 ; 요절, 조용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