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남는 것이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은 역사로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간혹,
비범한 인물들의 사랑이
역사적 미담으로 혹은 야사로 전해지고 있지만,
중요한 건 실재하고 있는 너와 나, 우리들의 사랑이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남겨지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간단한 답을 하자면,
우리들의 사랑은 남는다.
다만 분명하고 단일한 이치로 남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뭇잎에 덮여 영영 사라져 버리는 수도 생긴다.
사랑이 역사적으로 쓰여지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우리들의 사랑이, 너와 나의 사랑이,
함께 꿈꾸던 단일한 사랑으로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랑으로만 남을 뿐.
동일한 의미로 자리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로서의 하나의 사실을 서로가 다르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 남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너에게 아픔과 좌절만을 안겨주고 떠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의미로 분명하고 단일한 이치로 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가슴 깊숙한 곳에 서늘하지만 분명 남는 까닭은
그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