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볼 아디다스 골든 볼은 각각의 FIFA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 중 FIFA 기술위원회가 몇 명의 후보를 선정하고 기자 대표들의 투표를 통해 수상자를 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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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골든볼 상세 설명
2002 한일 FIFA월드컵은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한 대회였다.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본선 무대였을 뿐 아니라, 올리버 칸이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아디다스 골든 볼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호나우도는 8골을 기록하며 사실상 혼자 힘으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전체 투표에서 이 독일 대표팀 주장의 득표수에 조금 못 미치는 표를 얻어 대회 최다 득점 선수상인 골든 슈를 수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독일은 칸의 놀라운 방어력에 힘입어 비판 여론을 잠재우고 결승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칸은 이전의 모든 경기에서 흠잡을 데 없는 경기를 펼쳤지만 결승전에서 유일하게 실수를 범해 호나우도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말았다. 브라질 대표팀은 경기 후반에 한 골을 더 넣었고 결국 독일은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감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33세의 수문장은 골든 볼을 수상하며 특별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칸은 요코하마에서 치른 결승전의 실수를 뒤로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골키퍼로서는 최초로 이 상을 받게 되어 정말 자랑스럽다. 월드컵 기간 동안 내가 발휘한 기량이 진정으로 인정받았음을 증명해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칸은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 아일랜드전에서 로비 킨이 종료 직전에 터뜨린 동점골만을 유일하게 허용하며 대회에서 여느 선수들과는 다른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칸은 그 1실점을 제외하고는 사우디아라비아 및 카메룬과의 조별 경기는 물론, 파라과이와의 16강전, 미국과의 8강전 및 개최국 한국과의 준결승전에서 모두 무실점을 기록했다. 상대 공격수를 허탈하게 하는 훌륭한 선방을 보여 준 칸에게 전세계 언론은 "타이탄", "제왕 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칸은 6세의 어린 나이에 라인강변에 있는 칼스루헤 클럽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고 그 팀에서 계속 머물며 기량을 쌓아 1990년 11월 분데스리가에 데뷔했다. 그는 끊임없이 훌륭한 기량을 선보이며 1994 FIFA 미국 월드컵에서 처음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지만 당시에는 벤치 신세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바이에른 뮌헨이 그를 영입했고 칸은 지난 10년 동안 이 바이에른의 강팀과 함께 전설적인 명성을 쌓아 왔다.
칸은 1995년 6월 23일 베른에서 열린 스위스와의 경기(2-1 승)에서 국제 무대에 데뷔했으나 6개월 후, 십자 인대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과 굳은 의지로 곧 부상을 털고 일어나 독일 대표팀에 복귀했고, 1998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후보에 머물렀지만 결국 대표팀의 1번 유니폼을 이어받기에 이른다. 2001년, 바이에른은 25년만에 유럽 최고 무대인 챔피언스리그에서 최초로 우승했는데 이때 칸은 팀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이 수문장은 발렌시아 선수들의 슈팅을 3차례나 막아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이미 독일컵 4회 우승과 리그 6회 우승 등으로 꽉 들어차 있던 바이에른 뮌헨의 트로피 캐비닛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이 추가되었고,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팀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칸은 여전히 우승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06 FIFA 독일 월드컵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우승을 향한 열망 또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나는 참여하는 모든 대회마다 우승을 하고 싶다. 월드컵에 출전하게 됐으니 당연히 세계 챔피언이 되고 싶다. 이번 월드컵은 홈경기의 이점이 있기 때문에 우승 여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고 칸이 말했다. 그는 또한, “월드컵은 분명히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시합의 긴장감과 치열한 경쟁, 스릴을 무척 좋아한다"는 말로 상대팀에 대한 투지를 밝혔다. 전 세계의 중앙 공격수들이 올 여름 이 "타이탄"과 맞서기 위해서는 최고의 기량을 갖춰야 할 것이다.
호나우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호나우도 루이스 나자리오 데 리마가 1998 프랑스 FIFA 월드컵에 등장했을 때, 많은 축구팬들은 그가 대회 최고의 스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94 월드컵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호나우도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브라질 대표팀 선수로서 FIFA 월드컵 경기에 첫 출전하여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후 4년 동안 이 브라질 스트라이커의 기량은 점점 향상되었고98 프랑스 월드컵이 가까워졌을 즈음에는 명실공히 세계 축구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 받게 되었다.
1994 미국 월드컵이 끝난 후 호나우도는 브라질 클럽인 크루제이로를 떠나 네덜란드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고, 56경기에 출전하여 44골을 기록하며 팀의 네덜란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1996년 이 젊은 스타 선수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활약상을 선보였다. 그는 폭발적인 가속도와 날카로운 골 결정력으로 전세계 축구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처음 수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 스트라이커는 코파 델 레이 및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했고, 1996/97 시즌에는 34골을 기록하며 프리메라 리가 득점왕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호나우도는 곧 인테르 밀라노로 이적했고 현지 언론은 그에게 ‘오 페노메노(천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또한 이 브라질 선수는 FIFA 올해의 선수상을 2년 연속 수상하며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
영예로운 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뒤 호나우도는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FIFA 월드컵 개막전에 출전하여 프랑스 대회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우수한 경기를 펼쳤으나 오른쪽 무릎 부상 때문에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브라질은 손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개막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 가까스로 2-1로 승리했다.
이어진 모로코 전에서 호나우도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플레이를 펼치며 경기 시작 9분만에 자신의 월드컵 무대 첫 번째 골을 터뜨렸고, 브라질은 그의 첫 골에 힘입어 3-0으로 승리했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는 호나우도가 득점 기회를 잡지 못하면서 브라질은 노르웨이에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호나우도의 진정한 가치는 16강전에 접어들면서 확실히 증명됐다.
호나우도는 칠레와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켜 브라질의 4-1 승리에 힘을 보태며 준준결승행을 확정 지었다. 한편, 덴마크 전에서는 득점 그 이상의 역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호나우도는 비록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덴마크 수비진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파고드는 그의 공격력은 팀이 3-2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나우도는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전에서 다시 한 번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골을 기록했고 경기는 전후반 1-1 무승부로 끝났다. 연장전에서도 승패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의 경기는 승부차기로 이어졌고 결국 브라질의 승리로 끝났다. 곧 호나우도는 월드컵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축구 인생 최고의 날이 되기를 바랐던 결승전이 열린 날보다도 앞서서 결정된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월드컵 우승까지는 4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프랑스와의 결승전 직전 호나우도가 컨디션 난조에 빠지면서 경기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브라질은 팀 전체가 충격에 빠져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지네딘 지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개최국 프랑스에게 3-0으로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호나우도는 두 번째 FIFA 월드컵 우승은 놓쳤으나 아디다스 골든 볼을 수상한 것으로 다소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대단한 공격수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결국 그 유명한 월드컵 트로피를 다시 한 번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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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서 빛나는 활약을 펼쳤을 뿐 아니라 그라운드 밖에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던 호마리우 드 수자 파리아는 골잡이로서 한 단계 높은 기술을 선보인 선수이다. 이제 40세에 접어든 그에게서 예전처럼 폭발적인 속도로 수비수를 제치던 모습은 보기 힘들지 모르지만, 골에 대한 그의 열망만큼은 변함없이 타오르고 있다. ‘오 바이징요(키 작은 사람)’라는 별명을 지닌 호마리우는 은퇴하기 전 통산 1000골 기록을 세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호마리우는 상대 수비수가 도저히 막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기술, 폭발적인 파워와 가속도를 선보이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보여 주었다. 당시 호마리우는 지금까지도 여전한 그만의 탁월한 스피드와 페널티 박스에서 빈 공간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가 되었고 브라질은 24년만에FIFA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다시 거머쥐었다.
사실 호마리우가 브라질 대표팀의 우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후반, 그가 축구팬과 언론의 지지에 힘입어 카를로스 알베르토 파레이라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면서부터였다. 그날 마라카나 경기장에서 있었던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 브라질이 상대한 팀은 우루과이였는데, 브라질이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1골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1950 월드컵 결승 리그 당시,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2-1로 지고 만 뼈아픈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브라질 팬들은 이 바르셀로나 스트라이커의 득점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호마리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수준의 실력을 뽐내며 연달아 두 골을 기록했고, 결국 잊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호마리우 자신도 그 경기를 생애 최고의 경기로 꼽기도 했다.
마라카나 경기장에서의 영웅적인 활약 이후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호마리우는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득점왕을 차지하며 소속 팀의 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스페인에서 성공적인 시기를 보내고 자신감을 얻은 이 작은 체구의 공격수는 세계 축구팬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94년 미국에 도착했다. 호마리우는 그러한 관심에 주눅들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번 월드컵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도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5골을 기록한 그는 아디다스 골든 볼의 주인공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1994년 6월 20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호마리우는 브라질 대표팀의 대회 첫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당당함에 걸맞은 훌륭한 기량을 뽐냈다. 그는 카메룬 전에서도 한 골을 더 기록했고 치열한 접전 끝에 무승부로 마감된 스웨덴 전에서는 귀중한 동점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직접 골을 넣지 못하는 경우에도 호마리우는 브라질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최국 미국과 맞붙은 16강전에서 브라질은 전반전에 레오나르도가 퇴장을 당해 10명의 선수만으로 후반을 치러야 했는데, 호마리우의 절묘한 어시스트를 이어받은 베베토가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호마리우는 치열했던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다시 득점하며 팀의 3-2 승리를 도왔고, 스웨덴과 다시 격돌한 준결승전에서 대회 통산 5호골을 기록했다. 그 마지막 골은 적시에 정확한 위치를 찾을 줄 아는 그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골이었다. 17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호마리우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완벽하게 뛰어올라 스웨덴의 키 큰 수비수들을 따돌리고 헤딩 슛을 성공시켰다.
1994년 7월 17일 결승전에서는 호마리우도 이탈리아 수비진을 뚫지 못했고 경기는 0-0으로 끝났다. 하지만 뒤이어 진행된 승부차기에서 그는 실수없이 공을 차 넣으며 다시 한번 제 역할을 다했고, 브라질은 4번째 FIFA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마법 같은 밤이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여름 하늘 아래에서 득점 기회를 노리며…”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가득 담은 두 눈이 세계를 매혹시켰던 1990년 6월, 로마의 올림픽 경기장은 환희의 장이었다. 물론 이런 마법과도 같은 활약을 펼친 90 이탈리아 월드컵의 주인공은 토토 스킬라치였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들이 활약하는 무대인 FIFA 월드컵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적절한 때에 영감을 얻으면 자신들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토토 스킬라치처럼 잘 증명한 선수도 없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출신인 스킬라치는 세리에 A에서의 첫 시즌을 멋지게 마무리한 후 안젤로 비치니가 이끄는 아주리 군단에 발탁되어 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게 됐다. 그는 1989/90 시즌 이탈리아컵과 UEFA컵을 거머쥔 유벤투스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당시 유벤투스의 감독은 디노 조프였다.
2부 리그 소속인 메시나에서 뛰어난 득점력을 선보였던 스킬라치는 유벤투스의 입단 제의를 받았으며 유벤투스에서도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곧 자신만의 색깔을 찾았다. 스킬라치가 FIFA 월드컵 이전에 이탈리아 대표선수로 경기에 출전한 것은 1990년 3월 31일 바젤에서 열린 스위스와의 경기였으며 이 경기는 월드컵을 대비한 이탈리아의 마지막 평가전이였다. 스킬라치는 이미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잔루카 비알리와 안드레아 카르네발레, 유망한 신인 선수 로베르토 바조, 최전방 스트라이커 알도 세레나 등과 함께 다양한 공격수로 구성된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처음 맞은 상대는 오스트리아였으며 이 경기는 치열한 접전의 양상을 보였다. 경기의 주도권을 이탈리아가 잡고 있었고 이탈리아 관중의 열렬한 응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쉽게 가려지지 않고 있었다. 후반 30분, 비치니 감독은 안드레아 카르네발레를 벤치로 불러 들이고 타고난 득점력을 지닌 발 빠른 포워드 스킬라치를 투입하여 상대팀을 교란시키기로 했다.
스킬라치가 경기에 투입된 지 4분 만에 비알리가 오른쪽 수비를 뚫고 육중하게 움직이는 수비수들 사이로 높이 뛰어오른 스킬라치에게 크로스를 날렸고 스킬라치는 헤딩골로 연결시켰다. 그 순간 스킬라치에게 풀리지 않을 마법이 걸린 것이다. 이탈리아는 FIFA 월드컵 우승을 놓쳤지만 시칠리아 출신의 포워드 스킬라치는 8년 전 파올로 로시가 그랬던 것처럼 아디다스 골든 볼과 골든 슈를 모두 거머쥐었다.
스킬라치가 골을 넣거나 주심으로부터 부당한 판정을 받았을 때 그의 눈에 나타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 또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다시 보여 주었던 그의 이러한 모습은 불굴의 사자 카메룬이나 로타르 마테우스 감독이 이끈 월드컵 우승팀 독일과 더불어 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상징하게 됐다.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스킬라치는 이런 마법 같은 기록을 다시 내지는 못했다. 토토 스킬라치는 1992년 여름 인테르로 이적한 후 1994년에는 주빌로 이와타에 입단하여 일본 축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신생 리그에 기여하여 현지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스킬라치는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다. 스킬라치처럼 마법과도 같은 활약을 펼치며 온 나라를 열광시킨 포워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는 1986 FIFA 월드컵에서 모든 축구선수들이 바라는 꿈을 이루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주장이자 상징인 이 사나이는 4년전 스페인에서의 평범한 플레이를 만회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멕시코에 도착했고 자신의 말처럼 멋진 경기를 펼쳤다. 마라도나는 우승국 아르헨티나의 최다 득점자로 총 5골을 기록하면서 엔조 프란체스콜리, 엔조 시포, 브라이언 라우드룹, 미셸 플라티니, 지코 및 게리 리네커 등 스타들과 함께 아디다스 골든볼의 영예를 안았다.
마라도나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경기에서 퇴장 당하던 모습은 추억으로 남기고 세계 무대에서 빛을 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1986년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드디어 4년 후 25세의 나이에 이 전설의 10번은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완벽함을 증명해 보이면서 그의 팀에 우승컵을 선사하고 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찬사를 받게 되었다.
과거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스타였던 마르도나는 날카로운 패스와 거침없는 드리블, 침착한 마무리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1986년 대회에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두 단계로 뚜렷이 구분된다. 첫 단계는 워밍업 차원의 플레이였지만 두 번째 단계인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천재적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16강전을 거칠 때까지 마라도나가 기록한 골은 예선 A조 두 번째 경기 이탈리아 전에서 무승부를 끌어낸 동점골이 전부였다. 그러나 8강전 숙적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이르러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2개의 골을 기록한다. 첫 번째 골은 이후 절묘한 핸들링으로 밝혀져 소위 '신의 손'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무려 60야드의 드리블과 냉정한 마무리가 만들어낸 두 번째 골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벨기에와의 준결승전에서 2골을 넣어 완승을 이끌어내고 이어 독일(당시 서독)과 우승을 겨루게 되었다. 마라도나는 결승전에서 직접 골을 넣지는 못했으나 호르헤 부르차가의 결승골로 이어진 절묘한 공간 패스를 통해 자신의 뛰어난 기량을 증명했다.
현재까지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FIFA 월드컵 우승으로 기록되고 있는 1986년 우승은 마라도나를 고국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 받게 만들었으며, 4년 뒤 그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다시 진출하면서 그에 대한 칭송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심각한 발목 부상이 1990년 본선 대회 내내 그를 어려움에 빠뜨렸으며, 결국 아르헨티나는 결승전에서 독일(당시 서독)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라도나는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FIFA 월드컵이었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단 두 경기만 치르고 약물 테스트에서 양성 판정을 받아 추방 당했다.
마라도나는 1997년 10월 25일 마침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보카 주니어스, FC 바르셀로나, 나폴리, 세비야, 뉴웰즈 올드 보이스 등의 프로축구 클럽을 거치면서 수많은 우승컵과 개인상을 거머쥐었다.
파올로 로시는 1982 아디다스 골든 볼 및 골든 슈를 수상하며 축구 경기에서 무엇보다도 득점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입증했다.
로시는 빈첸차에서 1976/77 시즌 동안 꾸준히 골을 기록하면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루자로 이적한 후 경기 조작 사건으로 2년간 출장 정지를 당하여 날개가 꺾이는 듯 했다. 로시가 이탈리아 대표선수로 처음 출전한 것은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FIFA 월드컵 대비 훈련 경기에서였다. 그는 20세의 어린 나이로 대회에 출전하여 세 골을 기록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파블리토’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엔조 베아르조트 감독은 로시가 오랫동안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대표팀에 발탁하여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시켰다. FIFA 월드컵 우승까지는 일곱 경기가 남아 있었고 로시는 스페인에서 치른 ‘아주리 군단’의 처음 네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조별 1라운드를 겨우 통과했으나 2라운드의 첫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맞아 승리를 거뒀다.
로시의 골 감각은 가장 중요한 때에 되살아났다. 그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세 경기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이전 게임에서 팀 동료들을 고군분투하게 했던 로시는 그 특유의 스타일로 기회를 포착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편의 빈틈을 뚫고 전력질주했다.
로시는 상대팀 수비의 조그만 허점도 놓치지 않고 이용하는 능력으로 자신의 체력적 결함을 보완한 뛰어난 스트라이커였다. 베아르조트 감독은 로시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으며 그를 프란체스코 그라지아니의 공격 파트너로 계속해서 기용함으로써 이러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 선수 기용에 대한 극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베아르조트 감독은 로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판단이 얼마나 적절했는지는 이후의 경기에서 입증되었다.
바르셀로나 사리아 경기장에서 열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기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과의 경기가 바로 그 전환점이 되었다. 로시가 기록한 해트트릭이 이탈리아의 월드컵 준결승 진출을 확정 지은 것이다. 연이어 로시가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득점한 두 골과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기록한 선취골도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드필드를 지닌 브라질을 굴복시킨 이 세 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두 경기가 끝날 때마다 사리아 경기장(브라질전)과 캄프 누(준결승전)의 전광판은 각각 ‘파올로 로시(이탈리아) – 경기 최우수 선수’라는 글자로 빛났다. 경기마다 이탈리아 팀의 수많은 선수가 수상 후보에 올랐으나 결정적 득점으로 궁극적인 기여를 한 ‘파블리토’가 만장일치로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로시는 유벤투스로 돌아와 세리에 A와 유럽 대회에서 우승했으나 스페인에서의 결승전 이후 그의 경력은 점차 쇠퇴했다. 이후 그는 유벤투스에서 AC 밀란으로 이적했고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지만 경기에 출장하지는 않았으며, 베로나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파올로 로시는 2006독일 FIFA월드컵에서 TV 해설가로 활동할 예정으로, 팬들은 다시 한 번 그의 타고난 순간 포착력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