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mir Ashkenazy)
1955년 제5회 쇼팽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인 베네뎃티 미켈란젤리가
1위와 2위의 순위에 항의하여 사퇴를 한 사건이 있다. 이 때의 2위가 바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이다. 이때 1위의 아담 하라셰비치와 그 후의 활동과 예술적 성과를 비교한다면 순위의 부당성이 스캔들처럼 아쉬케나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1937년 7월 6일 모스크바 서쪽의 도시
고르키에 있는 음악가의 집에서 태어났다. 6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7세 때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하이든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9세 때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의 중앙 음악 학교에 입학, 산베티안에게 사사했다.
1955년 18세때 이 10년제의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쇼팽 국제 콩쿠르에 출장 2위에 입상하였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명피아니스트인 레프 오보린에게 사사했다. 이듬해인 1956년 벨기에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 출장하여 당당히 1위로 우승하였고, 이로 인한 연주회에서 경이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후로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960년에 음악원을 졸업했다. 196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유학중이던 아이슬랜드의 여류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장하여 영국의 존 오그던과 함께 공동 1위로 입상하였다.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대회 참석을 망설였는데, 소련 당국의 반강제적 협박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소련측은 안방 잔치 임에도 불구하고 1회 대회에서의 우승을 미국의 반 클라이번에 빼앗긴 복수로 아쉬케나지의 출전을 동요했다고 했다.
아무튼 이로서 아쉬케나지는 완전히 세계적으로 제 1급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소련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반발하여 63년 서방으로(영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아쉬케나지의 피아니즘은 더욱 활짝 피어 국제적인 대가의 위치에 올랐다. 1968년 부터는 아이슬랜드의 레이캬비크에서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있다. 그는 아이슬랜드에서 2년마다 열리는 음악제의 고문이 되었고, 1969년 조국 소련에 귀국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974년 소련 국적을 버리고 아이슬랜드 국민이 되었다.
그의 피아노 음은 선명하면서도 산뜻한 기교가 도처에서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데, 종소리처럼 투명한 약음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을 띠고 고조하는 최강음까지 다양하고 세밀한 음색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런 테크닉을 무기로 그는 레카토의 선율과 화려한 피아노적 패시지, 정열적인 화음을 교차시킨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그는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피아노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음악적 발로의 연장선이라고 한다. 자신의 음을 피아노보다 더 큰 오케스트라로 표현하려는 그의 뛰어난 능력은 인정을 받아 국제적인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수석 객원 지휘),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음악감독),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수석 객원 지휘자), 베를린 독일 심포니 오케스트라(상임 지휘자 및 음악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블라드미르 아쉬케나지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2001년에는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여 말러 7번을 연주하였다. 2002년에는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콘서트 홀에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 및 협연을 하였는데 1960년대 서방 망명 이후 조국 러시아에서 갖은 첫 피아노 연주여서 화제를 낳기도 하였다.
블라드미르 아쉬케나지는 2005/2006 시즌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아이스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명예지휘자를, 유럽 연합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음악감독을 겸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