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서 밥도 먹고 집도 사고 했지만 누님들에 대해선 별로 쓴 적이 없다. 누님이 넷씩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넷씩이나 되는 누님들의 삶은 내 성장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지껏 그들에 대해 침묵해왔다.
큰누님이 예순을 넘겼고 나 또한 마흔을 넘겼는데도 나는 아직 그들에 대해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것이다. 어느 한 곳을 허물면 와르르 무너져 쏟아질 것만 같은 그들의 지나온 서러운 삶들을 섣불리 걷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
신경숙도 자전인지 픽션인지 모를 글들을 쓴다.
꼭 자전같기에 더 빨려들어가는데 그러다보면 늘 글속으로
감추어져가는 내면을 발견한다.
구효서는 좀 더 솔직하다. 그래 자유로워져야 글이 되는것이다.
아비얘기든 엄마얘기든 내가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아무것도 말할수가 없는것이다. 더 연륜이 필요하리라.
***
여기에 처음으로 셋째누님의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하지만 나는 둑이 무너져 누님의 회한어린 삶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오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누님의 얘기라기보단, 도라지꽃과 누님이 키우던 백구에 대해 슬쩍 쓰려고 한다.
누님은 2년 전부터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산전리 산 87-1번지에서 혼자 살고 있다. 다 쓰러져가는 농가 한 채를 공짜로 얻어 살고 있는 것이다.
줄곧 서울에 살던 마흔여섯 먹은 여자가 갑자기 강원도 산골짜기에 혼자 처박혀 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으면 금방 (산장의 여인)이라도 떠올림 직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누님한테 집을 내준 집주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누님이 왜 그곳에 내려가 살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집주인은내가 누님을 뵈러 종종 그곳에 들를 때마다 후회조의 한탄을 털어놓곤 했다.
[글씨 어느날인가, 땡볕에서 죙일 옥수수밭을 매고 있는디 아가씬지 아줌만지가 와서 묻는 거여, 아저씨 여기 집 한 채 살 수 없을까요? 이러는 거여. 그래 내가 말했지. 팔 건 없고 그냥 살려면 살 집은 있수다... 그랬더니 좀 보쟤. 보자길래 봬줬지. 담박에 들어와 살겠다는 것이여. 좀 놀라기는 했지만 집을 주었어. 그렇쟎아두 누굴 들이긴 들여야 할 집이었거든. 사람이 나간 뒤로 오랫동안 새 사람이 안 들어서 팔려고 했던 집이거든. 그런데 서울에 나가 사는 자식덜이 절대로 팔지 말라는 거야. 조금 더 묵히면 집값이 엄청 뛸 거라나 어쩐다나. 집 비워두면 무너지고 흉조 낀다는건 모르고.... 하여튼 집이라는 건 사람이 들어 살아야 안 무너지고 흉조도 끼지 않는 법이라 그냥이라도 살 사람이 있다면 줄 판이었지. 근데 저 양반이 달라는 거여. 보아하니 시골맛도 제대로 모르는 부인 같어서 주어버렸지. 기껏해야 서너 달 살다 못 견디고 나가버리겠지 허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게야. 지붕 뜯어고치고 기둥 바로세우고 보일러 들이고 어쩌고 하는데 앞이 캄캄해지는 거야. 물어보니까 집 수리하는 데 2천만원 가까이 들었다대....
일이 이렇게 돼놓으니 지금 와서 나가랄 수도 없고, 난 이제 자식덜한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것어. 저 양반 주민등록까장 예다 턱 옮겨놔 버렸으니... ]
누님은 지붕에 스티로폼을 깔고 시멘트를 얹었다. 시멘트가 마르자 유성 페인트를 바르고 정성들여 기타와 악보와 음표들을 그렸다. 오이 썰 듯 통나무를 잘라 벽면을 장식하고 틈새를 황토로 메웠다. 군데군데 벽을 뚫어 격자창을 달고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엔 백회를 발랐다.
대들보엔 손수 만든 한지등을 달았다. 거실 한켠에 세워놓은 여러 개의 통나무 토막 위에 촛농을 흠뻑 흘려놓았다. 마당 한켠엔 숯불구이며 바비큐를 해먹을 수 있는 멋들어진 야외화덕을 세웠다. 우물가 말뚝 위에는 양옥 모양을 한 새빨간 편지함을 앙증맞게 올려놓았다.
누님이 두 마리의 개를 얻어다 키운 것도 마른 장미와 마른 옥수수를 창틀에 멋스럽게 걸어놓는 일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4만원을 주고 사다 심은 우물가의 불두화와 이웃에서 씨를 얻은 채송화 곁에 두 마리의 희고 검은 강아지를 배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흰 개 이름은 백구였고 검정개 이름은 먹구였다.
누님은 어째서 그런 일을 죽을둥살둥 했을까. 웬만했다면 죽을둥살둥이란 말을 나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화단을 가꾸고 분꽃과 과꽃을 심고 마른 억새꽃과 수수이삭을 주워다 거는 일들을 누님은 마치 죽기 전에 뭔가를 바삐 해치우려는 사람처럼 돌아쳤다.
[그년 미쳤지 뭐야!]
오죽했으면 둘째누님이 혀를 차며 걱정했을까.
집을 치장하고 마당을 가꾸는 셋째누님의 정성은 극성맞다거나 신들린 듯하다는 말로 비유하기에도 부족했다.
온갖 잡동사니들을 끌어 모으느라 누님은 뻔질나게 동대문 시장이며 황학동 벼룩시장을 누볐다. 종묘상가며 조경회사를 몇 차례나 들락거렸다. 그것들을 사들이는 데 적지 않은 돈을 쓰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도 누님은 눈이 뒤집힌 것 같았다.
톱질 망치질도 수준급이었다. 목재를 사다가 하루종일 뚝딱거려 장식대와 간이의자를 척척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누님은 도무지 만족할 줄 몰랐다. 물론 그렇게 돌아치며 땀을 흘리다보면 그 일에 어느 정도는 만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자족하고 마는 누님이 아니었다. 주말마다 누님은 서울에 사는 형제들이며 친구들을 불러내렸다. 야외화덕에서 생닭을 통째로 구워 돌리고 가마솥뚜껑에다 삼겹살을 구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밭두렁에서 뜯어온 고들빼기잎에다 고기를 싸들고 맥주 한잔을 쑥 들이켠 다음에야
[어어, 조옿다!]
하고 누님은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나도 이런데서 이러허게 살아봤음 좋겠다]라거나 [역시 인간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해]라며 한껏 부러워하면 누님은 마침내 법열을 느끼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하다못해 어디서 무쇠화로 하나를 구해와도 누님은 그곳에다 된장찌개를 올려 형제들과 나누어 먹어야 만족을 하곤 했다.
방문을 열면 곧장 앞산이 들이닥치는 산전리 87-1번지. 싱크대 작은 창 밖은 그대로 푸른 들깨밭이요. 호박밭이었다. 자연 한가운데다 낮은 집을 짓고 사는 누님의 행복은 가히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
책을 읽으면서 줄을 긋는다.
그리고 그은 부분만을 다시한번 기록해둔다.
그런데 어젯밤 읽은 도라지꽃 누님은 줄을 칠수가 없었다.
낱말하나하나가 정확히 표현되어 맘에 드는 글만을 추려낼수가
없었다. 단편하나가 뭉클 가슴에 다 잡혔다.
지나갈수도 솎아낼수도 없어 다 쳐본다.
***
하지만 누님이 항상 그곳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서울을 이웃집처럼 드나들었다. 밋밋한 벽 한가운데다 청동조각품을 하나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기어코 차를 몰고 인사동이며 황학동까지 단숨에 내달아왔다. 누님의 집 마당 한켠엔 그래서 언제나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는 아이보리색 록스타 R2 지프가 서 있는 것이다.
하여튼 누님은 점점 바람 같은 사람이 돼갔다. 일단 맘먹은일엔 머뭇거리지 않았다. 휙, 하면 서울이고 또 휙, 하면 산전리였다.
언제부터 누님이 그토록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람이 되었던가.
원래 누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늘 고개를 반쯤 숙인 모습이었고 말이 없었다.
위로 누님이 네 분과 형님 한 분이 있었으므로 어린 막내였던 내 눈엔 그들이 구분되어 보이질 않았다. 남자는 형이었고 여자는 모두 누나였을 뿐이다.
무명틀에 앉아 북을 놀리면서 나한테 '무너진 사랑탑'을 가르쳐주었던 것도 그냥 어떤 누나였을 뿐이지 몇째 누님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내가 셋째 누님을 처음으로 구별하여 인식 할 수 있었던 것은 아홉 살 때였다. 누님은 그때 7촌간이던 아저씨댁에 가 있었다. 긴 산모퉁이를 두 개나 돌아야 나오는 그 아저씨집에 밥을 해드리러 가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병 나을 동안, 잠깐이면 돼.]
가기 싫다는 누님의 손목을 억지로 끌어내며 어머니가 말했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뒷간 곁 소나무 그늘 아래로 사라지던 누님의 검은 골덴바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잠깐이라곤 했지만 언제까지 아저씨댁에 머물러야 하는 건지 아무도 몰랐다. 자식이 없던 어저씨는 이미 지병이 깊었고 비만에 고혈압이었던 아주머니조차 기동이 불편했던 것이다.
누님의 나이 그때가 열네 살, 국민학교를 막 나온 뒤였다. 큰누님은 이미 시집을 가버린 뒤였고 둘째누님은 다 성장해서 어엿한 우리집 살림꾼이었다. 넷째누님은 국민학교 3학년, 아저씨댁에 보내질 사람은 셋째누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집의 누님을 보내야만 했었을까.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그 아저씨네는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분들의 사후 제사를 모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 누군가가 나였다. 문중에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거였다. 내가 겨우 두 살이었을때.
그분들의 사후 제사를 모신다는 조건으로 나는 장차 그분들의 전답을 상속받게 돼 있었다. 겨우 열 마지기 남짓한 논밭이었지만 단지 제사를 모신다는 대가로는 적지 않은 재산이라고 어머니나 아버지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싫다는 누님의 손목을 굳이 이끌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물려받을 얼마간의 논밭 때문에 누님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노부부와 함께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난 아무것도 몰랐다. 방학을 맞은 내 손을 잡고 누나한테 가보자던 어머니를 그래서 나는 뿌리치고 또 뿌리쳤다.
하지만 딱 한 번, 버럭 화를 내시며 다그치는 어머니를 끝내 어기지 못하고 누님이 살고 있던 아저씨댁에 간 적이 있었다. 아저씨네 마당에다 날 남겨놓고 어머니는 바쁘시다며 이내 돌아가고 말았다.
누님이 혼자 묵던 건넌방은 작고 어둡고 쓸쓸했다. 누님의 물건이라곤 작은 광목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광목 보따리는 방 한구석에 외롭고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 벽과 천장의 벽지도 낯설고 대청마루 빛깔도 낯설었다. 저녁때가 되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나가는 누님이 머슴의 어린 딸처럼 가여웠다. 무쇠솥 뚜껑을 여닫는 누님의 가느다란 팔뚝이 애처로웠다.
밤마다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혼자 누웠을 누님은 나와 함께 자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누님은 온밤내 나를 꼬옥 가슴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침 설거지가 끝난 뒤 누님은 나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한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감나무 삭정이로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때까지 누님이 그토록 그림을 잘 그리는 줄 알지 못했다.
나는 누님이 하는 대로 따라 그렸다. 내가 다 따라 그리면 누님은 '잘 그렸다'고 칭찬하고 손바닥으로 땅 위에 그렸던 그림들을 지웠다. 꽃과 나비와 산과 강을 다시 그렸다. 나는 또 따라 그렸다.
누님은 쉴새없이 어린아이와 사슴과 비행기와 신부를 그렸다.
그 뒤로 나는 누님이 보고 싶어질 때면 말없이 우리집 마당으로 달려나가 감나무 삭정이로 그림을 그렸다. 그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내 그림은 미술대학에 두 번 낙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스무 살도 안된 나이에 누님은 막 결혼한 둘째누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단칸 사글세방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 수는 없었다. 둘째누님이 쌍둥이를 낳자 누님은 사글세방을 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고향마을에서 내가 들을 수 있었던 누님의 소식은 소문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원효로에서 닭장사를 하던 둘째누님은 어머니에게 셋째누님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터이지만 막내인 나한테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진 않았다. 만화가 선생님 집에 머물면서 그림 그리는 시중을 들고 있다는 얘기가 있는 듯싶더니 누님은 어느새 하월곡동에서 살고 있었고, 얼마 뒤엔 인천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누님의 삶을 아무도 돌볼 수 없었고 아무도 확인할 수 없었다.
누님과는 이미 가족이라는 유대가 끊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덜 마른 고무신을 신고 들로 나갔고 어머니는 하루종일 무명틀에 앉아 북을 놀리거나 낡아 주저앉은 허수아비 몰골로 고추밭과 콩밭 이랑을 맸다. 형은 고만한 또래들과 소를 먹이며 담배를 피웠다. 넷째누님은 감자를 몰래 훔쳐내 장군바위 밑에서 친구들과 구워먹었고 나는 닭장에 기어들어가 달걀을 꺼내먹었다.
누님의 존재가 잊혀져 가물가물해질 즈음 어머니가 병색이 완연한 누님을 이끌고 나타났다. 누님의 손을 막무가내로 이끌고 7촌 아저씨네로 향하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누님을 안방에다 자빠뜨렸다. 내 눈에는 어머니가 누님의
딴지라도 걸어 넘어뜨리는 걸로 보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엔가 무척 화가 나 있는 얼굴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산과 들을 헤매며 약초란 약초는 모조리 캐다 혹은 찧고 혹은 달여서 누님의 입 속에다 퍼넣었다. 말오줌때, 개옻나무, 단풍터리, 뱀무.
닥치는 대로 후려다 어떤 것은 말리고 어떤 것은 이겼다. 우리집은 이런저런 약초들로 가득했고 냄새는 코를 찔렀다. 누님이 몸을 일으켜 앉던 날까지 어머니는 어둡고 험학안 얼굴을 한 번도 풀지 않았다.
누님은 그러헥 고향집으로 돌아온 날 어머니에 의해 가차없이 자빠뜨려졌고, 몸을 가누어 세우자 고향집을 떠났다. 누님이 주검처럼 누워 있던 텅 빈 아랫목을 보면서 나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식구들 누구도 누님이 돌아와 앓다 간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산과 들을 정신없이 헤매며 누님에게 약초를 뜯어먹이던 어머니조차 무덤덤한 표정으로 중뿔나게 콩밭만 맸다. 그리하여 누님은 또다시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힘이 부쳐 더 이상 농사는 못 지어먹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누님은 우리와 얼마간 함께 살게 되었는데 벼락같이 결혼을 해 부산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때 누님의 나이 갓스물. 스물한 살 나던 해 아들을 낳았고 스물 세 살 나던 해 딸을 나았다. 그리고 그 이들이 세발 자전거를 탈 때쯤 집을 뛰쳐나왔다. 애를 키우며 직장엘 다니던 어느날 생전 처음 회식이란 델 참석했다가 저녁 늦게 시어머니와 남편과 맞닥뜨릴 생각을 하니 도무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단다. 그 길로 누님은 집을 나왔고 아직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
그 뒤로 누님이 어떤 일로 먹고 살았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몇 차례 나이를 속여 위장취엽을 했고, 홈패션 학원의 강사인가를 했고 아파트 건축 현장을 찾아다니며 자연석을 세일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여튼 누님은 혼자 살면서 점점 맹렬해져 갔다. 적의와도 같은 맹렬함이 누님의 거의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다 행려병자에 놀라 몇 달간 가슴병을 앓던 고향마을 누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항상 자신의 처지를 최악으로 여기고 살아온 누님이었던 만큼 오히려 그녀에겐 여유와 달관의 웃음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산전리에 집을 얻어 죽을둥살둥 기둥을 갈고 지붕을 얹고 꽃나무를 심던 누님의 모습은 그래서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좀 그러지 않아도 될 터인데 여전히 맹렬하게 돌아치는 게 가족들한테 안쓰럽고 딱해보였던 것뿐이다.
누님은 밭 한가운데다 집을 짓고 계절 따라 피는 꽃들을 바라보며 신선처럼 쉬고 싶었을 것이다. 멀고 깊은 골짜기에다 자신의 손재를 조용히 가두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게 아직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에 한 번 올라오면 사나흘씩 시장을 돌아다니고, 친구들을 만나 산전리 보금자리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개들, 굶어 죽지 않았을까 몰라....'
누님은 웃으며 말했다. 뻔질나게 서울을 오가는 자신의 바쁜 일상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나올 때 사료 왕창 부어주고 왔는데 아마 그날로 다 먹었을 거야. 개들은 도무지 아껴먹을 줄을 모르거든....'
누님은 산전리집을 떠나오면서 백구와 먹구에게 사흘치 사료를 물에 개어준다고 했다. 그러나 개들은 그날로 다 먹어버리고 다음날부터 배가 고파 '지랄'을 떤다고 했다.
누님은 개들을 그다지 안쓰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연 속의 보금자리를 진짜 자연의 일부로 만들려는 자신의 열정을 흐뭇해할뿐이었다. 어떤 때는 1주일 내내 서울에 머물 때도 있었다.
'혹시 죽었나 싶어 가만히 개집엘 가보면 영락없이 튀어나오면서 꼬랑지를 흔들거든. 개들은 쉽게 죽지 않아...'
누님은 점점 개들한테 나태해져 갔다.
시골에 방치되어 있던 것은 농가뿐만이 아니었다. 다랑곶이논이며 텃밭들 중에는 놀리는 땅이 많았다.
나이 든 이들은 힘에 부쳐 농사를 짓지 못했다. 게다가 산전리의 거의 모든 땅은 이미 주인이 외지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록 도지없이 공짜로 일구어먹을 수 있는 땅이라 하더라도 그곳 산전리 농부들은 오래 전부터 농사짓는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말이지.. 저 땅들, 나보고 공짜로 부쳐먹으랜다....'
누님은 팔을 곧장 펴서 반원을 그리며 말했다. 마당에 앉았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텃밭을 공짜로 일구어먹어도 좋다고 땅주인이 말했다는 것이다.
'좋겠네. .... 누난 이제 땅부자 됐네...'
지난봄에 나는 정말로 누님을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누님은 농사짓는 일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분꽃과 채송화를 심고 조경회사에서 비싼 돈을 주고 불두화며 벚나무를 사다가 심긴 했어도 콩을 심는다든지 옥수수를 모종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주에 말이야... 나도 농사라는 걸 한번 지어볼까 싶어서 뒷집에서 고추 묘목을 얻어다 두 이랑인가를 심어본 적이 있거든. 근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땅심이란 거 있쟎아. 그게 그렇게 텃세가 심할 줄 누가 알았겠니. 한 30분 웅크리고 고추 모종을 하다가 넘어져 버렸어. 링거 두 병 맞고 겨우 일어났다는 거 아니니..저 땅들, 아무리 공짜래도 나한텐 소용없어.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저 텃밭 3분의 1도 일구어먹지 못할 거야. 참 독하데 그 땅심이라는 거....'
누님은 자기가 쓰러졌던 밭이랑 쪽을 바라보며 진저리를 쳤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마당 가장자리를 부쩍 침범해 들어온 잡풀들을 누님은 적의 어린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강아지풀이며 방동사니며 보리뱅이 같은 잡초는 누님이 공들여 키워놓은 화초들을 호시탐탐 넘봤고, 누님은 사기충천한 초병처럼 호미와 모종삽 따위를 들고 눈을 부라렸다.
자연속에 살고 싶어하면서도 누님은 자연과 무리 없이 친화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누님은 자신의 방식대로 하늘이며 구름이며 바람을 보았고 식물과 동물들을 키우고 돌보았다. 누님의 그런 방식은 종종 또다른 자연과의 충돌을 초래했다. 일테면 방동사니며 보리뱅이 같은 잡풀들과, 아니면 뱀, 지렁이, 개미, 팔, 모기 같은 동물들과.
우물가 말뚝 위에 세워놓은 빨간 앙증맞은 우편함은 늘 외부의 소식을 갈망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말쑥하게 서 있는 아이보리색 록스타 r2지프는 언제든 산전리를 뛰쳐나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산전리 주민이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누님의 평상복들은 잡초와 지렁이 따위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듯한 주술적인 색깔과 무늬를 띠고 있었다.
적어도 한 달에 두어 차례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전리에 놀러갔다. 야외화덕에다 통닭을 굽고 화로에 알굴을 넣어 토종된장을 끓였다. 누님은 1주일이 멀다 하고 서울에 올라와 실내장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고 고생하는 건 배고픈 백구와 먹구였다.
그러다 지난 여름 내내 나는 산전리에 갈 수 없었다. 한 TV프로그램의 초빙 리포터로 폐루와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에 갔었고, 돌아온 뒤로도 주말에 열리는 문학학교에 6주 동안 강사로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에야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랜만에 산전리엘 다녀왔다.
집 앞을 흐르는 냇가에서 홀치기 낚시로 버들치를 잡았던 지난 봄이 아이들에겐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낚시 바구니에다 새로 산 구더기 미끼를 넣고 하나로 마트에 들어 생닭 두 마리를 샀다. 횡성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일곱 살짜리 작은아이가 내기를 걸었다. 버들치를 가장 많이 잡는 사람한테 각자 5백원씩을 모아주기로. 지난 봄 낚시 때 열두 마리를 잡아 최고의 강태공이 되었던 녀석이 슬슬 내기낚시로 형과 아빠의 기세를 미리 꺾으려고 했다.
오후 5시를 조금 넘겨서 산전리에 도착했다. 저만치 누님의 집이 보였다. 지붕 위에 그려진 기타와 악보와 음표가 여름을 나면서 약간 바래 있었다.
'왜요. 아빠?'
변속기를 중립에 놓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는 나를 보고 작은 아이가 물었다. 아이는 어서 낚시질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가야 되잖아요. 왜 여기서 서요?'
큰아이가 물었다.
'잠깐 저 꽃들 좀 보고 가자'
나는 차에서 내려 큰숨을 들이켰다. 누님의 집은 꽃밭에 묻혀 있었다. 도라지꽃이었다. 보라색과 흰색의 통꽃들이 설핏 기운 햇살을 받아 작은 등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두 송이가 아니었다. 수백만 송이였다. 야외화덕 뒤쪽의 둔덕밭은 물론이고 진입로 좌우의 너른 텃밭에도 온통 도라지꽃이었다.
마당 앞에서 개울가로 이어지는 층층밭에도 도라지꽃들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누님의 집을 가운데 두고 빙 두른 밭에 다른 작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도라지꽃 천지였다. 누님의 집은 가없는 도라지꽃 평원에 찍힌 작은 점에 불과했다.
제법 몸피가 붙은 먹구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나왔을뿐 누님의 집에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아이가 마당에 선 채로 번갈아 고모를 불렀지만 누님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우물가 말뚝 위에 놓여진 빨간 우편함에 흰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곳에 메모를 남기고 잠시 이웃에라도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모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체부 아저씨. 새가 편지함 속에다 새집을 짓고 알을 낳았어요. 편지는 튓마루에다 놓아 주셔야겠어요'
나는 튓마루에 앉아 누님을 기다렸다. 튓마루에 편지 같은 건 없었다.
아이들은 고모를 기다리지 못하고 낚시와 미끼를 들고 냇가로 달려내려갔다. 나는 하릴없이 집 주위를 맴돌았다.
늦은 봄에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화초도 더 는 것 같지 않았고 벚나무 숫자도 그대로였다. 야외화덕 곁에다 국화를 심겠다더니 무슨 바쁜 일이라도 그동안 있었던지 국화가 보이지 않았다. 간이의자를 더 만들려고 잘라놓은 각목과 널빤지엔 검은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삼겹살을 구워먹던 가마솥 뚜껑에도 벌건 녹이 앉아 있었다.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곡괭이며 쇠스랑이 추녀 밑에 세워져 있었다. 호미와 조선낫이 기둥에 매달려 있는 것도 보였다. 농약분무기와 톱과 비닐과 흙 묻은 삽이 튓마루 한켠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먹구가 짖질 낳지?'
보라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누님이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풀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개들이 순한가 봐. 짖질 않어.'
나는 튓마루에서 일어섰다.
'짖질 않긴... 동네 사람들한텐 죽어라 짖어대면서 이상하게도 차를 타고 온 사람들한테는 짖지를 않아.'
팔에 둘렀던 토시를 벗고 누님은 우물가로 가 세수를 했다. 맨얼굴이었다. 물 묻은 발등이 검게 번들거렸다.
'참 좋아. 도라지꽃... 누가 심은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손이 보통 가는 게 아니야. 그냥 보기엔 이쁘기만 하지...'
누님은 도라지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았다.
'고추 두 이랑 심고 나가떨어졌던 누나가 웬일이야. 정말 저걸 모두 누나가 심었단 말이야?'
누님은 다시 말없이 웃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누님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흙묻은 바지와 보라색 반팔티 그대로였다. 내가 사온 생닭 두 마리를 보았으면서도 야외화덕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아이들과 함께 장작을 패고 불을 넣었다. 바비큐 도구였던 철근도막은 분꽃 지지대가 되어 땅에 박혀 있었다.
닭이 다 익어갈 즈음 산촌은 어둠에 덮였다. 누님은 마당에다 쑥을 태우고 먹다 남은 소주를 내왔다. 달도 없는 밤이었건만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도라지꽃은 빚을 잃지 않았다. 마치 눈밭 위에 파붇힌 기분이었다.
노릿노릿하게 익은 닭을 화덕에서 꺼내자 아이들이 입맛을 다시며 달겨들었다. 하지만 불내가 나는 뜨거운 그것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했다.
누님이 큼지막한 가슴살을 떼어냈다. 그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화덕 뒤쪽으로 던져버렸다. 나와 애들은 말할 것도 없이 누님조차 놀랐다. 나와 애들이 얼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해버린 것에 대해 놀라는 것 같았다.
'으응.. 백구.. 백구 먹으라고 준 거야'
당황한 아이들을 향해 누님이 말했다.
'백구가 어딨는데요?'
작은아이가 물었다. 누님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땅속에.. 화덕 뒤에 작은 무덤이 있어'
'백구가 죽은 거예요?'
큰아이가 물었다. 누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으응'하고 대답했다. 아무런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누님의 대답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송편처럼 생긴 달리 동산 능선에 떠올랐다. 달이 없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보랏빛 도라지꽃들이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얼굴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은 흰꽃들은 낮과는 다른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옅은 연두의 형광색이었다.
'백구 그놈이...'
푸른 달빛 아래 흐드러진 도라지꽃들을 한차례 휘둘러복 나서 누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 물었어. 손목에 구멍이 네 개나 뚫렸었지. 한동아 오른쪽 손목을 쓸 수가 없었어.'
'어쩌다가?'
김빠진 소주를 한잔 들이켜고 내가 물었다.
누님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산 쪽으로부터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누님의 앞머리카락을 흔들어놓았다. 어두웠지만 나는 누님의 쓸쓸한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화딱지가 났던 거겠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개들한테 밥이나 제대로 주었니.. 아무렇게나 사료를 개어주고 허구헌 날 서울로 치뺐쟎니. 시골집 이쁘게 꾸며서 뭐 한다고.... 그랬어. 동창회 모임두 있고 해서 닷새 동안이나 이 집을 비웠지 뭐니. 개들이 굶어죽었을지도 모르겠어서 부랴부랴 왔는데 다행히 살아 있더라. 그날은 냉장고에 있던 돼지고기까지 일부러 삶아서 주었지. 그런데 백구 그놈이 밥을 가져간 내 손목을 콱 문 거야....'
'그래서?'
내가 물었다. 손목을 물린 누님이 백구의 옆구리라도 냅다 걷어차 버렸다는 말일까. 아이들은 마당 한켠에 피워놓은 쑥불 주위를 맴돌며 수선을 떨었다. 그러나 어둔 산골마을이었다. 도라지꽃밭이 달빛에 소금밭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수선이 수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는 뭘... 나도 깜짝 놀라고 녀석도 깜짝 놀랐지. 황망간에 당한 일이라 첨엔 아픈 것도 잘 몰랐어. 모둥이라도 한 대 세개 때려줘야 했겠지만 그럴 생각도 얼른 나지 않더라구. 이왕 가져간 밥이니까 개집 앞에다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왔지. 그때부터 물린 곳이 부어오르기 시작하는데 아파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 아주 된통 물렸더라구.... 손이 권투장갑만하게 커지는 거야.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처럼 아픈 적은 없었어.'
나는 누님의 오른 손목을 보았다. 어두워서인지 개의 이빨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누님은 백구의 무덤이 있다는 화덕 뒤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백구 그놈 참 이뻤는데. 털도 눈처럼 희었었고.'
내가 말했다.
'이뻤었지. 지금도 눈에 선해'
누님은 다음날 아침까지 끙끙거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독이 온몸으로 퍼진 것 같았고, 운신할 수조차 없어 저녁까지 누워 있었다고 했다.
누님의 부어오른 손목을 본 집주인 아저씨가 기겁을 해 뒤늦게 백구의 허벅지 털을 잘라 불에 태우고 참기름에 개서 발랐지만 좀처럼 부기와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였다.
'그런데 이 녀석이 그때부터 통 밥을 먹지 않는 거야. 전날 삶아준 돼지고기도 그대로 있더라구. 나만 보면 죄지은 놈처럼 슬슬 피하고 눈치만 보는 거야. 차암.... 그래서 볼 때마다 내가 말했지. 괜찮아. 어서 먹어. 아픙로 너한테 잘할께. 약속해. 정말 그동안 미안했다.... 그런데도 먹지를 않아. 그러다 난 결국 병원엘 가야만했었어. 상처가 심각했거든. 집주인 아저씨한테 개들 먹이를 부탁하고 3일간인가 원주병원에 입원을 했던 거야. 퇴원해 보니까 백구가 죽어 있더라구. 먹구는 주는 대로 다 먹었는데 백구는 날 문 뒤로 먹이에 입도 안 댄 거야. 집주인 아저씨도 참 이상하다고 혀를 내 돌렸어. '
누님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빛 때문에 별빛은 성글었다. 아이들은 연기나는 쑥불을 폴짝폴짝 뛰어넘었다.
'그때부터 도라지를 심기 시작했구나!'
내가 말했다.
'백구가 죽은 뒤로 텃밭에만 매달렸어. 나 이제 농사도 지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니까 되더라구. 재미도 있고...'
우리가 앉아 있던 평상 쪽으로 큰아이가 달려오며 말했다.
'고모 고모 있쟎아요. 지난번에요. 지희가 버들치를 제일 많이 잡았었쟎아요. 그래서 오면서 지희가 내기를 걸었거든요. 이번엔 제일 많이 잡는 사람한테 5백원씩 모아주기로요. 그랬는데요. 오늘 지회가 몇 마리 잡았는 줄 아세요?'
누님이 물었다.
빵 마리요.
한 마리도 못 잡았다구 그럼 넌?
자그마치 일곱 마리요
그럼 지회가 가희한테 5백원을 줘야겠네.
내가 말했다.
그러자 누님이 비로소 웃었다.
어설픈 강태공이 당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