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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장은주 |2006.07.07 04:59
조회 21 |추천 0

 

 

오늘 저녁이 이 접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부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항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잼과 도연명과

 

라이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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