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해도 휴가의 첫날이 가장 달콤한 법.
전날 일찌감치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간에 쫓길 필요 없는 여유 한 틈 누리고,
깨어있는 건지 자고 있는 건지
어리숙한 상태로 널브러져 이리저리 뭉개고 있다가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맞춰 적당히 집을 나섰다.
역시 약속 시간 보다 여유있게 나올 뿐 아니라
십 여 분 늦어도 전혀 성내지 않을 '친구'와의 약속.
상습 정체 구간인 녹번-홍제-광화문 구역을 불사하는
버스 타기를 감행한다ㅡ지하철 환승은 금물.
요는,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100% 휴가 모드니까.
친구에게 적당히 얻어먹고 나도 적당히 차대하고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이답게 근황을 주고 받으며
제법 사회인 티를 내가며 폼을 잡다 헤어졌다.
아직은 학생인 녀석이 모습이 더 익숙한데,
그 녀석한테도 예전의 내가 더 익숙할테지.
종로에서 만나서 명동까지 걸어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녀석은 약속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가버렸다.
명동에 온 김에 이리저리 사람들로 흥건한 거리로 떠밀려 다녔다.
비오듯 땀을 흘리다가 손부채로 땀을 식히며 걸었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손빗으로 쓱 넘기다가
아, 이발해야겠구나 생각에 흐뭇해졌다.
왜냐하면 시간이 많아져서 이발도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즉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가진 95% 휴가 모드다.

뻘짓을 하고 다녀도 기꺼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역시 휴가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길을 걷다 앉기 적당한 장소가 나와서 가방에 넣어온
소설책을 꺼내 읽는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이 여간 아깝지 않다.
잊어버린 물건을 사무실에 두고 온 것 같아서
잠깐 갈등하다가 그냥 가서 가져오리다 마음먹었다.
기왕이면 걸어서 가보자, 만용도 부려보았다.
청계천 길을 쭉 따라서 가다가 종로 5가에서 창경궁 길로 돌면
그리 멀지도 않을 듯 싶다. 어제 한 짐 들여다 집에 가져갔지만
다시 가야한다는 생각에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액운이 닥친다해도 웃을 수 있는, 나는 90%휴가 모드다.
청계천 길은 정말 걷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는 연인이 많구나.
방금 지나친 남녀는 서로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 여자와
아무 말 하지 않는 남자의 컨벤션.
무얼 어쩌겠는가. 사랑하는데.
지금 앞서는 남녀는 척 보기에도 연애 초기임이 분명하다.
서로 팔꿈치 정도만 수줍게 닿을 듯한 거리를 두고
가볍게 손을 잡고 걷는다. 남자는 어색하고 여자는 수줍다.
그만그만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을 보자니 부럽다.
슬쩍 앞질러 걸어가준다. 지나칠 때 그들 얼굴 봐주는 센스!
대학로는 더 가관이겠지.

한참을 걸어 대학로, 사무실.
기대했던 물건은 없고 날씨는 덥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첫 날이 이렇게 끝났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염세적인 종말론자로 변심할 위기에 처했지만
아직은 꿋꿋이 이겨내련다.
들어가는 길에 이발이나 할까.
예컨대 나는 한가한 마음의 85% 휴가모드다.
그럼, 이제 여러분
휴가모드 지수가 0%가 되는 그날까지
모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