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헐리우드 영화의 대표적인 모습
대부분의 평론들은 이 영화를 ‘만화적 상상력의 현실화’를 이룬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말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메멘토(2000)’를 감독하고 ‘인섬니아(2002)’를 거쳐 2005년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배트맨은 기존의 여느 배트맨과 다른 모습을 표방한다.
환상 속 히어로의 모습은 이제 현실 속 자객으로 대치된다. 원작 만화 속 이야기의 답습은 우리(한국인) 눈에 조금은 낯설지만 일본의 자객의 변형이 바로 배트맨 이었다는 황당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영화적 설정을 제시한다. 이런 논리가 지금의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영웅 ‘배트맨’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 영화의 구성 자체를 꼬집지만, 변해가는 미국 문화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바라볼 때 지금까지 기존의 이미지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본다.
이 영화도 다른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블록버스터의 양식을 쫓고 있다. 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영웅의 탄생, 처음의 브루스가 진흙탕에서 뒹굴며 여러 명과 싸워 이겼듯이 그 끝에도 수많은 적들과 혼자 대립하며 범죄를 소탕하는 모습은 헐리우드 고전주의 이야기 형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배트맨, 그 존재의 무서움
필자가 이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고전주의적 형식의 답습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색다른 영웅의 이야기는 놀란감독의 작가적 촬영을 통해 재탄생되었다.
하늘을 가득 매우는 박쥐 때들은 커다란 박쥐 마크를 그리면서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엄청난 수량의 박쥐 때 들, 그 자체로서의 스펙터클을 이용해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박쥐 고유의 혐오스러움을 제시한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왜 배트맨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친절한 설명’, 갑작스런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젊은 시절 악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을 찾는 젊은 시절의 모습에서 스스로 영웅이 되어가는 갑부 브루스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매니아가 아니면 좀이 쑤셔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초반의 이야기 속에 영웅도 인간이라는 신(新)히어로 영화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배트맨 비긴스’의 배트맨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어느 영웅보다 ‘능력’이 부족한, 와이어를 활용해 하늘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1)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초인의 능력보다는 잘 훈련된 자객에게 감독은 빠른 ‘편집’을 통한 영화적 효과로 초인적 배트(bat)의 위협감을 두각 시킨다. 갱두목 ‘팔코니’를 잡기 위해 등장하는 컨테이너 박스 씬을 떠올려 보자. 컨테이너 박스는 배트맨을 숨기기에 더없이 좋은 미쟝센이다. 이러한 미로같은 장소에서 배트맨의 활약은 화면상에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두려워하는 갱들의 연기로 만들어지는 위압감 조성에 관객이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 있는 사이, 화면 밖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배트맨에 대한 위협감은 그가 입은 검은 슈트처럼 커져만 간다. 마침내 배트맨의 등장. 하늘에서 갱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쉴 새 없이 킥과 펀치를 날리는 배트맨. 하지만 그가 싸우는 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배트맨의 형상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다. 희끗희끗 지나가는 그의 팔에 달린 갈퀴. 하염없이 펄럭거리는 검은 망토. 감독은 가슴에 훤히 드러나는 배트마크를 생략한 채 한없이 검은 그 위협의 존재를 정신없이 사진기로 찍어댄다. 이러한 효과를 통해 배트맨은 ‘완전체의 지각’ 보다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로서의 ‘이미지적(的) 지각’2)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가시적 범위(카메라)의 급박한 변화가 주는 잔상효과는 그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게 한다. 시각적 완전체는 안전한 구도의 숏에서 인식된다면 배트맨의 액션씬은 그 평이함을 거부한체 다각도의 접근과 극도로 짧은 숏의 길이를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눈보다 머리를 통한 인식 -이글에서는 지금까지 인식되어 있는 배트맨의 이미지를 말한다.- 에 호소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강렬했던 노란 바탕 배트마크의 완전한 이미지는 이미 우리들 가슴 속에 있었지만 감독은 영화적 장치를 통해 그 완전체에 조금씩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브루스의 공포를 위해.
지극히 현실적인 그리고 지극히 만화적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보여주는 감각적 영상과 한스 짐머의 가슴 치는 음악이 어우러져 시대의 영웅을 인간적으로 보여주려 하고 있지만 영화는 전작부터 이어져 온 배트맨의 활약 무대, ‘고담시티’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작가는 만화적 상상력에 제한을 걸었고 현실에 제약에 만화적 상상력을 가미했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환타지적 요소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영화의 끝이 어떻던, 그리고 그 다음이 어떻게 진행되던, 배트맨의 상업적 활용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단지 놀란 감독의 능력에 탄복할 따름이다. 그가 창조한 배트맨은 이미 기존의 배트맨과 차별되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어떠한 은유, 풍자도 없었고 단지 배트맨의 스타일이쉬한 모습에 집중한 이 영화는 배트맨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joker 카드를 제시하며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