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포동 김지혜씨는 내가 13살때 좋아하던 사람이다.
굳이 과거형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25세의 황순재씨는 25세의 김지혜씨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세살때 난
꽤나 김지혜씨를 좋아했던것 같다.
13세의 남자가 그리는 이상적인 여성상이란 뻔하듯이
김지혜씨는 찰랑거리는 긴생머리와
단한번도 햇빛을 받아본적 없는
하얀 피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굳이 과거형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25세의 김지혜씨는 더이상 찰랑거리는
생머리와 하얀피부를 소유하고있지 않다.)
황순재씨가 김지혜씨를 처음본것은 12세때였는데,
때는 봄운동회를 앞두고 5학년 여학생들이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던 5월쯤이었던것 같다.
공교롭게도 그녀들의 단체복은 하얀 스커트였다.
윗옷도 하얀옷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난 그것을 하얀색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김지혜씨에 대한 그림을 그릴때 내 기억은
'하얀색 물감'말고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그러니까 12세의 황순재씨가 12세의 김지혜씨를 보았을때
그것은 - 너무나 진부하고 유치해 도저히 내가 썼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지만 -
'천사 였다'라는 말 이외로는 묘사가 안되는
절대적 흰색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흰색의 화신이란
겨우 11년 2개월치를 살아가고 있던 찌질이 소년에겐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한 추상화여서
소년은 그때
아무것도 실감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병에 걸린것은 그로부터 1년뒤였다.
국민학생의 사랑이란 학년진급을 절대적 변화
요인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5학년때 좋아하던 애를 6학년이 되어서도 좋아할수는 없었다.
그렇다. 1994년 3월, 황순재씨는 김지혜씨와 같은반이 되었다.
1년간 잠복해 있던 백색의 바이러스는
그동안 완벽한 기생처를 물색해온듯이
가슴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고 깊숙히 잠식해 갔다.
김지혜씨와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황순재씨는 바른생활 책으로 싸대기를
맞는 일도 납득할 수 있었고
반장선거에서 떨어진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운좋게 김지혜씨와 짝이 되었을때는
'내 자리에 다른 누구도 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영원히 빈자리로 남겨 나를 기억해 주세요.'
라고 유언을 남긴뒤 4층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사랑의 줄다리기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해야한다는 소박한 연애공식을 존중한 황순재씨는
내심 기뻐할뿐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황순재씨는 가슴에 뿌리 내린 나무만을 가꾸는
소박한 농부가 되고 싶었고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나무를 가꾸는
성실한 농부가 되고 싶었고
그리고,
그리고 황순재씨는 결실을 기대하는
꿈많은 농부가 되고 싶었다.
김지혜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걸 알게 된 이후에도
황순재씨는 꽤 오랫동안 김지혜씨를 좋아했던것 같다.
13세의 소녀들이란 지극히 자연적으로
오빠들을 좋아하기 마련이어서 같은 나이의 소년들을 울리곤 한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열세살 소년은
딱지, 구슬, 자전거, 비비탄총, 슈퍼그랑죠만으로
1년내내를 보낼 수 있는 맹목적 존재로서 같은 나이의
소녀들을 반하게 할만한 어떠한 매리트도
지니지 못한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후로 황순재씨는 미련때문에
매일매일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써서 간직했고
2학기 반장선거와 회장선거에 나가 예전으로 돌아가려
애써봤지만 김지혜씨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가구를 놔뒀다 치운 자리처럼 깊숙한 흔적이 되어
평생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라고 하는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그후로 김지혜씨는
닭을 내놓으라고 소리지르곤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장학금 받은 일을 자랑하고 츄리닝 차림에 얼굴만한
안경을 끼고 나오는
평범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제 김지혜씨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고
그 월급을 '닭'으로 환산하면 매달 80마리 이상이 될테지만
얼마전에도 닭을 사놓으라고 성질을 막내버리곤 전화를 끊었다.
이글을 쓰는 동안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알고있는
25세의 김지혜씨는 13세때의 김지혜씨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이 공백기를 갖게 된 중고등학교 시절.
그때 때마침 지구에 내려온 '거대한 외계닭'이
김지헤씨를 꿀꺽 삼켜버리고
김지혜씨인척 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어쨌든 김지혜씨는 그렇게 '닭의화신'으로 변해버렸고
황순재씨는 열세살때완 마음이 바뀌어서
흰색의 화신은 커녕 '닭'이라는 야생적 단어로
김지혜씨를 비하하고 있다.
그러나 딱 한가지,
황순재씨는 김지혜씨를 만나고나서
지워지지 않는 한가지를 안고 살아가게됐다.
김지혜씨는 그후로 다시는
황순재씨의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