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 첫 섹스를 기억하라
한때 내게 섹시한 남자의 기준이 됐고,
지금도 여전히 숨겨둔 애인처럼 아슬아슬한 설렘을 주는
제임스 스페이더의 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단지 잘생긴 남자일 뿐이지만, 이 남자의 진짜 매력은 허약하고 퇴폐적인 몽상가로 나오는
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수잔 서랜든과 함께 펼쳐보이던
후끈하고 팽팽한 앙상블이라니!)
남자가 한 여자에게 "무슨 색깔을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을 하듯
단순하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첫 경험은 언제였죠? 그 때의 느낌은?"
처음 만난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미친놈, 너 돌았니?" 하겠지.
그런데 이 여자, 잠깐 당혹해하다
이내 매우 구체적이고 담담하게 자신의 첫 경험을 풀어낸다.
누가 물어본 적도 없고 대답한 적도 없는, 생전 처음 털어놓는
그녀만의 첫 경험에 관한 이야기.
당신의 첫 경험은 어땠는가?
여기 당신과 다르지 않은, 수줍거나 혹은 담담하게
자신의 첫 경험을 추억하는 몇몇의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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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자(가명, 28세, 영화 홍보)
21세 때. 남자친구와 학교 근처 모텔.
몇 달 동안 착실히 스킨십의 수순을 밟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만족도는 +90 (첫사랑이자 첫 남자로서 매우 바람직했다)
한은실(가명, 35세, 외국계 회사 마케팅부 부장)
20세 때. 나를 짝사랑하던 학교 선배에게 빚쟁이처럼 시달리다
너무 귀찮아서 해버림.
뭐가 뭔지 몰랐으므로 만족도는 +60 (좋고 나쁜 기억보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탐색하던 순간만큼은 아름다웠다고 생각됨).
오은수(가명, 27세, 패션지 기자)
19세 때. 헤어진 연하의 남자친구와 다시 만난 기념으로.
첫 섹스를 레슬링처럼 치르고 모멸감과 죄책감만 들었음.
" 너랑은 안 맞는 것 같다"는 소시를 들었으므로
만족도는 -100 (생애 최악의 파트너)
김상희(가명, 25세, 카피라이터)
18세 때. 남자친구의 친구와 스키장에서.
술기운에 그렇게 돼버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음.
다음날 아침 남자친구에게 들킨 데다 남자친구의 친구였던
그놈이 내가 먼저 유혹했다고 발뺌해 죽이고 싶을 정도였으므로
만족도 -30 (그 자식,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시원찮았다.)
전미라(가명, 26세, 그래픽디자이너)
20세 때. 학교 축제 때 동아리 선배에게 일방적으로 당함.
내가 자신을 짝사랑하니까 섹스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듯.
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만족도는 +80(그 뒤로 사귀다 두 달 만에 끝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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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섹스의 기억은 각자의 생김새만큼이나 다르다.
만일 당신의 잊고 싶었던, 부끄러운, 아련한 추억의,
가슴이 뻐근한, 황홀했던,
치욕적인 당시의 기억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면 정말 미안하다.
키스와 달리 섹스는 기억의 무게가 다를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신생아들이 사물의 색깔과 움직임을 막 구분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기억의 촉수가 돼주는 것은 '촉감'이다.
그들은 몸에 감지되는 모든 종류의 터치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 기억은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지배적으로 감각기관에 남는다.
몸으로 전달되는 모든 것에 이토록 오랫동안 각인되는 어떤 기억,
그것을 맨 처음 느끼는 순간은 거의 전율에 가깝다.
사랑할 때 느끼는 모든 첫 경험이 그러하듯이.
말하자면 첫 섹스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 지금 당신이 하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하게 될 똑같은 행위의 기저에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첫 섹스에 대해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별로였다" 라는 대답이 두 배 이상 많았다는 것!
그렇다면 이 돼먹지 못한 기억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되는것아닐까?
글쎄~.
왜 도망쳐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남에게 줘버린 것도 아니고,
안간힘 쓰며 버티다 빼앗긴 것도 아닌데,
왜 죄책감과 모멸감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지 정말 모르겠다.
잊고 싶다면 잊어진다면 그러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몸이 스스로 기억하는 '몸의 기록' 이니까.
희화시킬 것도 미화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기억하자.
관계 전후의 상대방의 달라진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았거나,
아픔을 삼키며 이를 꽉 깨무느라 짜증이 솟구쳤거나,
모텔 특유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날의 상대는 잊어도 좋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자.
당신이 누군가와 몸으로 소통한 그 생애 첫 경험은
온전히 당신 것이므로 소중하다는 것을.
혼미한 첫 경험으로부터 당당하고 자유로워야
당신의 몸을 진짜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