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文身), 미학적 예술인가? 패션코드인가?
문신을 예술로 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화두인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군대에도 가지 못하고 조폭연하는 관습이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 많은 사회에서 문신을 여전히 예술로 인정하기 보다는 반사회적인 풍습으로 간주한다.
요즘은 스프레이 문신부터 귀여운 스티커 문신까지 다양한 방법의 문신이 있지만, 보통 문신이라 하면 피부에 상처를 낸 다음 그 부위에 색소를 넣어 글씨, 그림, 무늬 등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문신의 풍습은 미개민족이 성년식을 행할 때 주로 많이 하던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하며, BC 2000년경인 이집트의 미라와 세티 1세(재위 BC 1317)의 무덤에서 나온 인형(人形)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문신은 토착신앙과 관련해 주술종교적인 의례로 행해지다가 집단의 단결과 의리의 상징, 타인과의 관계에서 위협과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근래에는 하나의 예술과 패션으로서 이용되는 경향도 점차 강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예술은원시종교의 제례에서 파생되어 나와서 점차 제례수단으로서의 상징성을 잃어서 순수예술로 발전해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화 과정에서 상징성이 강하고 가학성.피학성을 띠는 특정 예술의 경우는 종교와 유사한 집단성을 강조하는 반사회적 집단이나 단체에서 半종교적 상징성이 상당기간 활용되다가 예술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다.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예술이라든가 안티성을 띠는 예술들이 그러한데, 현상태로 볼 때 비보이라든가 설치예술 등이 그런 성향이 보다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문신 역시 아직은 그런 단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런던의 캠든 타운에서는 펑크, 히피, 챠브, 걸프 족 등 다양한 문화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다. 자연히 이곳에서는 문신예술도 다른 어느 곳보다 성행할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곳의 타투샵들은 서너명의 타투 아티스트들이 모여 각자의 단골 고객을 확보하며 작업을 한다. 그 곳에서 만나는 타투이스트들은 “요즘에는 전과 같이 범죄자들이나 하는 듯한 이미지는 아니다. 문신은 하나의 예술”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여전히 문신이 범죄자 취급을 받는 면이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렇게 문신이 서서히 언더그라운드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타투 바람이 월드컵 때 얼굴에 박는 스티커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유행으로 번져가기도 한다. 그러나 피가 나고 따끔한 바늘 문신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는 타투이스트들은 바늘 문신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을 단발마로 끝나는 대중적인 패션 문신과 비교하려 하지 않는다. 바늘문신은 첫째, 문신 대상자의 변화 추구, 두 번째는 미학적인 예술을 몸에 담고 싶은 마음, 세 번째는 내면을 몸 밖으로 표출해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단발성 문신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투이스트들이 생각하는 차별성이 바로 문신을 예술이라 하기 힘든 면이기도 하다.
한때 범생들에게는 금기시되던 게임이 또한 문화사업이 된지 오래며, 거리의 불량소년으로 여겨지던 비보이들의 브레이크 댄스가 한류가 되고 있다. 한때 연예인들의 사망수단이던 대마초와 담배와 다를 게 뭐냐고 공공연히 대드는 세상이다. 그런 추세가 아니더라도 세상 어느 곳에서는 미학적 예술, 내지는 패션의 하나로 인정되는 문신이 마냥 언더그라운드 예술로만 남을 것이라 속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어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예술은 그 표현대상의 의지까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문신 예술은 표현대상의 의지 내지는 수용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가가 캔버스의 의사를 묻지 않고 칠을 하는 것과 문신가가 문신대상자의 의지를 묻지 않고 찌르는 것이 같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타니자키 쥬니치로의 소설 [문신](刺靑)은 바로 그런 문신사의 예술가적 고뇌를 얘기한다. 문신을 새기고 싶은 나신을 찾아 필생의 과업인 작품을 완성했으나 그 나신의 소유자에게 스스로 복속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복속하는 예술가의 고뇌랄까, 나르시즘의 원형이랄까. 그래서 소설 제목도 “스스로 멍을 새긴다”는 뜻의 [刺靑]인지 모른다.
예술가만의 독자성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대상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면에서 문신에술은 예술가의 책무와 표현 대상의 예술가적 감상의 공유, 그리고 작품 활동에 대한 사회적 용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신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대중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흉측한 문신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던 시대는 가고 일반인들에게 평범하게 다가가는 문신, 하나의 패션 코드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는 문신 문화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한번 새긴 문신이 실패했을 때, 맘에 들지 않을 때, 싫증이 났을 때 이를 평생 상처로 안고 가야 하는 표현 대상의 아픔은 문신이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먼 예술장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국내 유수 공중파 방송은 물론 각종 매체를 보더라도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이들이나 스타들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강조하고 표현하기 위해 문신을 이용하며 그러한 문화를 파급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적어도 위험부담이 큰 전신문신을 하지는 않는다. 시대를 앞서가며 유행을 선도한다는 연예인들조차 그럴진대 일반에 있어서 문신이 가지는 이미지는 여전히 금지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자신을 남과 다르게 표현하려는 개성으로 이해하고 점진적인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부감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문신이 예술과 패션코드의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의식의 전환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