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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

김기연 |2006.08.18 13:00
조회 73 |추천 0

글 : 영화평론가 정성일

출처 :

 

 


 

 

봉준호 감독의 은,

 정치적 읽기를 요구하는 영화다

 

봉준호의 세 번째 영화 을 보았다.

그런데 본 다음 깜짝 놀랐다.

정말 최상의 의미로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중얼거렸다.

 

봉준호, 당신 미친 거 아냐?

 

 

봉준호의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은 모두가 한물간 주제라고 생각한 토픽을

다시 우리에게 불쑥 물어보고 있다.

말 그대로 봉준호는 100억원짜리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정반대이긴 하지만 봉준호의 은

강우석의 와 ‘똑같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영화이다.

양쪽 모두 매우 뻔뻔할 정도로 노골적인 ‘정치적인 영화’이다.

한쪽은 우파 (영웅적-)민족주의,

또 다른 한쪽은 좌파 냉소주의 혹은 냉소적 좌파.

 

그것도 의 강우석처럼 그저 허풍을 떠는 제스처가 아니라 은 봉준호의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이다.

 

아무도 을 보면서

왜 저렇게 커다란 원숭이가 생겨났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을 본 다음

저런 기생 생물체가 가능한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런데 봉준호는 ‘괴물’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보는 사람이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군 기지와 한강, 부도 맞은 사장.

 

이 세개의 연속된 신은 누가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자명하다 못해 어리둥절할 만큼 노골적이다.

‘괴물’이 왜 생겨난 것인지 더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약간의 과장.

자본주의 시장의 ‘결과’를 분단체제하의 반식민지국가에 상주하고 있는 주한미군 부대의 ‘결과’가 잡아먹는다.

그런데 그 결과가 한강에 있을 리 없는 괴물이다.

 

 

은 ‘괴물’이 나타난 다음 현서를 납치당한 가족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급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런 다음 질문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 이 가족들은 무엇과 싸우는가? 

이 가족들을 돕지 않는 정부는 무엇과 싸우지 않는가?

 

말 그대로 (한)강 건너 불구경.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은 비정치적인 현실과 정치적인 상징 사이에서 갈린 틈새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재이다.

의 역설은 ‘괴물’이 맥거핀이 아니라 실재라는 데 있다. 

정치적 상징들 모두를 떠안고 그 모든 무게를 버티면서 위협하는

현실성의 상실로서의 대상.

 

‘괴물’은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을 걷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정치적인 각성을 일깨워 실재를 보라고 맹렬하게 촉구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반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남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비상계엄하의 국가.

감시와 배신의 세상.

낡은 토픽.

 

하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

 

 

박해일이 연기한 박남일은,  ‘추억’의 타임머신

 

현서의 삼촌이자, 박강두의 남동생인 박남일.

그때 박남일을 박해일이 연기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이후’에

에 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할 엔딩이 뻔한 을 봉준호가 왜 만들어야 했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 모든 노력에 대한 허망한 결론.

그런데 사실 은 그 이야기만으로 본다면

결국 과 같은 이야기이다.

혹은 까지도

봉준호는 이미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중이다.

 

 

그는 세번 모두 같은 이야기를 찍었다.

봉준호의 주인공들은 열심히 찾아다니고(seek and…)

                               그런 다음 찾는다(…find).

그런데 그들이 찾은 건 이미 죽었거나,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그때 봉준호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범인이 아닌 용의자. 이미 죽어버린 현서.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봉준호 영화의 두개의 그림.

거기서 봉준호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에서 봉준호는 그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다.

 

 

에서 박해일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하다가 졸업한 다음

백수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남일로 옮겨온다.

그런데 그는 말하자면 1980년대의 후일담,

아니 차라리 그림자처럼 보인다.

혹은 80년대에서 그냥 걸어나온 듯한 인물.

 

박남일은 의 시간을 고스란히 들고

안으로 옮겨온 일종의 ‘추억’의 타임머신이다.

혹은 이 말이 과장되었다면

박남일은 2006년에도 1980년대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더이상 연대는 없다. 

 

 

강변 저편의 휘황찬란한 도시.

이제 어떤 정치적 연대도 기대할 수 없는,

배신과 신고로 이루어진 저편.

납치당한 손녀, 딸, 조카를 찾기 위해

가장 보잘것없는 가족이 그렇게 애를 쓰는데 누구도 관심없는 시대. 카드와 빚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디지털 시대의

스산한 사리사욕의 이해관계만 남아 있는 저 거대한 빌딩.

 

 

거기에 남일의 자리가 있을 리 없다.

그는 ‘꽃병’을 들고 한강에 가야 한다.

거기만이 그가 서 있을 장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남일에게는 눈앞의 투쟁만이 그의 목표이다.

 

봉준호의 냉소적인 웃음이 여기서 울려퍼진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지

봉준호는 남일이 던진 꽃병을 보면서 한껏 웃는다.

그는 단 한번도 괴물을 ‘꽃병’으로 맞추지 못한다.

심지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그는 그만 어처구니없게도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고 만다.

 

남일은 현서의 영결식장에서 묻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남일에게 봉준호는 묻는다.

.

.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남주의 화살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

 

 

첫 번째 scene.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scene.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에 휘발유를 넣은 ‘꽃병’을 들고 괴물에게 던지지만 단 한개도 맞지 않는다.

박남일의 소주병.

 

첫 번째 scene.

박남주는 괴물이 한강변에 나타났을 때 전국체전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그때 박남주는 시간을 놓쳐 활시위를 당기지 못한다. 그걸 본 현서는 실망하고 매점에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마지막 scene.

박남주는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남일이 마지막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자 화살 솜방망이에 불을 붙인 다음 괴물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질문. 그래서 오직 남주만이 그의 행위를 성공시켰는가?

 

내 대답은 반대이다.

남주의 행위도 사실상 남일의 행위의 반복이다.

은 대부분의 장면이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숏이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신 안에서 두개의 신이 진행된다.

 

영화의 앞부분.

괴물이 나타났을 때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보여지는) 남주는 화살을 쏘고 있다. 그런데 그 화살은 결국 시간을 놓쳐서 쏘지 못한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 화살은 결국 과녁을 제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남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실망한 현서는 매점 바깥으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괴물이 나타난다.

그 괴물을 향해 남주는 활시위를 당긴다.

그러나 이미 현서는 죽은 다음이다.

그것이 복수의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남일이 ‘꽃병’을 던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 화살은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 맞기는 했지만,

그 화살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상과 목표의 분리.

 

 

그때 목표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괴물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정말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는가?

그 활시위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일종의 공허한 몸짓의 반복이다.

남주의 화살보다 더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알레고리가 있을까?

 

 

에서 끝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 하나는 가족이다. 그러나 영화 은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부서졌고,

그런 다음 더 부서져가는 과정을 밟을 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괴물이라는 것이다.

괴물이 죽었을 때 사실상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순환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이 영화가 끝난 다음 (다시 시작하는 현실 속의 속편의) 첫 장면은 당연히 다시 주한 미8군 부대에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선택이 남는다.

 

괴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

.

정치적 어젠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 속의 모호함 속에서 반식민지 상태로 ‘그냥’ 살 것인가?

 

 

(더글라스 부소장의 말을 빌리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

 

 

양자택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선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것’의 상태와 탈정치적인 일상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각성을 일깨워 실재를 보라고 외치다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그런 다음 음산한 에필로그가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무대는 눈 내리는 한 겨울 밤 한강 강변으로 옮겨간다.

거기 강두의 매점이 있다.

남일과 남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헤어져서 아마도 이전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현서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다(박희봉의 대사 “현서 덕에 우리가 다 모였다”).

 

그 매점에 박강두와 세주가 살고 있다.

현서의 자리를 대신한 세주.

일종의 유사 가족. 여전히 어머니의 자리의 부재.

 

나는 이 장면에서 현서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애도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 에필로그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

괴물은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일까?

 

 

강두는 여전히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마도 현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방송일 텐데 그는 발가락으로 채널을 꺼버린다. 눈이 내리고, 강변에는 강두의 매점만이 홀로 쓸쓸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낮과 밤의 차이가 아니다.

혹은 현서에서 세주에로의 대체가 아니다.

여기에는 좀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박강두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그런 게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낮에도 밤처럼 잠을 잔다.

그런데 괴물과 싸우고 난 다음에는 한강에 언제든지 괴물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총을 잡는다. 그래서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바깥을 살피면서 두리번거린다.

 

사실상 박강두의 입장에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걸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서 그 차이가

지금 정치적인 것의 위기감과 

탈정치적인 것의 나른함 사이의 차이와

불길할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이 마지막 장면이 만족스럽거나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만족과 불만은 정확하게 위기감과 나른함 사이의 차이의 반복이다.

 

 

만족스러운 위기와 나른한 불만족.

이 비대칭의 공존.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어두운 하수구.

화성에서는 연쇄살인이 벌어져 시체들이 발견되었던 그 하수구,

한강에서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그 하수구.

현실 속의 실재가 있는 그 블랙홀.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의 어두운 구멍.

 

나는 정확하게 의 거기까지만 지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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