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Van Beethoven (1770.12.16 본 출생 ~ 1827.3.26 빈 사망)
하일리겐슈타트(Heilgenstadt)의 유서(遺書)
청각을 해친 베토벤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교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농갓집 방 하나를 빌려서 요양했다. 그 동안에도 작곡은 계속되었지만 여기서 소위<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가 씌어졌다. 이 유서는 베토벤이 죽은 후 우연히 발견되었다. 베토벤보다 네 살 아래인 아우 카를, 여섯 살 아래인 아우 요한 등 두 사람 앞으로 쓰인 것이었으나 요한의 이름을 적어 넣을 장소는 공백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기입되지 않은 것인지 후에 삭제된 것인지는 정확치 않다.
하일리겐슈타트(Heilgenstadt)에서 1802년 10월 6일
나의 아우 카를과 요한에게 - 나의 사후(死後)에 이행되기 바라며
오! 너희들은 내가 심술궂고 고집이 세고 또한 사람들을 멀리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무슨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는가?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숨은 원인을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나의 마음과 정신은 친절하고 다정한 감정으로 넘쳐 있었고 오늘날까지 나는 마음과 정신에서 우러나는 선행을 매우 좋아했다. 심지어 선행을 성취하는 것을 내 의무로까지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6년간이나 절망적인 병에 걸린 데다 무능한 의사 때문에 증상이 자꾸만 나빠져 가는 것도 모른 채 머지않아 회복되리라는 헛된 희망에 2년을 현혹되어 왔으나 마침내는 병이 '만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설령 어느 정도의 회복은 가능했을지라도 완쾌하기까지의 시간은 장담할 수 없었다. 열렬하고 쾌활하며 사교도 곧잘 즐길 수 있는 성질을 타고 났건만, 일찍부터 나는 사람들을 멀리 떠나 고독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쩌다가 그러한 모든 고난을 박차 버릴지라도 오! 얼마나 무참하게 내가 불구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슬픔에 부닥쳤던가!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보다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완벽해야 할 그 감각, 예전에는 내가 완전무결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 감각의 결함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가 있겠는가? 오! 그것은 나로서는 못할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동아리에 섞이고 싶으면서도 외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나를 용서해 다오. 그 때문에 나는 오해를 받아야 하는 까닭에 이 불행은 이중으로 나에게 괴로운 것이다. 사람들과 사귄다든가, 자상한 이야기를 속삭인다든가, 서로 심경을 토로 한다든가, 그러한 것을 즐겨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고독하다. 참으로 고독하다. 부득이한 경우라야만 나는 세상 사람들 사이로 나간다. 마치 쫓겨난 사람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까이 가면, 내 병세를 남들이 알아차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무서운 불안에 사로잡혀 버린다. 지난 여섯 달 동안 내가 시골에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청각을 정양하라는 현명한 의사의 권고를 받았던 것인데,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번 나는 사람들과 사귀기 즐겨하는 내 성미에 못 이겨, 사람들의 모임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 옆에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든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랴! 그러한 경험들로 말미암아 나는 거의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하마터면 나는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 벌일 뻔 하였다. 그것을 제지하여 준 것은 오직 예술뿐이었다. 자신에게 부과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창작을 완성하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이 비참한 생명을 부지하기로 하였다. 참으로 비참한 생명이다. 하도 자극을 받기 쉬운 몸뚱이어서, 아주 조그만 변화일지라도 나를 최선의 상태에서부터 최악의 상태로 던져 버리는 것이다. 인종(忍從)! 이렇게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내가 길잡이로 택해야 할 것은 바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하였다. 바라건대, 참고 견디고자 하는 나의 목숨을 가져 영원히 계속되어 주었으면 한다. 준엄한 운명의 여신들이 나의 목숨을 가져가기를 원하게 될 때까지. 차차 좀 나아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각오는 되어 있다. 스물여덟 살에 벌써 도통한 사람의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더욱 가혹한 일이다. 신이여, 당신은 높은 곳에서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실 것이니 그것을 아실 겁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의 가슴 속에 뿌리박혀 있음을 당신은 아실 겁니다. 오! 너희들이 장차 이 글을 읽게 되거든 생각하여 보라, 너희들이 내게 얼마나 옳지 못했던가를.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한낱 불행한 사람이 자연의 갖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고자 전력을 다하였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너희들, 나의 동생 카를과 (요한)아, 내가 죽은 뒤 아직도 슈미트 박사가 살아 계시거든, 즉시로 내 병의 기록을 작성하도록 나의 이름으로 박사에게 청원하라. 그리하여 그 병태 기록서에 이 편지를 첨부하라. 그러면 내가 죽은 다음에 세상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적어도 가능한 한도의 화해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나는 너희들 두 사람을 나의 사소한 재산의 - 그것을 재산이라 부를 수 있으면 - 상속자로 인정한다. 성실하게 둘이서 나누어라. 합의하여 서로 돕거라. 내게 대한 너희들의 나쁜 소행은, 너희들도 알다시피 벌서 오래전에 이미 용서하였다. 동생 카를아, 요사이 네가 나에게 보여 준 호의에 대해서는 특히 너에게 감사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보다는 행복하고 고생을 덜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의 아이들에게 도덕을 권하라, 도덕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내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내가 자살로 인생을 끝마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또한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다들 잘 있어라. 서로들 사랑하며 살아가 다오. 나의 모든 친구들, 특히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슈미트 박사에게 감사한다. 특히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내게 준 악기는 너희들 중 누구든지 한 사람이 보전하여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너희들 사이에 조금이라도 불화가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좀더 유익한 일에 쓰일 수 있다면 팔도록 하여라. 무덤에서라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하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음을 맞으리라. 나의 예술적 천분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가져 보기 전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나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해서 죽음이 그렇게 일찍 오는 것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다만 좀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용감히 너(죽음)를 맞으리라. 그러면 잘들 있어라.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잊어버리지 말아 다오. 살아 있는 동안에 나는 너희들을 항상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자 노력했으므로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자격이 있지 않느냐? 이 소원을 이루어다오.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반 베토벤 -
하일리겐슈타트(Heilgenstadt)에서 1802년 10월 10일
이것으로 너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참으로 슬프다! 그러나, 저 잊지 못할 희망, 적어도 어느 정도는 쾌유하리라 생각하고 이곳으로 왔을 때 가졌던 희망, 그것을 지금은 모조리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을 나뭇잎이 떨어져 시들고 마르듯이 그 희망도 꺾이고 말았다. 여기에 왔을 때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는 떠나간다. 아름다운 여름날에 이따금 나를 고무해 주던 저 의연한 용기까지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오오 신이여! 마지막으로 단 하루라도 좋으니, 순수한 환희의 날을 나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참된 환희가 나의 가슴에 일지 않게 된 지가 오랩니다. 오오, 오오, 어느 날에, 오오 어느 날에 신이여, 또다시 자연과 인간의 전당에 서서 내가 그 환희를 맛볼 수 있을 것인지,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환희일 것인지. 아아, 그렇다면 너무나도 냉혹합니다.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반 베토벤 -
<내용출처 :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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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유서를 작성하기까지 엄청난 정신적인 고뇌가 있었다고 한다. 생활은 곤란했고 사랑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귓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하일리겐슈타트에 요양을 가서 자살할 것을 생각하며 유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비롯해 교향곡 3번부터 9번까지 그의 걸작들은 대부분 그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한 후에 작곡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곡들은 이 이후에 작곡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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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TV를 통해 방영된 '제3회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서 래리 와인스타인 감독의 2005년 작 다큐 '베토벤의 머리카락'(Beethoven`s Hair)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베토벤의 머리카락 몇 올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인(死因)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과학자들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일반인보다 100배가 넘는 납 성분이 검출된 사실에 주목한다. 결국 이것이 그를 괴롭혔던 귓병, 그리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원인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며 괴팍한 성품도 납중독에서 때문이며 이와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병마와 싸우며 고통에 신음하다 죽어간 베토벤.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하는 의사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곤 했던 그의 머리카락에서, 놀랍게도 모르핀(진통제)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차라리 육신이 찢기는 듯한 고통과 싸울지언정,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죽는 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음악을 만들길 원했다. 그것은 운명에 맞선 처절한 투쟁이었다. 1802년부터 빈 근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살았던 베토벤은 그해 10월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써서 두 동생 앞으로 남긴다. 하지만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1827년까지, 적어도 25년이 넘는 세월을 병마와 싸우며 음악을 향한 열정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체의 병이 깊어지면서 불멸의 음악이 태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