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 송강호,배두나,박해일,변희봉,고아성 / 119분 / 2006년 / 한국
“영화 최단기간 1000만 관객 돌파!”
개봉 20일만에 10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한국의 영화 시장 규모를 무시해 버리고 있는 이러한 기형적 흥행의 원인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문화운동가 손병휘씨는 19일 CBS 라디오 ‘뉴스야 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우리나라의 역사적 배경 세가지 ‘중앙집권 전통, 식민지와 독재 경험, 지도층 부패’를 언급하며 영화 을 향한 ‘쏠림현상’의 원인을 사회병리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했었다. 분명히 전체주의문화 가속화와 사회전반의 집단무의식 확산이는 측면에서 이는 경계해야 할 현상임은 분명하다. 글구 시장의 요구라는 명명하에 620개라는 초유의 개봉 스크린을 잡아버리는 독점적 배급시스템 또한 다양성과 볼 권리 침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듯 하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이 되는 질문부터 해보겠다. 과연 영화 은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볼만한 작품인가?
미안하지만 난 여기에 그리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겠다.
분명 나 걘적으론 이란 작품은 굉장히 좋았다. 봉준호 감독의 B급 감수성이 좋았고 그의 어그러진 유머가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매니아적 취향을 가지고 소수의 지지자들만 선호하는 영화의 특질을 얘기하려는게 아니라, 그것들이 지금의 폭발적인 쏠림현상을 이끌어 낼만큼 대중적이냐는 대에서 회의적 견해를 나타내려는 거다.
‘좋은 영화에는 사람이 몰린다.’라는 영화판의 진리는 자명하다. 그러나 ‘사람이 몰릴만한 좋은 영화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아무도 만족할 만한 정답을 내릴순 없다. 영화를 보는 각자의 시각과 취향이 다른 상황에서 관객 1000만을 우습게 보는 상황을 ‘영화가 좋으니까!’라는 말만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의 나라 미국에서도 역대 흥행작 1위인 이 벌어들인 돈은 6억불이다. 인구대비, 관람료 등을 가지고 우리나라 관람객 수로 환산하면 이는 900만명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아,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인보다 더 영화를 사랑하니까? 글쎄,,)
영화의 흥행을 자꾸만 영화 외적인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 예컨데 사회병리학(위에서 언급한!)이나 한국영화판의 특수성(비쥬얼에 대한 한국관객의 자격지심이나 충무로의 고질적인 배급구조 등), 대한민국의 현재상황(국가에 대한 불신과 경제 불투명, FTA) 등을 가지고 해석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영화다.
무책임한 정부와 비리로 점철된 관료, 그리고 미국의 압력과 언론의 작태 등을 꼬집으며 결국 영화 속 강두(송강호)가족이 싸워야 하는 ‘괴물’은 생명체 ‘괴물’이 아닌 근 20년간의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임을 설파한다.
일반 괴수 영화가 오만가지 뜸을 들이며 관객의 애간장을 태운 후 괴수의 정체를 영화 중반 쯤에 가서야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 영화 속의 괴물은 시작한지 15분도 안되서 백주대낮에 직사광선을 받으며 등장한다. 장르영화의 법칙과 공식을 비트는 이 같은 전개는 ‘당신네 들이 궁금해 하는 괴물의 모습을 미리 공개합니다. 자, 이제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에 집중해주시죠.’ 라는 봉준호 감독의 재기 넘치는 배반인 셈이다.
나는 특히나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권력관계가 눈에 들어왔었다.
종종 현대사회에서 권력이란 앎의 대상, 실상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미국이 괴물의 실체를 생명체 자체가 아닌 근거없는 ‘괴바이러스’로 규정하고 박강두(송강호)를 숙주로 오인하고 통제하는 상황은, 권력의 주체에 의해 현상이 어떻게 해석되어 지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핸펀 번호추적은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권력의 과시를 드러내는 대사나,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라며 하층민의 설움을 토로하는 강두의 아버지 박희봉의 대사는 공권력이라는 허울 속에 힘없는 자의 상대적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현실의 자화상이다.
주한미군 관계자들끼리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대화하다가 박강두가 ‘노바이러스’라는 말을 캐치하고 나서, “노 바이러스? 바이라스가 없다는게지?” 라며 얘기할 때 유발되는 웃음은 이러한 권력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하루아침에 정체 모를 괴물의 습격으로 딸 현서를 잃은 강두 가족에게 국가와 사회 권력은 더 이상 그들을 지탱해주는 보호막이 아닌, 현서를 찾으려는 강두 가족의 의지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괴집단 일뿐이다.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고 있는 상황인데도 정부는 괴물 잡을 생각은 안하고 접근통제만 하며, ‘괴바이러스’ 운운하는 비상식적인 상황.. 진실이 실종되고 질서가 부재한 공권력의 테두리 속에서 강두 가족은 홀로 한강변으로 향하고 괴물과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상황은 종료되고 하늘에는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한 눈발이 휘날린다. 그러나 여전히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이유는 제2, 제3의 괴물이 출몰할 것 같은 상황, 여전히 한국사회의 썩어빠진 권력의 총체들에 의해 민중이 억압받는 엄연한 현실 덕 분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그 자신이 권력이 돼서 한국영화의 다양성의 저변을 짓밟으며 스크린 독점과 관객 편식증의 기형적 시장구조를 여실히 들어낸 영화 처럼 말이다.
권력의 실상을 알아버린 강두는 한밤중의 작은 소리에도 총을 집는다. (영화 초반, 대낮에도 밤처럼 잠을 자던 강두가 아니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