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태종 정관 19년(乙巳, 645년)
황상이 백암성(白巖城, 요녕성 등탑시 서쪽)에서 이기었을 때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安市城, 해성시)의 성은 험하고 군사도 날카로우며 그 성주도 재주와 용기가 있어서 막리지가 어지럽힐 때1)에도 성을 지키면서 복종하지 않자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떨어뜨릴 수가 없어서 이 때문에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建安城, 개주시)에 있는 군사는 약하고 양식도 적어서 만약에 그들이 생각 못한 곳으로 나아가서 이를 공격하여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公)이 먼저 건안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고,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우리들의 뱃속에 있게 되니 이 병법이 이른 바 ‘성 가운데는 공격하지 아니해야 할 것도 있다.’2)라고 하는 것이다.”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사들의 양식은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에 도적들이 우리들의 운송로를 끊게 된다면 장차 어찌합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울리며 가서 건안성을 빼앗을 뿐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공(公)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소?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황상의 깃발과 차개(車蓋)3)를 멀리서 보기만 하면 번번이 성에 올라가서 북을 두드리니 황상이 화가 났는데, 이세적은 성을 이기는 날에 남자건 여자건 모두 이를 묻어버리게 해 달라고 청구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공격하기를 오랫동안 하여도 떨어뜨리지 못하였다.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4)이 황상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소인5)은 이미 몸을 대국(大國)에 맡겼으니 감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일찍 위대한 공로를 성취하시어서 소인도 처자와 만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에 있는 사람들도 그 집안을 돌아보고 애석해 하여서 사람들이 스스로 싸우니 쉽게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소인은 고려의 10여만 명의 무리를 가지고서도 깃발을 바라보자 막히고 무너졌고 날 사람들의 간담(肝膽)이 깨졌습니다. 오골성(烏骨城, 요녕성 봉성시)의 욕살(褥薩)은 늙은이여서 굳게 지킬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서 그곳에 가되 아침에 가면 저녁이면 이길 것입니다.
그 나머지 길에 있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풍문만 듣고도 달아나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곳에 있는 자재와 양식을 거두어 북을 치고 나아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張亮)의 군사가 사성(沙城, 요녕성 대련시)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2-3일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고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뽑아버리고 압록수(鴨祿水, 압록강)를 건너서 곧바로 평양(平壤)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이번 거사에 있습니다.”
황상이 장차 이를 좇으려 하는데 홀로 장손무기가 생각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을 나왔으니, 여러 장수가 온 경우와 달라서 위험을 타고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6) 지금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오랑캐들은 무리가 10만 명인데 만약에 오골성을 향한다면 모두가 우리의 뒤를 밟아 올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빼앗은 다음에 멀리까지 달려가서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만 가지가 다 안전한 대책입니다.”
황상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황상은 성 안에 있는 닭, 돼지의 소리를 듣고서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지 오래 되었는데 성 안에서는 연기와 불이 날로 미미해가고 지금에는 닭과 돼지가 심하게 시끄러우니7) 이는 반드시 군사들에게 잡아 먹이는 것이고 반드시 밤중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니 의당 군사를 엄히 하여 이를 대비하시오.”
이날 밤에 고려사람 수 백 명이 성에 줄을 매달아 내려오니 황상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아래에 이르자 군사를 불러서 급히 쳐서 목을 벤 것이 수십 급(級)이었는데 고려 사람들이 물러나서 도망하였다.
강하왕(江夏王)인 이도종(李道宗)이 무리를 감독하여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土山)을 쌓고 그 성을 조금씩 압박하자 성 안에서는 또한 그 성을 더 높이 쌓아서 이를 막았다. 사졸들이 차례를 나누어서 교대로 싸우는데, 하루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 교전하였으며, 충차(衝車)와 포석(礮石)8)으로 그 성루(城樓)를 파괴하였더니 성 안에서는 따라서 목책을 세워서 그 부서진 부분을 막았다.
이도종은 발을 다쳤는데 황상이 친히 그를 위하여 침을 놓았다. 토산을 쌓는 일을 밤낮으로 쉬지 않아서 무릇 60일이나 되었는데 공력은 들인 것은 50만 명 분량이었다. 토산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丈)정도 떨어져 있어서 내려가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도종이 과의(果毅)인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꼭대기에서 적(敵)을 대비하게 하였다.
토산을 무너져서 성을 눌러버리니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롭게 거느리는 부대를 떠났었는데, 고려사람 수백 명이 성이 부서진 곳으로 나와서 싸우고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고 참호(塹壕)를 파가지고 이곳을 지켰다.
황상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목 베어서 조리를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이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는데 3일이 지나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도종은 맨발로 깃발 아래까지 가서 죄를 받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너의 죄는 마땅히 사형감이다. 그러나 짐은 한(漢)나라의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9)이 진(秦)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채용한 것10)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개모성과 요동성을 격파한 공로를 갖고 있으니 그러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황상은 요좌(遼左, 요동성)지역에는 일찍 추워지고 풀은 마르고 물을 얼어서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며 또한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계미일(18일)에 군사를 회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먼저 요주(遼州, 요녕성 요양시)와 개주(蓋州, 개모성; 요녕성 무순시) 두 주(州)의 호구를 뽑아서 요수(遼水)를 건너게 하고 마침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면서 선회(旋回)하였는데, 성 안에서는 모두가 흔적을 감추고나오지 않았다. 성주(城主)11)는 성에 올라가서 절하며 인사하니 황상은 그가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고 비단 1백 필을 내려주면서 임금을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강하왕인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위(後衛)를 맡게 하였다.
을유일(20일)에 요동(遼東)에 이르렀고 병술일(21일)에 요수(遼水)를 건넜다. 요택(遼澤, 요양의 서쪽 소택지)은 진흙벌판이어서 수레와 말이 통행하지 못하자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잘라서 길에 메우도록 하였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를 교량으로 삼았는데, 황상은 스스로 나무를 말의 안장걸이에 묶어서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 병신일(1일)에 황상이 포구(蒲溝, 요택의 소택지)에 이르러서 말을 세우고 도로를 메우는 여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발착수(渤錯水, 요택을 지나가는 물줄기)를 건너게 하는데, 폭풍 속에 눈이 내리니 사졸들은 옷이 젖어서 많은 사람이 죽으니 칙령을 내려서 길에다 불을 지피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무릇 고려를 정벌하면서 현토(玄菟), 횡산(橫山), 개모(蓋牟), 마미(磨米), 요동, 백암, 비사(卑沙), 맥곡(麥谷), 은산(銀山), 후황(後黃)의 열개 성12)을 뽑아버리고 요주와 개주 두 주의 호구를 중원지역으로 옮긴 것이 7만 명이었다.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驆)에서 있었던 세 번의 큰 전투에서 목을 벤 것이 4만여 급(級)이었고 전투하다가 죽은 병사가 거의 2천명이었고, 전마(戰馬)로 죽은 것은 열 마리 가운데 7~8 마리였다.
황상은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위징이 만약에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행동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역마를 달려서 위징에게 소뢰(小牢)13)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고 그의 처자를 불러서 행재소로 오게 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병오일(11일)에 영주(營州, 요녕성 조양시)에 도착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요동(遼東)에서 사망한 사졸들의 해골을 유성(柳城, 영주의 치소가 있는 곳)의 동남쪽에 모아 놓게 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대뢰(大牢)14)의 제사를 마련하게 하고 황상은 스스로 글을 지어서 그들에게 제사하였으며 곡(哭)을 하게 되었을 때에 애도함을 극진히 하였다.
그 부모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내 아이가 죽었는데 천자가 그에게 곡을 하였다니 죽었다하여 어찌 한스러워 할 것인가”
황상이 설인귀에게 말하였다.
“짐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늙었으니 신진(新進)의 날래고 용감한 사람을 얻어서 이를 거느리게 하려고 생각하는데, 경(卿)만한 사람이 없으니 짐이 요동지역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지만 경을 얻은 것을 기뻐하오.”
병진일(21일)에 황상이 태자가 받들어 영접하려고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기(飛騎)15) 3천 명을 좇게 하고서 말을 달려서 임유관(臨渝關, 하북성 무녕현의 동쪽)으로 들어갔고, 길에서 태자를 만났다.
황상이 정주(定州, 하북성 정주시)를 출발할 때에 입고 있는 갈포(褐袍)16)를 가리키며 태자에게 말하였다.
“너를 볼 때까지 기다려서야 마침내 이 갈포를 바꾸어 입겠다.”
요좌(遼左)지역에 있을 때에 비록 한창 무더워서 땀을 흘렸으니 바꾸어 입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구멍이 뚫리고 해어지니 주위에서 그것을 바꾸어 입도록 청하였으나 황상이 말하였다.
“군사들의 옷은 대부분 해졌는데 나 홀로새 옷을 입어야 옳다는 말인가?”
이에 이르러 태자가 새 옷을 올리니 마침내 이를 바꾸어 입었다.
여러 군사들이 포로로 잡은 고려의 백성 1만 4천 명은 먼저 유주(幽州)에 모았다가 장차 군사(軍士)들에게 상을 주려고 하였지만 황상은 그들이 부자와 부부가 떨어지고 흩어지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유사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값을 매기게 하고 모두 전(錢)이나 포(布)를 가지고 대신주고 풀어서 민(民)으로 삼으니 환호하는 소리가 3일 동안 쉬지 않았다.
11월 신미일(7일)에 거가(車駕)17)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더니 고려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영접하며 절하고 춤추며 환호하였는데,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니 먼지가 바라 보였다.
경진일(16일)에 역주(易州, 하북성 역현) 지경을 통과하는데 사마인 진원숙(陳元璹)이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파고 불씨를 모아 두고서 채소를 심었다18)가 이를 올리었다. 황상이 그가 아첨하는 것을 싫어하여 진원숙의 관직을 면직시켰다.
병술일(22일)에 거가가 정주에 도착하였다.
정해일(23일)에 이부상서인 양사도(楊師道)가 채용한 사람의 대부분이 적당한 인재가 아니었다는 죄에 걸려서 공부상서로 좌천되었다.
임진일(28일)에 거가(車駕)는 정주를 출발하였는데, 12월 신축일(7일)에 황상은 종기가 나는 병에 들어 보연(步輦)19)에 올라서 갔다. 무신일(14일)에 병주(幷州)에 도착하니 태자가 황상을 위하여 종기를 입으로 빨았으며 연(輦)을 부축하여 걸어서 좇기를 며칠 동안 하였다. 신해일(17일)에 황상의 병이 나아서 백관들이 모두 경하하였다.
황상이 고려를 정벌할 때에 우영군(右領軍)대장군인 집실사력(執失思力)으로 하여금 돌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하주(夏州)의 북쪽에 주둔하여 설연타를 대비하게 하였다. 설연타에서는 다미(多彌)20)가한이 이미 즉위하였고, 황상은 출정하였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황하의 남쪽지역을 노략질하니 황상은 좌무후(左武候)중랑장인 장안사람 전인회(田仁會)를 파견하여 집실사력과 함께 군사를 합쳐서 이들을 치게 하엿다.
집실사력은 파리한 모습으로 거짓 퇴각하며 그들을 유인하여 깊이 들어오게 하였다. 하주(夏州, 섬서성 정변현 북쪽 백성자)의 경내에 들어오게 되자 진을 정비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설연타는 크게 패배하니 뒤 좇아서 6백여 리를 달려가서 사막의 북쪽에 위엄(威嚴)을 빛내고 돌아왔다.
다미는 다시 병사를 발동하여 하주(夏州)를 노략질하니 기미일(25일)에 예부상서인 강하왕 이도종에게 칙령을 내려서 삭주(朔州), 병주(幷州), 분주(汾州), 기주(箕州), 남주(嵐州), 대주(代州), 흔주(忻州), 울주(蔚州), 운주(雲州)의 아홉 개 주(州)21)의 병사를 징발하여 삭주(朔州)에서 진수하게 하였다.
우위(右衛)대장군인 대주(代州)도독 설만철(薛萬徹)과 좌효위(左驍衛)대장군인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는 승주(勝州), 하주, 은주(銀州), 수주(綏州), 단주(丹州), 연주(延州), 부주(鄜州), 방주(坊州), 석주(石州), 습주(隰州)의 열개 주22)의 군사를 징발하여 승주에서 진수하게 하였다.
승주도독인 송군명(宋君明)과 좌무후(左武候)장군인 설고오(薛孤吳)는 영주(靈州), 원주(原州), 녕주(寧州), 염주(鹽州), 경주(慶州)의 다섯 주23)에 있는 군사를 징발하여 영주에게 진수하게 하였으며, 또한 집실사력으로 하여금 영주와 승주에 사는 돌궐족 군사를 징발하여 이도종 등과 서로 호응하게 하였다. 설연타는 요새 아래가지 왔다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감히 나오지 아니하였다.
아주 자위를 트리플로 치는 이 미친자들..-ㅅ-
결론
-세줄 요약-
1. 싸웠노라.
2. 조낸 깨졌노라.
3. 그래도 당은 위대했노라.
출처: 디씨 역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