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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성으로 찍는다.

김시영 |2006.09.08 11:40
조회 37 |추천 0


김홍희 "나는 사진이다" 中...

일본에 있을 때 유대인 여자 친구가 있었다. 국적은 미국.

유대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 가운데 하나가 머리가 좋다는 것이다. 역시 그녀도 머리가 뛰어나게 좋았다.

다국적 학생이 공부하는 반에서 함께 일본어를 공부하는 동안, 한자 받아쓰기와 한자 읽기 시험에서 내내 만점을 받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는 동양학을 공부하러 일본에 왔지만, 현직은 바이올린니스트였다. 시카고 시립 오케스트라의 제2바이올린 악단장이기도 했다. 공부는 물론 바이올린까지 잘 켜는 재원이었다.

나는 당시 한 달 동안 죽도록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겨우 FM2의 보디만 한 대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렌즈를 하나 살 수 있었다.

그때 산 렌즈가 35mm 단렌즈로 F2.0이었다. 당시로써는 35mm 가운데 가장 밝은 렌즈로, F2.8렌즈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값을 치르고 구입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모든 돈으로 산 FM2 보디 한 대와 35mm렌즈 하나가 당시 내 유일한 카메라였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집에서 보내오는 돈으로 F3나 핫셀, 또는 그 비싼 라이카를 구입해서 폼을 잡고 다녔다. 물론 나도 그런 카메라를 사고 싶었다. 핫셀이나 라이카는 몰라도 F3 정도는 서너 달 아르바이트를 하면 살 수 있었다.

'장비 병'이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카메라만 있으면 꼭 걸작이 찍힐 것만 같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결국 그 카메라를 사야만 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원하던 카메라를 손에 넣고 사진을 찍어보지만 이전에 쓰던 카메라나 새 카메라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다시 다른 장비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신통치 않다. 그것이 라이카가 됐던 핫셀이 됐든 사진은 전혀 좋아지지 않는다.

FM2는 아무리 들고 다녀도 '뽀다구'가 나지 않았다. 같은 유학생이었던 다른 친구들은 핫셀이나 라이카, 적어도 F3를 양쪽 어께에 한 대씩 걸고 다니면서 장비 자랑을 했다. 그런 학교에 FM2 한 대 달랑 메고 간다는 것은 내게 일종의 수모와 가난의 표상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장비를 바꾸려고 할 즈음, 입만 열면 좋은 카메라와 F3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 유대인 여자 친구가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린다. 그녀가 음악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 가운데 유달리 우렁차고 좋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가진 학생이 있었다. 모두들 그 바이올린이 아주 비쌀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린다 역시 그것이 비싼 바이올린이라서 좋은 소리가 나고, 자신의 바이올린은 보급형이라서 보통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호기심 많은 린다는 어느 날 그 친구에게 그 바이올린을 한번 켜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린다가 친구의 바이올린을 켜자 자신의 바이올린보다 형편없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지만, 친구는 씩익 웃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린다는 깨달은 바가 있었고, 자신의 바이올린이 최고의 소리를 낼 때까지 죽도록 연습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장비 병에 들어 내 사진이 안 좋은 것은 FM2라는 보급형 카메라를 쓰기 때문이라고 자나 깨나 변명하고 있을 때 린다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역시 그녀는 머리가 좋았다, 만약 내게 "사진도 못 찍는 게 카메라 탓만 하고 있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었더라면 나는 아마 화를 내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경험담만 이야기하고 내 사진이나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나는 그 날로 F3를 사려고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 Try-X 필름과 인화지를 샀다. 그리고 사진을 열심히 찍어 현상하고 인화했다.

가지고 있는 카메라라고는 FM2와 35mm 렌즈 하나. 이 장비로 1년 이상을 사용하면서 4조 반(다다미 네 장 반, 약 두 평)의 아파트에서 현상과 인화를 해대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사진도 사진이지만 렌즈 화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35mm 렌즈의 화각을 익고 나니 이후 600mm 망원이든 지금 상용하는 17mm 광각이든 잡히는 대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화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렌즈를 지칠 때까지 써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나는 린다의 이야기를 들은 후 카메라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그렇다고 일에 필요한 카메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 최고 기종까지, 35mm에서 4x5까지 다양한 카메라를 쓰고 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다. 어떤 일에 필요한 카메라가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이 일회성이라면 카메라를 더 사지 않고 동료에게 빌린다. 더 이상 장비에 투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로부터 "어떤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사진을 막 시작하려는 사람은 물론,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사람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사실은 나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 1등 카메라라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캐논을 즐겨 쓰는 친구가 겨울의 만주를 촬영하러 갔다. 그의 카메라 가방에는 당시 최고의 명기였던 캐논 F1 두 대와 당시 새로운 디자인으로 사진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T90-'탱크'라고 불리던 기종 한 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목에 M 시리즈의 라이카를 한 대 걸고 베이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갔다. 라이카 렌즈는 28mm.

만주의 겨울 추위는 여간이 아니다. 거대한 대지는 꽁꽁 얼어붙고, 거칠 것 없이 대지를 가로지르는 매운바람 때문에 길을 걸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만주가 그렇게 추운 곳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베이징에서기차를 타고 만주로 들어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촬영을 시작하자 캐논 카메라들이 하나 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영하 40도의 현장에서 촬영을 하려니 카메라 배터리는 물론이고 셔터까지 다 얼어붙은 것이다.

그래서 친구는 늘 들고 다니던 라이카를 두터운 방한복 속에 품고 다니면서 셔터를 눌러야 할 때만 빼내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라이카가 다른 카메라보다 작아서 방한복 속에 넣어 데우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혹한에서 모터 드라이브를 작동시키면서 셔터를 누르면 필름이 얼어 맥없이 끊어지는 경우가 있다. 친구는 조심조심 라이카의 필름 감개를 감아가면서 겨울 만주의 촬영을 끝내고 잡지사에 원고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좋은 카메라란 작은 카메라가 아닐까? 꼭 라이카가 아니더라도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겨울 가장 추웠던 날, 나는 서울의 밤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출판물에 들어갈 인쇄 원고라 캐논 1Ds로 촬영하고 있는데, 겨우 100컷 정도를 누르자 배터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충전을 가득 해두면 상온에서 400컷 이상을 찍어도 잘 돌아가던 카메라가 영하 14, 15도 정도의 추위에서 겨우 100컷으로 도중하차를 하는 것이다. 요즘 배터리를 쓰는 전자 장비는 이렇게 온도에 민감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캐논 1Ds는 몸체만 1천만 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다. 그런데 조금 춥다고 겨우 100컷 정도에서 멈춘다고 생각해보라. 정말이지 본전 생각이 절로 난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03년 봄 나는 법정 스님께서 쓰신 『인도기행』이라는 책에 들어가는 원고를 촬영하기 위해 인도에 갔었다.

캘커타에서 오전 촬영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가 배터리를 재충전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충전이 완료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호텔로 돌아와 다시 충전을 해야 했고, 그렇게 다섯 시간이 넘게 충전을 하자 그제야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신호가 들어왔다.

멀리 인도에 가서 촬영을 할 때는 하루하루 소화해야 하는 작업량이 있다. 오전에 찍을 일과 오후에 찍어야 하는 일의 작업 목록이 나열되어 있어 반나절이라도 허무하게 보낼 수 없는 상황인데, 배터리를 충전하는 데 다섯 시간 이상 걸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처음으로 1Ds를 사용하느라 카메라도 손에 익지 않고, 배터리를 방전하지 않고 추가로 충전해서 쓸 수도 있다는 것을 숙지하지 못한 내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캐논이 좋다, 니콘이 좋다, 라이카나 핫셀이 좋다고 떠벌리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

카메라는 해상도를 표현하기 위한 장비가 아니다. 사진을 찍는 장비다. 해상도가 좋은 사진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노이즈를 주거나 거칠게 인화해서 독특한 분위기의 사진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얼마든지 있다.

내 친구 중에 오디오 시스템에 1억 정도를 들여 듣는 친구가 있다. 진공관 앰프에 스피커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어느 날 친구와 음악을 즐기는 또 다른 사람과 내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서 친구가 자신의 오디오를 자랑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선생은 소리를 즐기시는군요. 저는 음악을 즐깁니다."

나는 순간 머리가 번쩍 깨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음악 마니아였고 내 친구는 소리 마니아였던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는 비싼 오디오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소프트웨어가 없었다. 음반이 많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친구는 소담한 장비에 아주 많은 음반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가 어색해지자 내가 조용히 말을 듣던 친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1억이라는 돈을 들여 시스템을 조율하고, 앰프를 바꾸고, 스피커 전선을 다양하게 바꾸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친구가 대답했다.

"그런 분들 덕분에 오디오 시스템의 질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좋아집니다. 그런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상도나 렌즈의 특성 등을 따지는 당신 덕분에 좀 더 좋은 장비가 탄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사진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아, 생각난 김에 한 마디만 더 하자. "프로는 사진을 자랑하고, 아마추어는 카메라를 자랑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지금 당신의 수중에 있는 카메라이다.

당신과 함께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거침없이 일을 해주고 즐거움을 주는 카메라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진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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