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비록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지만 개화파는 정권을 잡자마자 14개조에
이르는 정강을 발표하여 자기들의 집권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며, 상공업을 육성하겠다고
하였다. 정강에서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들이 입헌 군주제에
따른 근대 국가를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개화파의 대부분이 양반 출신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당시에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점이었다.
즉,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생기는 문제는 외면하고 지조법의 개혁만 약속했으며,
상업 활동을 제약하는 해상공국을 없애는것 외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실현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열강의 이권 침투
임오군란 때부터 청나라에 밀리기 시작한 일본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자기네
공사관이 불타고 많은 거류민이 희생되자 조선 정부에 대해 그 책임을 물었다.
약한 민씨 정권은 이에 굴복하여 한성 조약을 맺고 배상금으로 10만 원을
지불하였다. 일본은 청나라와 텐진 조약을 맺어 조선에 문제가 생기면 군대를
동시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정치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
침략을 계속해 나갔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가 얻은 특권을 똑같이 요구하면서
일본은 면직물ㆍ견직물 ㆍ도자기 등을 우리 농민에게 팔고 대신 쌀ㆍ콩 등의
농산물을 헐값으로 가져갔다. 이리하여 국내에는 쌀이 모자라 문제가 생겼고,
정부는 ‘방곡령’을 내려 쌀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청나라도 이에 뒤질세라 조선에 대한 경제 침투를 활발히 벌여 나갔다. 청나라의
경제 침투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드세어 졌는데,
일본에 비해 규모도 클 뿐 아니라 조선 정부의 후원도 커서 전국 곳곳에 청나라
상인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선을 사이에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이렇게 경제 침투를 활발히 벌이고 있을 때,
러시아 세력이 뒤늦게 여기에 끼어들었다. 1860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고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하여 동양 침략
기지로 삼았다. 이 때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뛰어난 외교 솜씨를 발휘하여
조선 정부 안에 친러 세력을 심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는 러시아의 조선 침투를 막기 위해 대원군을 서울로 보내
민비와 맞서게 하였다. 아시아에 세력을 뻗친 서양 열강 중에 선두 주자인 영국도
러시아의 남침에 두려움을 느껴, 함대를 조선에 보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해
버렸다. 이 거문도 사건은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넘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서양
열강에 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교조 신원 운동
열강의 이 같은 경제 침투는 조선 사회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지주층은 소작료로
거둔 쌀을 일본에 수출하여 그런대로 부를 쌓아 갔지만, 나머지는 더욱더 몰락해
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떠돌아다녔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열강의 경제 침략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열강의 경제침투 이후로는 그 정도가 한층 심해져, 외국과
손잡은 대지주를 뺀 부농층까지 몰락한 점이 다르다면 달랐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조선의 지배층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외국 세력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자,
농민에 대한 갈퀴질을 더 심하게 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정은
늘지 않았다. 나라가 부패하여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다보니 말단 지방 관리들이
중간에서 가로챘던 것이다.
이러한 지배층의 수탈에 대한 농민층의 반발은 임술 농민 봉기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19세기 말에 이르자 투쟁 목표도 커지고
보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투쟁 목표는 지방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부패한 지배층과 외국세력이었다. 전국적인 조직망은 동학이 그 끈을 댔다.
동학은 교세 확장을 위하여 포접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농민들을
조직화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동학은 날로 교세가 커지고 있었다. 고통 받는 농민과 기댈 데 없는
몰락 양반들이 너도 나도 동학에 쏠리게 되었다. 이렇게 커진 힘을 바탕으로
2세 교주 최시형은 1892년 말부터 교조 신원 운동을 벌여 나갔다.‘혹세무민’의
죄로 1864년에 처형된 창시자 최제우를 사면시켜 달라는 것이 교조 신원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교조 신원 운동의 보은 집회에서 ‘척양왜’를 기치로 내걸 만큼
농민들의 정치 의식은 성숙해 있었다, 물론 교주 최시형은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위이화’를 내걸어 비폭력주의를 고집하였지만, 그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전라도에서는 동학 조직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투쟁 방법을 찾는 등
조짐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고부 민란과 1차 봉기
호남평야를 낀 전라도 고부는 조선 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었다,
동학 교도가 교조 신원 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 이곳에는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해 왔다. 조병갑은 부임하자마자 농민들에 대한 토색질을 드러내놓고
벌여 나갔다. 세금을 받지 않는 다면서 황무지를 개간시켜 돈을 걷었으며,
아무나 붙들어다가 없는 죄를 들씌워 돈을 뜯었다.
조병갑의 횡포에 고부 군민들은 한껏 분이 치솟았으나 일단 참고서 그러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해를 넘기자 이미 있는 저수지 만석보 밑에 팔왕보를
새로 만들어 없는 물세를 우려냈다. 농민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1894년 2월
15일 새벽, 동학 접주인 전봉준이 농민 3000여 명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동안 관아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팔왕보를 때려 부수고
곳간을 헐어 조병갑이 빼앗은 쌀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고부 민란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 사이 도망간 조병갑은 정부로부터 파면 조치가 내려졌다.
그런데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이용태가 불을 지르고 말았다. 민란에 참가한
농민과 봉기 지도자를 찾는답시고 각 마을을 뒤지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았다.
이에 전봉준은 전라도 각 고을에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군을 소집하였다.
5월 4일, 고부 백산에 모인 농민군 1만 3000여 명은 죽창을 들고 황토현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관군을 무찌른 후 정읍ㆍ고창ㆍ무장ㆍ영광ㆍ함평ㆍ정성 등을
차례로 쳐 5월 31일 에는 전주성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군은
기강을 준수하여 민가에 일체 피해를 주지 않았다. 이와 함께 총대장 전봉준은
항쟁의 목적이 썩은 관리를 몰아내고 잘못된 제도를 뜯어 고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부는 사태가 심상치 않자 홍계훈을 초토사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케 하였으나
관군은 거듭 패하기만 했다. 위기에 빠진 정부는 외국의 힘을 빌리려고
청나라에 병력을 요청했고, 이에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는 즉각 군대를
보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은 한성에 가 부패한 관리를 몰아내는 일보다
외세 침략을 막는 일이 급하다면서, 정부로부터 외국군 철수와‘폐정 개혁안’의
실시를 약속받고 곧장 전주성을 내주었다.
청일 전쟁과 2차 봉기
농민군이 ‘전주 화약’때 내민 폐정 개혁안은 한 마디로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부패한 관리와 일본에 빌붙은 자를 벌주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과부의
재혼을 하락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토지를 농민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공채와 사채를 일체 없애며, 집안과 지방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농민군은 이를 정부에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기들이
점령한 전라도 53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실시해 나갔다.
농민군과 화약을 이루자 조선 정부는 청ㆍ일 양국에 동시에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면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와 함께 7월 23일에는 왕궁을 포위하여 민씨 일파를 내쫓고
대원군에게 정치를 맡겼다. 이어 아산과 성환에 머물고 있던 청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8월 1일에는 청나라에 정식적으로 선전 포고를 하였다. 결국
청나라는 평양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선에서 물러났고, 승리한 일본은
관군과 힘을 합쳐 동학 농민군을 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10월 10일에 농민군을 삼례로 모이게 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가 반대를 하였으나, 결국 서울 진격 쪽으로
기울어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까지 쳐 올라갔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 관군과
일본군에게 져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나 군사
숫자에서는 농민군이 우세하였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병력 앞에
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관군과 농민군에게 쫓겨 계속 후퇴한 농민군은 전라도 태인에서 결사전을
벌였으나, 동서 양쪽에서 공격해 오는 적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농민군이
이처럼 궁지에 몰리자, 양반ㆍ관료ㆍ토호 등이 민보군과 수성군을 짜서
농민군을 괴롭혔다. 뿔뿔이 흩어진 농민군은 이듬해 봄까지 지구전을 벌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소탕 작전으로 더는 항쟁을 못하고 끝이 났다. 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붙잡혀 이듬해 3월에 서울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1년 남짓 계속된 이 ‘동학 농민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외세의 무력 개입을 들수 있다. 일본군의 우세한 병력 앞에 쌓이는 것은
시체뿐이었다. 또한 이러한 병력의 열세를 극복할 원조 세력이 전혀 없었다.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화파도 도와 주지 않았다. 동학 지도부마저
비협조적이었다. 전략에서는 전주 화약을 맺은 것이 실수였다. 물론 서둘러
전주 화약을 맺은 데는 농번기가 닥쳐 농민군이 농사를 걱정할 까닭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정부군과 일본군에게 반격할 여유를 주었다.
갑오개혁 실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하여, 영ㆍ정조 때 실학자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내놓았고, 가까이는 10여 년 전에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또 정부는 이 숙제를 제쳐놓은 채 외세에 의한 무분별한 문호
개방만 추진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다. 이제 농민군이 나서서 ‘폐정 개혁안’을
들이밀고 자기들이 점령한 전라도에 집강소까지 설치하여 이를 실시하니 더는 뒤로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기미를 눈치 챈 일본이 군대 파견과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해, 그
개혁이 일본의 이익과 맞아떨어지게끔 선수를 쳤다. 이에 조선 정부는 폐정 개혁을
위해 교정청을 세우고, 일본에게 개혁은 스스로 하겠으니 군대를 철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즉각 청일 전쟁을 일으켜 전세의 유리를 바탕으로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군국기무처를 만들어 개혁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갑오경장》이다.
그러나 이 갑오개혁은, 일본의 개입이 따른 만치 그 내용이 조선의 당면 목표인
자주적인 근대화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면에서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가 노린
입권 군주제에서 한 발 물러나, 기껏 왕정 분리의 원칙에 따라 일본이 마음대로
조정하기 쉬운 내각의 권한을 강화시켰을 따름이다. 경제면에서도 은본위제 실시와
도량형의 통일로 일본의 경제 침략을 쉽게 하였을 뿐, 토지 개혁은 손도 대지 않았
다. 다만 사회면에서는 신분제 철폐, 과거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 재혼 허가 등으
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것들은 폐단이 쉽게 없어지지 않고, 또 개혁으로 일
본이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민씨 시해와 을미의병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묵인 아래 일으킨 청일 전쟁이 승리하자, 1895년 4월에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 반도와 대만 등을 차지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ㆍ프랑스와 짜고서 외교적인 ‘삼국간섭’을 하는 한편,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 연해에 무력시위를 벌였다. 일본은 청일 전쟁을 치른 직후라
금방 무력 대결을 할 수 없어 양보하고 말았다.
이를 발판삼아 러시아는 만주 침략을 본격화시키고, 베베르의 노력으로 조선에
이완용ㆍ이범진이 중심이 된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초조해진 일본은
조선에 무인 미우라를 공사로 보내, 8월20일 새벽에 낭인《부랑배》을 풀어
궁궐을 습격하고 민비를 죽여 없앴다. 그런 다음, 일본은 고종을 겁주어 김홍집이
중심이 된 친일 내각을 성립시켰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일본이 남의나라 국모를 죽인 사건은 식민지 쟁탈전을 위해서는 못 할 짓이 없던
서양 열강들 사이에도 여론이 좋지 않았다. 하물며 이 일을 실제로 당한 조선
국민의 분노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시치미를 뚝 떼고 김홍집
내각으로 하여금 중단했던 개혁을 계속하게 하였다.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신식학교 설립, 군제 개편 등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에 실시한
단발령이 문제를 일으켰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머리털 하나도 손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백성들에게 이 일은 청천벽력이었다.
꾹꾹 참고 있던 국민들은 마침내 반일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 위정척사를 부르짖던
유생이 의병장이 되고, 동학 농민 혁명 후 흩어져 있던 농민군이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공격 대상은 일본군과 거류민, 그리고 단발을 강요하는 친일 관료
들이었다. 이러한 의병 가운데는 강원도의 이소응 부대, 충청도의 유인석 부대,
전라도의 기우만 부대가 가장 세력이 컸다. 그러나 평민 출신의 의병장인 김백선을
양반에게 대들었다고 해서 처단하는 등,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자기 한계로 크게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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