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용문고)·대학(서울예대) 친구인 김경훈과 최철기는 2000년 “태권도를 소재로 공연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한다. 자나깨나 ‘태권도’와 ‘코미디’ 두 단어만 생각했다. 아이디어만 있을 뿐 자본은 없었다. 둘은 깡술을 자주 마셨다. 마침내 2001년 배우 모집. 서울예대 후배들을 붙들었고, 체조 전 국가대표와 태권도 유단자도 ‘포섭’했다. 연습에 들어가자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배우들은 부항을 뜨며 통증을 견뎠다.
2002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별난 가족’이란 무술 코미디로 초연을 마치자 ‘난타’의 PMC프러덕션 등 여러 제작사의 러브콜이 쇄도했다. 2003년 7월 ‘별난 가족’은 ‘점프(Jump)’로 이름을 바꿨다. 김경훈은 제작사 예감 대표로 경영을, 최철기는 예술감독을 각각 맡았다. 그리고 2006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계 무대에서 ‘점프’의 점프는 지칠 줄을 모른다.
지난 8월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 규모(840석)가 가장 크고 대중적인 어셈블리극장에서 공연된 ‘점프’는 25회 내리 매진됐다. 이 비언어극을 세계 시장으로 띄운 도약대가 바로 2005년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였다. 1800여작품 중 관객 동원 베스트 5에 들자 해외 극장들이 앞다퉈 손을 내밀었다. 해외공연 개런티는 주당 5만5000달러. 초창기 ‘난타’보다 많은 액수였다. 또 해외 마케팅 에이전트의 등에 업혀 나라 밖으로 나간 ‘난타’와 달리 ‘점프’는 혈혈단신으로 해외시장을 뚫으며 인맥과 노하우를 쌓았다.
▲ 점프의 공연 장면
‘점프’는 나라 밖에서 ‘난타’를 뛰어넘을 기세다. 유럽 순회공연 방식만 봐도 둘은 확실히 다르다. ‘난타’가 원나이트 투어라는 이름의 단발성 공연으로 여러 도시를 발 빠르게 누빈 반면 ‘점프’는 한 극장에 들어앉아 3~4주 이상씩 공연을 했다. 그만큼 공연의 대중적 파워를 인정받은 것이다. ‘난타’가 미국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서 1년6개월 만에 고전 끝에 철수한 것과 달리 ‘점프’는 올해 세계 3대 예술매니지먼트사 중 하나인 IMG와 2년간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 공연물이 IMG, 카미(Cami), 윌리엄 모리스 등 3대 예술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맺기는 처음이다. IMG에는 ‘오페라의 유령’의 영국인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스페인 테너 호세 카레라스, 소프라노 홍혜경 등이 소속돼 있다.
IMG 브랜드를 손에 넣은 ‘점프’는 회당 3만5000달러의 개런티를 받게 된다. 회당 11만달러 이상을 받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보다는 적지만 중극장 공연이라는 걸 감안하면 후한 평가다. IMG는 2008년 5월까지 ‘점프’ 업그레이드, 해외 프로모션, 파생상품 개발, 협찬 등을 협력하게 된다.
상업성을 검증 받은 공연은 스스로를 복제한다. ‘점프’는 현재 네 팀이지만 올해 말까지 여섯 팀으로 불어난다. 올 들어 8월까지만 해도 영국의 ‘공연 1번지’ 웨스트엔드를 비롯해 그리스,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독일 등 8개국을 돌며 200회 공연을 올렸다. ‘유럽 정벌’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영국 공연 때는 배우들이 BBC 생방송 ‘블루 피터’에 출연해 무술과 아크로바틱을 보여줬다. ‘빌리 엘리어트’ ‘블루맨 그룹’ 등 웨스트엔드에서 각광받는 공연들이 거쳐간 이 버라이어티쇼에 등장했다는 건 대중성에 대한 인증이다.
점프’는 희소성이 강점인 마셜 아트 퍼포먼스다. 똑같이 말(言)을 뺀 비언어극이지만 ‘난타’는 음식과 코미디를 섞었고 ‘점프’는 아크로바틱과 가족코미디의 결합이다. 무술 가족의 하루, 그리고 억세게 운 나쁜 두 도둑 이야기는 대사 한 점 없이도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구부정하게 지팡이로 버티던 할아버지가 휘리릭 공중제비를 돌고, 무술이 춤으로, 격투가 낭만적인 로맨스로 뒤집어질 때 박수와 환호성이 번진다. 부분 암전 상태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반복되는 격투를 속도와 음향, 조명 등으로 길게 변주하고 영화 ‘매트릭스’, 일본 인형극 분라쿠를 응용한 과장된 동작으로 폭소탄을 터뜨린다.세계적인 쇼닥터의 왕진(往診)을 받은 것도 ‘점프’ 성공 비결 중 하나다. 점프의 제작사인 ㈜예감은 작년 초 유럽에서 활약해온 정상급 코미디 연출가 데이비드 오톤을 초청, 공연에 대한 검진을 의뢰했다. 오톤은 가족 캐릭터를 또렷이 차별화 했고, 정확한 코미디 타이밍을 뽑았고, 조명·음향 효과를 보강해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점프는 어느 나라에서 공연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현지화 전략이다. 가령 도둑이 딸에게 키스할 때 한국에선 딸이 도둑의 따귀를 때리면 되는데, 영국에선 도둑이 뒤에서 딸 가슴을 끌어안는 걸로 바뀌었다. 키스가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삼촌이 술 마시고 부르는 노래는 현지 술집에서 자주 불리는 노래로 바꾼다. 지난해 이스라엘 공연 때는 히브리어로 불렀다. 결혼 장면에서는 그 나라 전통혼례를 본뜨고 있다.
차세대 공연상품으로 떠오른 ‘점프’는 9월 1일 서울 종로에 전용관을 열었다. 영화복합상영관 시네코아 5개관 중 하나를 370석 공연장으로 리모델링했다. 해외 공략을 위해서는 든든한 내수시장과 전용극장이 필수다. 일본에서 한국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대한여행사 황진환 차장은 “요즘엔 공연 관람도 관광 코스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며 “올 들어 ‘점프’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점프’ 배우들은 평균 스물아홉 살의 청춘들이다. 큰형 김철무씨가 서른둘, 막내는 갓 스물을 넘긴 스물둘이다. 기계체조 국가대표였거나 무술 유단자, 연극 배우였던 이들에겐 나라 밖 극장이 집이다. 콧대 높은 유럽 극장들은 무대를 비워주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객석을 채워주고 있다. 지난 5년을 ‘점프’에 바친 배우 윤정열씨는 “청춘, 하나도 안 아깝다”고 했다.
‘현지 배우를 뽑아 현지 관객을 공략한다’는 전략도 실행 중이다. 올해 중국인 배우 4명이 들어와 공연에 참여하고 있고, 지난 8월엔 중국에서 두 번째로 배우 오디션을 열었다. 중국 전통 무술인 우슈 전공자, 경극단 배우 등 무술과 연기에 능한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12 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배우들은 내년 중국 순회공연 무대에 오르게 된다. 현재 ‘점프’ 공연을 하고 있는 중국인 배우 리우커는 “연기와 무용도 익힐 수 있어 오디션에 참가했다”고 했고, 베이징 경극단을 거친 장티는 “경극은 평생 똑같은 배역을 맡는데, 한국 공연 출연은 여기서 벗어날 기회”라고 말했다.
320년 역사를 지닌 영국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의 체인인 피콕 극장은 앞으로 5년간 봄엔 ‘점프’를 위해 한 달씩 극장을 비워놓겠다고 선언했다. “웨스트엔드에서 ‘스텀프’를 뛰어넘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이 극장 예술감독의 평가다. 올해 ‘점프’의 매출액은 해외공연 20억원(관객 20만명)을 포함해 70억원대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매출 15억원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원은 “한국 공연시장은 3~4년 뒤면 포화상태에 이를 전망”이라며 “‘점프’는 해외 무대에서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좋은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감은 “‘스텀프’가 성공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며 “IMG를 통해 2008년 미국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장기공연에 돌입하는 게 당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