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1993)
님 두시고
님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연인
풀 우에 맺혀지는
풀 우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우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A Boy(2000)
밤사람 그립고야
밤사람 그립고야
말없이 걸어가는 밤사람 그립고야
보름넘은 달 그리메 마음아이 서어로아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기다림
들꽃
향내 없다고 버리실라면 내 목숨 꺽지나 말으시오
외로운 들꽃은 들가에 시들어 철없는 그이의 발끝에 조을걸
The Dawn (2002)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The stare
춘향
큰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는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설움이 사모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하단 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깊은 겨울밤 비바람은 우루루루 피칠해 논
옥창살을 들이치는데 옥 죽음한 원귀들이 구석구석에 휙휙 울어
청절(淸節)춘향도 혼을 잃고 몸을 버려버렸다
밤새도록 까무러치고 해 돋을녘 깨어나다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믿고 바라고 눈 아프게 보고 싶던
도련님이 죽기 전에 와주셨다
춘향은 살았구나 쑥대머리 귀신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의 정절(貞節)이 자랑스러워
"우리집이 팍 망해서 상거지가 되었지야"
틀림없는 도련님 춘향은 원망도 안 했니라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모진 춘향이 그 밤 새벽에
또 까무러쳐서는 영 다시 깨어나진 못했었다
두견은 울었건만 도련님 다시 뵈어 한을 풀었으나 살아날 가망은 아주 끊기고
온몸 푸른 맥도 홰 풀려버렸을 범 출도(出道) 끝에
어사는 춘향의 몸을 거두며 울다
"내 변가보다 잔인무지하여 춘향을 죽였구나"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유혹
연2
좀평나무 높은 가지 끝에 얽힌 다아 해진 흰 실낱을 남은 몰라도
보름 전에 산을 넘어 멀리 가버린 내 연의 한알 남긴 설움의 첫씨
태어난 뒤 처음 높이 띄운 보람 맛본 보람 안 끊어졌드면 그럴 수 없지
찬바람 쐬며 콧물 흘리며 그 겨울내 그 실낱 치어다보러 다녔으리
내 인생이란 그때버텀 벌써 시든 상싶어 철든 어른을 뽐내다가도
그 실날 같은 병의 실마리 마음 어느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어
얼씬거리면 아이고! 모르지 불다 자는 바람 타다 꺼진 불똥
아! 인생도 겨레도 다아 멀어지더구나
저쪽
망각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웬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달리는 行喪을 보랐고 있느니
내 가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매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리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고만이라-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음을
아!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世紀는 그 죽음 다 망각하였지만
Yearning
▷김영랑의 시집
『영랑시집』에서는 일련 번호를 제목으로 대신하여 붙인 것이 특색.
이들 작품 중 잡지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은 잡지 발표 당시에는 제목이 있었으나 시집으로 묶이면서 모두 제목이 번호로 대체되었다.
영랑의 시 제목들 중 유독 시의 첫줄이 제목이 된 경우가 많은데, 번호대신 첫줄을 제목화해서 그렇다.
*글출처: 김영랑 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