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상수만 만나면 배우들이 달라지는 이유
누구나 홍상수를 알고 있다. 평론가들은 고집스럽게 자기세계를 고수하고 있는 ‘작가’로 홍상수를 정의하고, 기자들은 홍상수가 들려주는 남루한 생활의 요소들을 발견하고 나서 즐거워하며, 관객들은 선문답과 썰렁한 유머로 무미건조한 감흥을 주는 싱거운 감독으로 그를 기억한다. 충무로에서 ‘홍상수적’이라는 말은 자동연상작용을 일으킨다. 영화 속 인물들이 특정한 말이나 행위, 제스처를 취했을 때 또는 인물과 상황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뉘앙스를 느꼈을 때, 우리는 ‘홍상수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홍상수적인 말, 홍상수적인 행동, 홍상수적인 제스처들을 보았을 때, ‘과연 홍상수답다’고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이다. 홍상수를 알고 있는 건 평론가나 기자들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배우들은 모두 홍상수를 알고 있다.
그들은 굳은살이 밴 틀에 박힌 이미지를 쇄신시켜 줄 구세주로서 홍상수를 기다리고, 그렇고 그런 특징 없는 배우 생활에 활력을 줄 일대전기로 홍상수의 배우가 되길 소망하며, 그 자신도 확인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얼굴’을 발견하기 위해 홍상수와 만나길 원한다. 그래서 김상경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게 배우 장 피에르 레오가 그랬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감독 홍상수의 페르소나가 되길 자처했고, 충무로에서 가장 모시기 힘든 배우 중 하나였던 고현정도 홍상수의 부름에 응했으며, 더 이상 신선함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배우 김승우도 홍상수의 부름을 반가워했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들은, 과연 달랐다.
홍상수의 배우들은 그가 창조하는 인물들과 연동돼 있다. 더 없이 신기한 것은 어떤 배우라도 홍상수에게 걸리면 스스럼없이 ‘홍상수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허다한 배우들이 홍상수에게 모든 걸 ‘맡겼다’. 무의미한 행위와 말, 특징 없는 행동들의 계열이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한 인상들은 홍상수의 인물들이 지닌 공통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행동과 행동,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논리적 고리는 느슨하고 인물들의 행위의 동기는 생략돼 있다. 그 행간에 놓인 잔여들이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구성하는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동기가 불분명한 행위로 주변을 당황시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위로 판단을 교란시킨다. 에서 문호(유지태)는 가르치는 제자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학생을 과도하게 나무람으로써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아간다. 그 학생이 왜 문호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의 괴팍한 성격 탓인지, 둘 사이의 감정의 앙금 탓인지, 아니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치졸한 신경전 때문인지. 에서 중래(김승우)는 문숙(고현정)과의 추억이 남은 해수욕장을 다시 찾아 언덕 위 세 그루 나무 앞에서 절을 한다. 문숙은 선희(송선미)와의 술자리를 파한 뒤 돌아오는 길에 몽유병 환자처럼 산길을 걸어다닌다. 이들의 행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홍상수와 함께 한 배우들 중에는 이 같은 방식이 불편했다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감독은 무엇이 잘못 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고 배우로서는 그런 감독의 무심함이 답답했던 노릇이다.
김승우는 어땠을까?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자면, 김승우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비호감 배우였다. 내게 김승우는 코미디 영화에서 어눌하고 답답한 소시민 이미지로 배우 이력을 이어가는 시시한 연기자로밖에 안 보였다. 은, ‘연기 천재’는 아니더라도 ‘연기 수재’ 정도는 돼 보이는 고현정의 능글맞고 영리한 호연도 볼 만했지만, 바로 ‘내 머릿속의 비호감’ 김승우가 말을 거는 영화였다. “김승우도 괜찮았지만 홍상수의 페르소나인 김상경이 김중래 역을 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김승우가 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김중래가 창조될 수 있었다. 김승우는 여기서 기왕의 홍상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배우들과 조금 다른 패턴의 연기를 선보인다. 그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인상의 차이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홍상수 영화의 여느 배우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홍상수는 “어떤 캐릭터에 대해 쓰면서 내가 갖고 있는 느낌을 배우가 그대로 해볼 수 있게 해서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느낌에 배우의 것이 더해져 새로운 게 나오면 그건 더 좋다”고 말한다. 짐작컨대 김승우는 후자 쪽이다. 김중래에는 홍상수가 ‘가지고 있던’ 김승우와 영화를 찍으면서 ‘덧붙여진’ 새로운 김승우가 함께 녹아있다. 감독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배우에 대한 느낌에 배우에 의해 새로 발견된 느낌이 첨가된 무정형의 이미지. 그게 김승우의 김중래다. 김상경이 그 역할을 했다면 그것은 ‘김상경의 김중래’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인으로서 또는 연기자로서 배우는 홍상수가 창조하려는 ‘인물형’을 구체화하는 질료다. 하지만 그들 역시 홍상수가 창조하는 소우주의 한 요소일 뿐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들은 과정을 통해 유기적으로 변하는 가변성의 연기를 하게 된다. 그날의 감정이나 기분, 심지어 날씨도 영향을 미친다. 역으로 홍상수의 입장에서 배우는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는 질료로서 의미가 있다. 이은주, 정보석, 김상경, 예지원, 유지태, 성현아, 고현정, 김승우 등은 홍상수를 만나기 전까지 즉각적으로 특정한 ‘인상’을 야기하는 배우들이었다. 홍상수는 이들에게 특정한 인상을 부여했던 이미지가 실은 ‘가짜’였다는 걸 증명해낸다. 이건 매우 치열한 추적작업과 같다. 물론 영화를 찍는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지만 홍상수가 배우들을 활용하는 방식에는 이 같은 ‘이미지와의 게임 혹은 투쟁’이 있다. 그것은 에서 중래의 입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 준 “사악한 이미지들과의 투쟁”과 연관된다. 선험적인 틀이나 관념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홍상수의 영화는 이미지의 감옥에 갇힌 배우들의 이면을 들춰냄으로써 통념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영화의 역사를 선지자적인 감독과 배우 사이의 투쟁으로 묘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투쟁’은 좋은 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생활과 세계의 정수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홍상수는 배우들에게 쉽지 않은 감독이다. 에서 선화의 음부를 씻겨주는 헌준(김태우)의 강박적인 순결의식처럼 이미지와 연기에 대한 그의 순결의식은 강박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촬영 전 엄밀히 계산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에 걸맞는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배우들을 독려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변변한 시나리오 한 장 쓰지 않는다. 의 영화감독 중래처럼, 고작해야 두 장 정도 되는 트리트먼트만 가지고 촬영에 들어가고, 대본은 촬영 시작 후에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촬영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배우들은 그날의 대사와 지문이 담긴 쪽대본을 손에 쥘 수 있다. 관습적인 연기 패턴에 젖어있는 배우들에게 연출의 불확정성은 불안을 가중시킨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배우들은 크게 두 유형이다. 특정한 이미지로 자신의 캐릭터가 고정돼 대중들에게 어떤 ‘각인’의 인상을 주는 쪽이 하나요, 그 어떤 이미지로도 규정되지 않은 ‘특징 없는’ 배우가 두 번째다. 그 중간은 별로 없다. 언뜻 상반돼 보이는 두 유형의 배우들이 홍상수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전자는 비우고, 후자는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홍상수의 배우 조련법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이 말했던 ‘모델의 사용’과 관련이 있다. 브레송은 에서 배우를 향한 연기 지도나 배역 연구 따위를 부정하며 ‘삶 속에서 포착된 모델의 사용’을 언급한다. 홍상수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모델’은 ‘자신의 것을 가진 배우’다. 자신의 것은 사악한 이미지이거나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이다. 홍상수는 “연기에는 기억으로 흉내내는 연기가 있고, 극중 인물로 가서 퍼올리는 연기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배우들이 깊은 바닥으로부터 감정을 끄집어내고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하지만 분명히 자신에게 속한 ‘미지의 이미지’를 발견하도록 대사를 쓰고 액션을 지시한다. 배우들은 기왕의 이미지들이 허구적이었다고 깨닫는 만큼 자신의 실체와 가까워진다.
오래도록 묵혀 온 허구적 이미지의 발견에 대해 김상경은 이렇게 말했다. “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그 영화에는 내가 몰랐던 내 얼굴, 내가 몰랐던 김상경이 있었다.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얼굴인데,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아, 나에게 저렇게 다른 얼굴도 있었구나, 라는 걸 그때 알았다.” 김상경이 느낀 ‘충격’이란 에서 “안 썼던 근육을 써서” 다리를 다친 중래의 고통과 유사하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고통이라기보다 자각이나 깨달음에 가깝다. 그들은 모두 쓰지 못했던 무언가를 썼고 그것을 통해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셈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게 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쓰면 뻐근해지고 뻐근함 뒤에는 시원해진다는 사실이다. 이 뻐근함은 숨겨진 세계의 비밀에 대한 각성을 준다. 홍상수의 배우들에게서는 그런 각성의 아우라가 풍긴다. 그건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황홀한 발견이다. 가끔 난 이런 상상을 한다. 송강호가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면, 차승원이 홍상수와 영화를 찍는다면, 문근영이 홍상수 영화에 나온다면? 그들 역시 근육의 뻐근함을 느끼지 않을까. 정말, 상상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글 | 장병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