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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벗 퍼스트 레이디 (19)

이성도 |2006.10.02 20:52
조회 41 |추천 0

육영수 여사는 청와대에 들어가 살면서도, 가난한 군인의 아내로 살았던 생활을 결코 잊지 않았다. 변변한 집 한 칸 없이 남의 집살이를 하고 박봉을 고개 살림을 꾸렸을 망정, 결코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퍼스트 레이디로서 숨돌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일분 일초라도 하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아침이면 항상 가족들 보다 먼저 일어나 몸 단장을 하고 가족들을 맞았다.  누구보다 편한 가족들이지만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부들의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려고 화장을 하는 것처럼 흔히들 말하지만, 기실은 주부의 단정한 옷 차림이나, 아름다움이 온 가족들에게 밝고 편안함을 주는 것" 이라는게 여사의 생각이었다.

 

여사는 "남편에게 결코 폐를 끼쳐서는 안 될 아내로, 또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모범이 되는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했다. 청와대 시절 여사는 어느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 어머니는 산 교과서다. 하찮은 일상의 언동 하나 하나가 씻을 수 없는 영향을 자녀들에게 미칠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고 말했다.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로서, 또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느 한 면에서도 결코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1960~70 년대 우리네들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였다. 아침에 만나면 아침 잡수셨습니까 , 점심 때 만나면 점심 잡수셨습니까, 저녁에는 저녘 잡수셨습니까 , 하고 인사를 했다. 하루 끼니가 아니라 당장 오늘 아침 점심 먹을거리를 걱정했던 시절이다.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나무 껍질을 벗겨 먹거나, 칡뿌리와 풀뿌리를 캐 죽을 쑤어 먹었고, 그마저도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보릿고개란 말이 있어 보리가 수확되는 봄 철을 이겨내지 못하면 저승길이 되고 말았다.

 

나라에서 쌀을 수입해 와도 국민들 모두가 배부르게 골고루 나눠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우선 국민들이 배고픔으로 부터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고,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경제 기획원을 신설하고 경제 개발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는 누구나 배불리 먹지는 못해도 최소한 굶어 죽지는 말아야겠다는 마음만이 절실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육 여사는 결코 청와대 안방마님으로 대접이나 받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 생각하고 국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나라가 잘 살수 있도록 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식생활 개선은 청와대 주방에서 부터 솔선수범한다."

 

육 여사가 부족한 식량으로 고생하는 국민들을 생각해 식생활 간소화 운동에 앞장섰다. 아무리 청와대라지만, 하얀 쌀밥은 생각지도 못했다. 요즘이야 웰빙 바람을 타고, 건강식으로 인가가 높지만, 당시에는 귀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현미와 보리를 섞은 밥을 먹었다.

 

청와대 초청돼 간 사람들도 " 청와대에 가면 맛있는 음식 구경 좀 하겠구나" 하고 기대를 하지만 , 막상 가보면 국수가 나와 실망 하기도 했다.  국수가 아닌 날에는 박 대통령이 좋아하던 비름 나물에 비빈 보리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굶어죽는 국민들이 있는 마당에 청와대라고 해서 삼시 세끼 쌀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게 대통령과 여사의 생각이었다.

 

여사는 대토령이 무엇을 좋아 하시느냐는 물음에 " 무엇이나 잘 드시지만, 진짓상에 여러가지 반찬을 놓으면 언짢아 하시지요 . 국민 소득 1 천달러가 될 때까지는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잘 드실 수 없다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이에요 " 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점심 식사로 칼국수가 등장해 청와대를 방문한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칼국수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칼국수는 단지 김 대통령이 좋아했던 음식이란 이유로 청와대 손님상에 나온 것이었고, 1960 ~70 년대 시절의 청와대 국수는 눈물나는 서러운 메뉴였다.

 

근혜,근형 등 대통령 식구 자녀들도 도시락으로 꼭 혼식을 싸 갔는데, 근영씨는 한 회고담에서 "흰 쌀밥 싸오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 고 했다. 여사는 또 밥을 지을때면, 꼭 쌀 한줌씩을 따로 모았다가 어느 정도 양이 찼다 싶으면 청와대 청소부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고 한다. 여사는 군인의 아내 시절부터 텃밭을 일궈 가족들이 먹을 채소를 직접 재배하기도 했는데, 청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수 기른 케일이며 상추를 밥상에 올렸고, 즙을 내 대통령이 하루 한컵씩 마시도록 했다. 손님이 없는 저녘이면 식사 후 가족들과 함께 텃밭으로 산책을 나가 채소들이 잘 자라는지 함께 살펴 보기도 했다. 계분을 주면 잘 자라는지 아니면 비료를 주면 잘 자라는지 그 방면에 지식있는 청와대 직원들에게 조언을 구해가며 열심히 텃밭을 일구었고, 그것을 통해 자녀들도 자연스레 농사일을 배웠다.

 

당시 청와대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근영씨 회고다.

 

(대통령께서는) 실 생활면에서 있어서도 저희들에게 국산품 사용은 기본이었고,  근검 절약을 항상 강조 하셨습니다. 제가 봉황이나 무궁화가 그려진 새하얀 청와대 종이을 쓰고 싶어하면, 비서실에 전화 하시어 절대 주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청와대에서 쓰는 종이 등 관공서와 같은 곳에서 쓰는 물품은 주로 국민이 낸 세금으로 사는 것이니 무조건 아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종이 원료를 외국에서 사오는 나라라사 되도록 이면지를 쓰거나 가까운 문방구에서 누런 시험지를 사다 쓰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니 양지회 봉사 활동시 간단한 내용의 메모는 대부분 사용한 포장지 뒷면을 많이 활용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나라 살림이 퍽 어려우셨을리나는 생각이 들어 이 나이에 새삼 맘고생이 많으셨을 어머니 마음되어 봅니다.

 

저의 언니 (근혜) 는 학창 시절 아침 기상 시간이 규칙적이었고, 저나 남동생은 아침 잠이 많아 중간고사 등 시험기간에는 외할머니까지 오셔서 두 손자 손녀를 아침마다 챙겨주곤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같은 청와대 내에서도 못 만나시는 날에는 마지막 손님을 만나시고 늦은 밤에라도 꼭 할머니 계신 방에 들르셨습니다.  마침 그 날은 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제가 그 방에서 이것저것 거들어 드리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내의 방은 용도에 맞게 써야 했으므로 , 할머니 계신 방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방에 가려면 긴 복도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마침 그 때 할머니 심부름으로 제가 그 방을 막 나서서 그 긴 복도를 지나고 있을때 갑자기 복도 벽에 검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깜짝 놀라 맞은 편을 바라보니 어머니께서 어두컴컴한 복도 옆에 몸을 붙이고 두팔을 벌리신 채 할머니 방으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전기를 절약하시려고 직원들 퇴근한 늦은 밤이라도 복도 등을 일부러 켜지 않은 채 벽을 더듬으며 걸어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당시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나라는 석유가 한방울도 안나오는 나라라고 늘 강조 하셨기에 저희는 이에 발 맞추어 불 한등 더 끄고 , 빈방에 불끄기 등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느라 가끔 방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서로 부딪히기도 했었지만, 이것 저것 불만이 많던 그 시절이 왜 지금 그리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해인가 가뭄 피해가 났을때 혹시 청와대 직원들이 덥다고 물을너무 많이 쓰게 될까봐 청와대 내에서는 아버지 지시로 물 아껴 쓰기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그래도 많은 식구가 지내는 곳이다 보니 잘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에 어머니께서 부속실 직원에게 지시하시어 시간대에 맞추어 물이 안나오도록 아예 수도 밸브를 빼 놓았다가, 다시 끼워 쓰도록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꽃꽃이 한 쟁반도 청와대에서 한개만 있으면 된다 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손님을 맞으실 때는 그 방으로 옮겨 가시고, 어머니께서 외빈 맞으실 때면, 이 방으로 꽃꽃이를 들고 오시면서 매사에 절약을 실천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육 여사는 한복이 잘 어울리는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된다.

 

한복 차림의 여사는 학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기품이 느껴졌는데 그렇다고 한복이 결코 값이 비싸거나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국민들은 짧은 치마 입기 운동을 벌이며 알뜰하게 사는데 혼자서만 좋은 옷을 입을수 없다는 생각에 비싸지 않은 옷감을 골라 몇번이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손을 봐 입었다.

 

여사는 아래 위 색깔이 다른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아래 위 색깔을 맞추려면 한꺼번에 많은 옷감을 끊어야 하기에 아래 위 중 한가지만 지어 입을수 있는 옷감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 색깔이 다른 치마 저고리도 감각있게 맞추어 입어 늘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귀걸이 등 악세사리도 일절 하지 않았고,  어쩌다 몇백원짜리 반지나 수정반지를 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해외 순방을 나가서도 결코 자녀들 선물이라며 덥석 사다주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대통령과 대만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대만 기자가 " 자녀들 선물로 무엇을 준비 했느냐 " 고 묻자 " 지금 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 개인 자격으로 이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특정된 몇몇 사람에게만 선물을 줄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될수록 여러 곳을 다녀보고, 온 국민에게 보다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나의 선물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그것을 바라코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 대통령 당선 후 ,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지닌 실력으로 자립해야 하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며, 대통령이란 지위가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집안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이용될 수 없는 것이다 , 라고 밝혔다.

 

대통령의 이같은 의지는 육 여사의 자녀 교육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통령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되며, 보통의 가정 자녀들처럼 평범하게 생활하고,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사는 근혜를 당시 최고로 소문난 일류 사립학교를 마다하고, 취학 통지서에 나와 있는 장충 초등학교에 입학 시켰다. 지만이도 청와대에서 가까운 학교를 놔두고서 신당동 집과 가까운 서울 사대 부속 초등학교로 보냈고, 자가용이 나닌 버스로 통학토록 했다.

 

근혜도 전차로 통학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딸이 전차타고 다닌다고 하더라, 하고 소문이 났지만 사람들은 설마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근혜가 버스를 탔는데 그 학교 교복을 입은 것ㅇ르 보고 버스 안내양이 " 대통령 딸이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데 아니 ?" 하고 물었다 . 근혜가 " 네" 하고 대답하자 , 안내양은 대통령 딸은 공부 잘하니 ?"  하고 다시 물었다.

 

근혜는 "그런대로 한데요 " 라고 답했다.

안내양은 " 키가 얼마만 하니 ? " 근혜는 " 꼭 저만 해요 "

라고 대답했다.

 

근혜가 식구들과 저녘을 먹으면서, 그 이야기를 하자 욕 여사는 근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면서 흐믓해 했다고 한다.

 

 

책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 중에서 옮김.






원문내용(작성자:이성도)-----------------------------------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그 날 설핏 눈발이 날렸던가

 

마음은 벌써 봄을 향해 내쳐 달렸으나, 동장군은 쉬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듯 했다.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남쪽에선 곧 동백꽃을 보게 될 것이란 소리가 있었으니 ....

아마 3 월이 다 되어 갈 때 쯤이었나 보다.

 

그 날 박근혜 의원을 처음 만났다. 봄 날 설핏 스쳐간 상서로운 눈발 탓인지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였다.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어쩌면 하얀 목련 같기도 하고, 그러나 여자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성의 구별을 초월한 관세음 보살 기운이 강하게 풍겼다.

 

처음 보는 박근혜 의원은 관세음 보살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그런 편안함이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손을 내밀어 잡아보니 도무지 형언하기 어려운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얼굴의 육상은 한없이 부드러운 기운이 베어 나오는 상이었고,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께서 생전에 우리에게 보이신 그런 느낌이었다.

 

골상은 강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했다.

 

사주에 금이 많아 강한 리더십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기운을 타고 난 것 같았다. 박 의원은 아버지의 강한 지도력과 어머니의 자상함과 너그러움을 함께 물려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 의원을 보는 순간 부처님과 함께 내 마음의 군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나는 박 의원을 바라 보면서, 두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박 의원은 이 순간 합장을 하는 나의 모습이 부담스러웠던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살며시 머리 숙여 답례 했다.

 

이제 우리 7 천만 동포를 위해 일해 주십시요. 지금 이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민족 모두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도록 큰 일을 해 주십시요 !!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박 의원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또 박 의원에게 약속했다.

박 의원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나는 박 의원이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것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이겨 나갈 것 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보았다.

 

이미 혹독한 자기 수련으로 내공을 쌓아 높은 경지에 오른만큼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가 뜻하는 바를 이루어 내고야 말 것이라 믿는다.

 

나는 오늘 부처님 앞에서 기도한다.

 

"부처님 이 나라 이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나라가 어리석은 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미륵 보살을 보내 주셨으니

이제 그 미륵 보살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정말 행복하게 잘 사는 길로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요 "

 

 

책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 중에서..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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