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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2006.10.04 09:04
조회 89 |추천 0

 

 

1.

 

 

지독한 유미주의와 나르시즘에 빠져 지내던 스물 무렵, 나는 이러한 문구를 일기장에 적은 바 있다. ' 내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 어느 한적한 동네의 작은 상점에서 파리 날리는 무더운 여름을 이기는 삶을 살더라도, 내가 온전히 나로서 아름답게 산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라는. 지금의 나는 그새 그 아포리즘에 대하여 웃고 만다. 처절한 몸부림없던 내 이십대 청춘에 대해 무한한 책망만 거듭하며.

 

 

2.

 

 

기업들의 하반기 대규모 공채도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요즘, 대학 졸업반이면서도 취업전쟁에 뛰어들지도 않는 나는 시간만 흘러감에 대해 초조함을 느낀다. 믿겨지지 않지만 이제 일 년여만 지나면 서른 줄에 다다른다. 세상이 변하여도 나만은 그대로이리라 믿었던 이십대 초반의 치기도 오그라들었다. 지갑에 카드가 몇 장인지, 명함에 박힌 내 이름 석 자 밑에 직함이 무엇인지로 나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하는 세상의 통빱에 길들여져 연봉과 스펙같은 것들을 비교하고 따져대는 취업준비생들의 온라인 카페의 게시글들을 읽으며 내 앞길을 그려본다.

 

 

3.

 

이미 대학을 떠났어야 할 나이, 알량한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 인문계열이라는 학벌 하나로 내가 비빌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입 제도가 또다시 '통합논술'이라는 괴물의 등장으로 인하여 사교육 시장을 살찌우고 있는 가운데, 나는 강북의 사교육 1번가라는 어느 동네의 중대형급 논술전문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업 준비를 위해 리허설에 참석하고 교재를 받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소주 한 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래, 이미 지나온 날들에 대해 회한을 품지 말자, 남들과의 비교 따위도 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15학점을 꽉꽉 채워서 오전 시간대에 몰아서 수업을 듣는 학교에 가면 나의 그러한 다짐은 흔들린다. 바쁘게 면접용 정장을 입고 캠퍼스 곳곳에 부스를 설치한 기업 홍보팀에게서 정보를 받으려는 친구들, 대기업 취업률 국내 4,5위권이라는 대학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후배들의 모습, 토익 고득점과 취업준비로 여념이 없는 이들의 낮고도 굳은 숨소리가 가득한 중앙도서관의 위용을 뒤로 하고 캠퍼스를 빠져나오는 나, 아찔한 현기증.

 

 

4.

 

이력서를 쓴다. 자기소개서를 쓴다. 나는 자본주의와 기업의 인사 채용 시스템이 요구하는 생애의 궤적을 전혀 밟지 않았다. 저학년 시절에는 노동해방을 외치는 운동'꿘' 날라리 대학생이었고 군대 시절에는 고문관으로 인생의 절벽에 다다랐으며 복학 후에는 방탕과 환락에 빠졌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러한 삶의 궤적 자체가 아니라 그 무엇 하나에도 나를 던져보지 못 했던 비겁함과 소심함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대의를 알량한 이론빨과 말빨로 떠들면서도 나이 서른이 되면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아들,딸을 데리고 주말이면 해외여행은 다닐 계급 상승의 꿈을 가졌다. 아나키즘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녔다고 자인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체제내화되려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남들과는 '다른' 독자적 인생노정을 당당히 걷겠다던 그 치기조차 걷어치운 채, 남들'만큼'은 벌어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조바심만 가득 한 채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주판알 굴리며 작성하고 있다.

 

 

5.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무력감과 지난 날에 대한 덧없는 회한, 신문과 인터넷으로 뒤적이는 취업 정보와 입시 시장 동향, 서울시 공무원 시험 경쟁률 104:1이라는 뉴스, 어머니, 왜 저보고 법대나 의대를 가라고 하셨는지, 왜 공부 하라 했는지 이제는 알겠네요, 돈 없고 빽 없고 사상불량한 나같은 넘에게 공부만이 살 길이지요, 경쟁은 영원하고 삶이란 위태위태한 것이라는 대한민국의 불변의 진리 속에서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요, 난 겁이 나지만, 아마도 내 아들이 훗날 내게 묻는다면 똑같이 대답할 것 같아요. 대학은 무조건 최고 대학을 가야 한단다, 그리고 나도 학원을 보낼테고, 정작 내가 무서운 건 나도 그러한 삶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예감이에요, 아무려면 어때요, 이 지긋지긋한 삶, 자본주의의 식인(食人)화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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