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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초원

신성철 |2006.10.11 18:58
조회 410 |추천 0

일본에서 나이를 세는 데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어서 어학을 배울 때에는 특히 강조를 하곤 한다. 그 강조가 되는 나이가 바로 스무살이다. 이런 식이다. 잇사이(한살), 니사이(두살), 산사이(세살), 욘사이(네살), 고사이(다섯살)......쥿사이(열살), 쥬-잇사이(열한살), 쥬-니사이(열두살)......쥬-핫사이(열여덟살), 쥬-큐-사이(열아홉살), 하타치(스무살), 니쥬-잇사이(스물한살)... 하타치의 어원이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스무살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영화는 실제 스무살 여성인 나리스(이케와키 치즈루)와 자신이 스무살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노인 닛포리(이세야 유스케)의 이야기이다.

스무살 하니 영화 <청춘>이 생각난다. 그렇게도 방황하고 부딪치고 고뇌했건만 지나고 나서 느껴지는 것은 함부로 써버렸다는 후회뿐인 시절, 몽롱하게 술에 취한 채로 신통치 않은 패에 남은 칩을 무책임하게 던져버린 것 같은 느낌,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나이,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시기... 닛포리와 나리스는 육십이나 되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이 스무살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 비로소 현실을 딛게 된다.

닛포리는 여든이 되었지만 그나마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순간으로 스무살을 선택했다. 그의 심장이 멎지 않고 견디어낼 수 있는 시기가 무의식적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다. 그의 기억연보(記憶年譜)를 보면 거의 매해마다 적혀있는 문장이 '심장이 멎지 않음' 이다. 심장판막증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로서는 매해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심장이 멎느냐 멎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차라리 꿈을 선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꿈이야말로 끔찍한 현실을 잊게 해줄만한 가장 든든한 것이 아니던가. 심지어 나리스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승락한 순간에 닛포리가 한 말도 "最後の夢だ(최고의 꿈이다)"였을 정도니까.

나리스는 이복동생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 이복동생은 그런 마음도 모른채 나리스의 친구와 애정행각을 벌인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그녀는 학교도 중퇴하고 노인도우미를 하며 살아간다. 그녀가 진짜로 닛포리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을까? 별로 그렇게 생각되진 않는다. 아무튼 예순의 나이차는 적은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과 동정심이 온통 뒤엉킨 상태에서 그와 결혼하겠다고 승낙을 해버린다. 하지만 닛포리의 투신자살로 인해 그 역시 한낱 꿈임을 자각하게 된다.

나이차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실제 나이보다 자신이 어리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호기로움과 무리가 나온다. 때로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조차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손 치더라도 예외에 지날 뿐이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나이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삶에서의 예외는 나의 것이 아니다. 서글픈 일이지만...

아무튼 실제 스무살이든 정신적으로 스무살에 머물러있든 정면으로 맞설 일이다. 꿈속에서도 배는 고프기 마련이고 꿈 밖에 있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아름다운 장면들...

 

- 닛포리의 반주로 나리스와 그녀의 친구, 그리고 동생이 들장미를 부르는 모습

- 해변에서 의자에 앉은 닛포리의 뒷모습과 멀리 바다를 달려가며 손을 흔드는 젊은이들의 실루엣

- 닛포리의 집 다락방에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두 사람

- 정원에 활짝 핀 해바라기들

- 이케와키 치즈루의 모든 클로즈업, 그리고 전혀 세련되지 않은 그녀의 옷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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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3, 스폰지하우스,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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