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구경하느라 한곳으로 시선이 몰린 군중들 틈에서 소년과 경찰이 함꼐 나누는 정다운 눈짓.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경찰관의 정중한 태도와 애정과 믿음이 듬뿍 담긴 눈으로 경찰관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그때까지 지에 게재되었던 그 어떤 사진보다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알렌 웨버라는 이 소년은 중국 상인 연합회의 가두 행렬을 보기 위해 중국인 거리인 워싱턴의 모리스 컬리네인에 서 있었다. 빨강, 노랑, 무지개 빛깔 등 색색깔의 가면들과 연, 종이, 호랑이 등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불꽃놀이는 하늘 위에 가지가지 색깔의 섬광을 뿌려댔다. 이 모든 것에 매혹된 알렌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듯 온통 정신을 빼앗겨 그쪽으로 내딛었다. 전에는 이런 거리 풍경을 본적이 없없던 것이다. 길가에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꾼들 역시 가두 행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때 한 경찰관이 작은 물체 하나가, 폭죽이 터지고 교통이 혼잡한 도로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달려간 경찰관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모험심이 많은 어린 알렌은 길고 높은 기둥같은 경찰관의 다리 위를 올려다보고, 경찰은 허리를 굽혀 작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거리에 나왔던 사진가 William C. Beall은 그 순간을 목격하자마자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장면은 정지된 순간으로 남아 늘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 준다.
여기 또 한명의 귀여운 아기의 모습이 있다.
코소보 국경지대에 있던 이 아기와 어머니는 세노코스 난민캠프에 막 도착했다. 깊게 패인 어머니의 주름살에 드리워진 전쟁과 가난의 아픔을... 이 아기는 커가면서 절실히 느낄것이다
아!...드디어 난민 캠프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아버지는 좀 더 안전한 난민캠프로 딸을 보내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을 보내야만 하는 주위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의 슬픔을 그 누가 말할수 있으랴..
난민캠프에 수많은 난민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다.
버스주위는 행여나 어머니가 있을까..아버지가 있을까..누이가 있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먼저 도착한 난민들로 둘러 싸였다.
알바니아 국경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눈물.
수십년 전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했던 우리의 조상들도 저런 슬픔을 겪었으리라..
아이만이라도..아이만이라도 살려야 겠다는 사람들...
가족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슬픔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보다 그가 죽어야만 했던 아픈 현실이 더욱 슬픈 것이다..
1968년 2월 1일, 사이공 서부의 초론 지역에서 취재하고있던 AP통신사의 아담스는 손을 뒤로 묶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간부가 사이공 정부군 해병대와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뒤쫓아가자 지프가 멈춰서 있고 그곳에는 남베트남 국가 경찰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관은 연행되어온 남자가 바로 앞에 서자마자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남자의 우측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 충격적인 길 위에서의 처형장면을 담은 한장의 사진은, 그떄까지 베트남 전쟁을 정의의 싸움이라고 간주하고 있던 미국의 여론을 반전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이탄과 고엽제는 베트남의 원시 정글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고엽제 환자가 죽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전쟁의 아픔, 전쟁의 고통, 전쟁의 비극을 이 한 장의 사진만큼 실감나게 말해 줄수 있을까? 베트남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거리로 밀려나온 민간인들, 그중의 한 소녀가 불타는 옷을 찢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공포에 떨며 울부짖으며 내달리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1972년 6월 8일의 일이다. 베트남 육군은 트랭 방에서 수도로 이어지는 1번 국도를 탈환하기 위해 사흘 동안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공의 저항이 완강하자 남부 베트남 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공군의 전폭기들은 트랭방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 위를 저공 비행하며 빗자루를 쓸듯이 공격해 왔다. 세상을 온통 녹일듯이 불비가 쏟아져 내렸다. 판 틴퍽이라는 사진속의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이탄으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마을에서 벗어나 달려나오고 있었다.
1973년 1월 27일 베트남 평화협정이 파리에서 조인되었다. 이에 따라 2월 12일부터 포로의 상호 석방이 개시되어 566명의 미군포로가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5년 이상이나 북베트남에서 포로 생활을 보낸 미국 공군 중령 로버트 스텀이 3월 18일, 고향 캘리포니아의 트래비스 공군기지에 내렸다. 그것은 아내와 4명의 아이들과의 감격어린 재회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AP통신사의 비더는 중령의 돌처럼 굳은 얼굴이 인상적이 었다고 전했다.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이 한창 치열할때 UPI통신사의 사진기자로 종군한 사와다 교이찌는 전쟁의 와중에서 신음하는 베트남 국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그 중의 하나로 퀴논 부근에서 월남인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있는 마을에서 탈출,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긴박한 상황을 포착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 분위기가 감도는 전장속에서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과, 강인한 모성애가 휴머니스틱하게 표현된이 사진은 사와다에게 1966년도 퓰리처상을 안겨 주었다. 사와다는 그후 사진의 주인공인 모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전선을 찾아 1년을 해메던 끝에 그는 그 주인공들과 극적인 상봉을 했다.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는 퓰리처상의 상금을 몽땅 털어 약 1년분의 생활비를 쥐어 주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사와다는 그후 미군을 따라 종군하다가 1970년 캄보디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피묻은 그의 종군기자증이 그의 시체옆에서 발견되어다. 한장의 역사적인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활약하다가 죽은 사진기자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와다처럼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멋진 사진기자는 없었을 것이다. 1942년 퓰리처 사진 부문상이 제정된 이래 세 명의 일본인 사진기자가 수상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사와다는 그의 사진과 함꼐 생생한 역사로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다.
전몰장병의 날...
남편을 잃은 여인은 통곡한다..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모녀.
아프리카 대륙에서 수십만명의 인간이 굶어 죽었다.
그리고 이 소녀도 이 날 죽었다...
1988년 미국 세이트루이스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소방관 한명이 2살난 아기를 구출해내 인공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아리를 사리려한다.. 하지만 그러한 소방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병원으로 옮긴 지 6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비행기가 뚫고 들어간 자리...
용케도 살아남은 한 남자가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쪼그려 앉아 있다.
몇분 뒤...
빌딩은 무너졌다..
빌딩의 붕괴는 25살의 응급의료 대원도 앗아 갔다.
동료의 죽음에 너무도 슬피 흐느끼는 응급의료원들...
인종, 국적, 피부색, 종교, 빈부의 차가 아닌..
그들은 어머니를 잃었고, 아들을 잃었다.
친구를 잃고 남편을 잃었다.
소중한 것들이 잿더미가 되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신주 위에서 전기 가설...
감전된 동료가 전신주에 매달려 흐느적거리자 그 자리에서 동료가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피난길에 태어나 불과 며칠 밖에 살지 못한 아기의 장례식...
부디 평화로운곳에서 행복하기를...
집을 잃은 알바니아 여성의 망연자실한 표정...
서럽게 울고 있는 이남자의 가족들은 세르비아 군인들에 의해 죽었다. 그는 이제 이 집에 홀로 남게 되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한 신인선수.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에도 부상에서 오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선수는 데뷔한 첫 해 3게임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흑인이 살인에 사용했던 칼이 발견되는 순간...
살인자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팔에 총알이 박혔다..
동료는 눈을 잃었다..
그리고 병사는 서럽게 통곡한다.
그 옆에 가장 친한 친구가 잠들어 있는 비닐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여기 괴물처럼 버티고 선 철교위를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가는 피난민의 대열이 바로 그 비극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1950년의 극심하게 추운 겨울,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전격했던 유엔군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평양은 처참한 생지옥이었다. 수많은 평양 시민들이 공포에 쫓겨 남쪽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남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유일한 길이 바로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뿐이었다. 보기 흉하게 뒤틀어진 다리가 얼어붙은 강물 위에서 위험하게 흔들거렸다.
이런 다리 위를 기어가는 피난민의 모습은 마치 개미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개미가 아닌 인간, 가엾은 농부들이었다. 다리가 얼어붙고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위속에서 기어가던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져 버렸다. 강위에 부교를 띄우고 강을 건너간 군인들 가운데에서 뒤를 돌아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막스 데스퍼였다. 그는 폭격당해 부서진 다리의 쇳조각들 위로 기어올라가 전쟁이 몰고 온 비참한 광경을 촬영했다.
맞은편 강변에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혹한 속에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쟁 종군 기자인 그는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전쟁에 강해져 있지만 이 광경은 이제껏 내가 보아 온 것 중 가장 비참한 장면 이었다."
퓰리쳐상 수상작품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진 수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민족과 종교적인 대립 때문에 벌어진 내젖이 오랜기간 동안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뭄과 전염병까지 겹쳐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국제적이고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 프로그램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거의 제기능을 못하고, 구조식량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에게는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 이같은 실태를 보도하기 위해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우연히 마주친 것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옆에는 살찐 독수리가 빨리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을 누른 그는 당장 독수리를 내 쫓았다. 이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일부에서는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어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찍은 다양한 현실의 공포를 가슴 밑바닥에 담고 있던 그는 1994년 7월 28일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채 33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