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
古之善爲道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客,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폐不新成.
妙―묘할 묘, 通―통할 통, 深―깊을 심, 識―알 식, 적을 지, 强―억지쓸 강, 강할 강, 容―얼굴 용, 용납할 용, 豫―머뭇거릴 예, 미리 예, 참여할 예, 兮―어조사 혜, 涉―건널 섭, 관계할 섭, 猶―망설일 유, 같을 유, 오히려 유, 畏―두려워할 외, 꺼릴 외, 隣―이웃 린, 儼―삼갈 엄, 근엄할 엄, 공손할 엄, 渙―흩어질 환, 풀릴 환, 將―장차 장, 장수 장, 釋―풀 석, 용서할 석, 敦―도타울 돈, 樸―통나무 박, 순박할 박, 曠―빌 광, 넓을 광, 멀 광, 混―섞일 혼, 합할 혼, 흐릴 혼, 濁―흐릴 탁, 더러울 탁, 孰―누구 숙, 어느 숙, 徐―천천히할 서, 폐―해질 폐, 버릴 폐
옛날에 도(道)를 잘 닦은 사람은
미묘현통(微妙玄通)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나니,
알 수 없기에 억지로라도 그 모습을 형용해 보면,
머뭇거리는 모습은 마치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모습은 마치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는 듯하며,
삼가는 모습은 마치 손님 같고,
풀어진 모습은 마치 녹아내리는 얼음 같다.
그 질박한 모습은 마치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고,
그 텅 빈 모습은 마치 골짜기 같으며,
한데 뒤섞인 모습은 마치 탁한 물과도 같다.
누가 능히 탁함으로써 고요하여 서서히 맑게 할 수 있으며,
누가 능히 편안함으로써 움직여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는가?
이 도(道)를 지닌 자는 채우려 하지 않나니,
무릇 채우려 하지 않기에 해어져도 새로이 이루지 않는다.
< 뜻풀이 >
안데르센 동화집에 보면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대부분은 이미 그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이제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그 얘기를 다시 한 번 해보자.
어찌된 영문인진 모르지만, 백조알 하나가 이제 막 부화(孵化)를 기다리는 몇 개의 오리알들 사이에 끼여 있었고, 어미오리는 그것도 모른 채 새끼 오리들이 알을 깨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사랑스러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이윽고 때가 되어 새끼 오리들이 한 마리씩 알을 깨고 나오는데, 저마다 방금 깨고 나온 알껍데기들을 한 움큼씩 뒤집어 쓴 채 '꽤액꽤액' 연신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다. 뒤이어 맨 나중에 우리의 주인공인 아기 백조 ― 미운 새끼오리 ― 도 오래고도 두터운 껍질을 깨고 수줍은 듯 기지개를 켜며 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 햇살 가득한 세상은 참 눈부시구나!"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따뜻하고 사랑스런 눈길로 자신의 뒤늦은 탄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미오리와, 자신보다 조금 먼저 알을 깨고 나와 뒤똥뒤똥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는 새끼오리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너무도 당연히 자신도 한 마리 오리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알을 깨고 나온 처음 한동안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서로 장난치고 뛰놀며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날이 거듭되고 그들의 몸집이 조금씩 커갈수록 뭔가 미묘한 기운이 그들 사이에 감돌기 시작했다. 뭔가가 좀 이상해진 것이다. 뭐랄까, 하여간 서로 다르다는 느낌이랄까……. 원래 백조는 오리보다 몸집이 크고 빛깔도 희며, 목과 다리도 길고, 서로 닮지 않은 점이 많다. 그러한 차이가 그들의 몸집이 커가면서 보다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그들 사이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미운 새끼오리'는 그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이웃 오리들로부터도 심한 따돌림과 놀림을 받게 된다.
"이 애는 어쩌면 이렇게 클까?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구나."
"넌 참 이상하게도 생겼구나! 어쩜 그리도 못생겼니?"
"이 녀석은 너무 크고 흉측해."
"쳇, 저 새끼오리는 도대체 무슨 꼴이람? 저렇게 못생긴 놈은 우리 가문의 수치야!"
"너같이 못생긴 녀석은 차라리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게 나아!"
"차라리 어디 먼 곳에라도 가버렸으면 좋겠다!"
……
모두들 그렇게 말하며 그를 미워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녀석은 '미운 새끼오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모욕감을 못견디겠다는 듯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목을 물어뜯기도 했는데, 그러한 일들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불쌍한 '미운 새끼오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이 얼마나 못생겼으면 모두들 이렇게 미워할까 하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퍼지기만 했다. 어릴 때의 그 맑고 천진하던 얼굴에는 점차 웃음이 사라져 갔고, 온갖 어두운 그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도 오리이건만, 왜 나는 이 모양 일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싫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고, 걸음조차 제대로 오리 걸음으로 걷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기만 했다. 덩치는 또 왜 이리 크며, 온 몸을 뒤덮고 있는 깃털은 다른 오리들처럼 노랗지 않고 왜 이리 보기 싫도록 희기만 한지! 또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길다란 목은 그저 징그럽기만 했다. 그렇게 자신이 싫어질수록 그런 못난 모습으로 자신을 낳은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과 운명이 저주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미운 새끼오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만 자신이 '병신(病身)'임을 증거하는 것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고통과 자기환멸, 그리고 깊디깊은 절망감 속에서 '미운 새끼오리'는 또한 얼마나 '온전한 오리'가 되고 싶어 안달했으며, 얼마나 그것을 위해 몸부림쳤는지! 오리처럼 몸집을 작게 하여 그들과 같이 되어보려고 얼마나 자주 단식(斷食)했으며, 음식을 먹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덩치를 키우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주의 깊게 절제하며 음식을 가려먹었던지! 또한 오리처럼 걷기 위해 그들의 보폭(步幅)과 걸을 때의 뒤뚱거리는 자세를 세심하게 관찰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보폭과 뒤뚱거림을 정확히 맞추어 걷기 위해 얼마나 자주 넘어지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지! 그리고 오리에 비하면 아뜩할 만큼 긴 목을 그들처럼 짧게 해보려고 온 몸에 ― 특히 목과 날개 부위에 ― 힘을 주고 얼마나 오므리고 또 오므렸던지!
그래도 여기까지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노력한 보람이 있어 제대로 되어 가는 것 같았지만, 아! 온 몸을 뒤덮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드러나 버리는 희디 흰 깃털은 어이할꼬! 생각다 못한 '미운 새끼오리'는 어느 날 걷기 연습을 하다 우연히 보아 둔 호수 곁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 몇 날 며칠을 뒹굴고 또 뒹굴었다. 혹여라도 자신의 보기 싫은 흰 깃털이 오리처럼 노오랗게 될까 싶어서…….
뿐만 아니라 오리와 같은 목소리의 톤을 내기 위해 아프도록 입을 쩍쩍 벌리며 발성연습을 한 게 얼마이며, 잠드는 순간까지도 오리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잠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주눅들며 가슴 졸여야 했던지! 아아, 그는 그가 받았던 깊디깊은 상처와 절망만큼이나 처절히 '온전한 오리'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정말이지, 처음 한동안은 진짜 오리가 된 것 같기도 했고, 그 우쭐한 기분에 때로는 그들 앞에 보란 듯이 으스대며 나서보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가끔씩은 설핏설핏 아직 오리가 되기에는 부족한 자신의 모습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뭐,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일이기에, 마침내 자유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아아, 나도 한 마리 온전한 오리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 나의 이 모든 고통도 끝나리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일은 자꾸만 더 힘겹고 어려워져만 갔고, 어떤 땐 아무리 마음을 모으고 애를 써도 조금의 진척이 없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자꾸 반복될수록 이번엔 그 많은 노력과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오리가 되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밉고 환멸스럽기까지 했으며, 오리가 되는 길이 그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깊디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갈 즈음의 어느 날 그는 문득, 자신이 그 오랜 세월동안 그토록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조금도, 정말이지 조금도 오리가 되어 있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통곡하며 오열하고 만다.
'아아, 나는 지금껏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구나……조금도 오리가 되지 못했구나……!'
그 자각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줬고, 더할 나위 없는 절망감은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발작하듯 날개를 편 채 펄쩍펄쩍 뛰게 만들었는데, 바로 그 순간 그는 문득 후드득 하고 공중을 날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은 오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에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도 뜻밖의 일이었다.
'어, 내가 날다니, 내가 날 수 있다니……!'
바로 그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갑자기 그의 앞에 펼쳐져 버린 것이다.
'미운 새끼오리'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자신은 오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처음부터 오리가 아니었기에 '온전한 오리'가 될 수도 없었으며, 오리가 되려는 그 많은 노력들이 사실은 모두가 부질없는 헛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아, 나는 오리가 아니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그리곤 '온전한 오리'가 되려고 몸부림치던 동안에 언제나 저주스럽고 환멸스럽던 너무나 자유롭고 눈부시게 공중을 몇 번 훨훨 날다가, 때마침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한 떼의 백조들을 만나자, 그들 사이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행복한 날갯짓을 하며 '미운 새끼오리'는 창공을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아, 나는 처음부터 오리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냥 나였다! 나는 못생긴 것이 아니며, 너무 커서 언제나 부끄럽고 저주스럽던 이 덩치도 큰 것이 아니다. 호수물에 비칠 때마다 스스로 화들짝 놀라며 못견디게 싫었던 이 희디 흰 깃털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너무 길어 언제나 징그럽게만 느껴지던 이 목도 이제 보니 그냥 사랑스런 내 목일 뿐이다. 아! 나는 그냥 처음부터 나였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이 모습 이대로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이것이 내가 조금 각색해 본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미운 새끼오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몇 가지 점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조금 돌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우선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부터 지적해 두고 싶다. 우리는 대개 '백조'라고 하면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눈부시기까지 한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오리'라고 하면 볼품 없고 더러우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집오리들을 연상하게 되는데, 나는 그런 전제 위에서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한 우열(優劣)의 분별(分別)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몫이며, '백조'와 '오리'에게는 있지 않다. 나는 단지 그들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미운 새끼오리'의 고뇌를 보자.
그가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엄마를 비롯한 오리들이었다. 그는 너무도 당연히 자신도 한 마리 오리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모든 가치와 무게와 존재감을 오리에게 두게 된다. 이것은 뭐냐 하면, '미운 새끼오리'는 이후의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오리의 관점에서 오리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기준과 잣대는 그 순간 오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오리의 관점에서 오리의 눈으로 오리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니, 자신은 언제나 부족하고 못나고 보잘것없으며,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병신(病身)'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데 우리들도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상(自我像) ― 이것은 대개 현재의 자신이 느끼는 부족감과 결핍 등이 대부분 극복된, 충만하고 가득 찬 모습을 띠게 되는데 ― 을 온통 미래에다 투영해 놓고, 언제나 그 관점과 그 기준에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왜 이 모양 일까?'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못견뎌 하면서 그 자아상(自我像)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미운 새끼오리'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번에는 '미운 새끼오리'의 '변화'와 자유, 그리고 그 행복한 비상(飛翔)을 보자. 그는 마침내 자유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이 '미운 새끼오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온전한 오리'가 됨으로써 비롯되었는가? 그렇기는커녕 자신을 바라보는 '눈[心]' 하나가 달라짐으로써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는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오리의 관점에서 오리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봤고, 그 때문에 '온전한 오리'가 되어있지 못한 자신이 언제나 괴로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오리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신으로서 바라보게 되면서 '미운 새끼오리'는 갑자기 자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가 그토록 자신의 못남을 못견뎌 하면서 괴로워할 때에도 그 몸은 여전히 그 몸이었고, 그렇게 행복하게 날개를 활짝 펴고 아름답게 비상(飛翔)할 때에도 그 몸은 또한 여전히 그 몸이었다. '미운 새끼오리'의 몸은 처음부터의 그 몸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오직 자신을 바라보는 '눈[心]' 하나가 달라지니, 조금 전까지 온갖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던 그 몸 그대로 지극한 행복(至福)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부족하고 못난 중생(衆生)이라고 여기고 끊임없이 스스로 힘겨워 하면서 '자기로부터의 해방(解放)'을 갈망하는데, 그러나 그 '부족하고 못난 중생'이라고 하는 자기규정과 판단 자체는 이미 ― '미운 새끼오리'의 경우에서 보듯이, 보다 내밀히 들여다보면 ―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자아상(自我像)에서 현재의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오리'의 관점과 기준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자신으로서 바라보았을 때 '미운 새끼오리'에게는 처음부터 아무런 문제가 없었듯이, 미래의 바라는 자아상이라는 관점과 기준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다만 현재를 현재로서 보면, '현재'는 부족하지 않으며, 거기에 '중생(衆生)'이라는 것도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깨달음'이랄까 '자기로부터의 해방(解放)'을 향하는 그 처음부터 이미 우리 자신을 크게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묶여있지 않다. 우리는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깨달아야 할 무엇도, 해방(解放)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
내가 이 장(章)을 뜻풀이하기 전에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부터 먼저 한 것은 두 얘기가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장(章)이 너무나 따뜻하다.
옛날에 도(道)를 잘 닦은 사람은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나니(古之善爲道者, 微妙玄通, 深不可識)……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대뜸 정말 도를 잘 닦아 미묘하고 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뭔가 비범하고 그득하며, 우리와는 뭔가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 듯한, 그래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어떤 깊이와 풍모(風貌)를 가진 사람을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진정으로 도를 잘 닦아 미묘현통한 사람은 미묘현통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너무나 평범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듯하기에 오히려 더욱 미묘현통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네 이 평범한 일상(日常)과 삶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 ―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 사실은 너무나 미묘현통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세계(世界)'가 아닐까? 미처 그런 줄을 모르니, 우리는 끊임없이 미묘현통한 도(道)를 따로이 구하는 것이 아닐까?
대저 오직 알 수 없기에 억지로라도 그 모습을 형용해 보면(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그러나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후의 설명을 해나가기 전에 나는 먼저 우리의 오래고도 깊은 편견(偏見) 하나를 지적해 두고 싶다. 그것은 '도(道)' 혹은 '깨달음'에 관한 우리의 상(相)인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너무 좋게만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연중에 '성(聖)'과 '속(俗)'을 구별해 두고 언제나 '성(聖)'과 결부하여 도(道) 혹은 깨달음을 설명하려 하는데, 아니다, 속(俗)과 구별된 성(聖)은 없으며, 사실은 속(俗) 그것이 바로 성(聖)이다.
나는 그런 관점에서 옛적에 도를 잘 닦은 사람의 모습을 형용해 나가는 노자(老子)의 말들을 해석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들은 마치 '오리'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본 '미운 새끼오리'를 자꾸만 연상시킨다.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客,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머뭇거리는 모습은 마치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모습은 마치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는 듯하며,
삼가는 모습은 마치 손님 같고,
풀어진 모습은 마치 녹아내리는 얼음 같다.
그 질박한 모습은 마치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고,
그 텅 빈 모습은 마치 골짜기 같으며,
한데 뒤섞인 모습은 마치 탁한 물과도 같다.
이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머뭇거리는 모습은 마치 삶의 길을 ― 때로는 하루 하루의 일상(日常)조차 ― 제대로 걷지 못해 머뭇거리고 넘어지고 깨어지기가 일쑤인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연상케 하며[豫兮若冬涉川], 그런 속에서 우리는 삶의 단 한 순간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서성이고 망설이고 주저하며 언제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은가[猶兮若畏四隣]?
또한 그 삼가는 모습이 손님 같다 했는데, 이는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어디에 앉든 무엇을 만지든 항상 조심스럽고 괜스레 주눅들어 쭈뼛거리게 되는 모습에서,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늘상 자신 없고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儼兮其若客], 풀어진 모습이 마치 녹아내리는 얼음 같다 함은, 깡깡 언 얼음은 강하고 정제(整齊)되어 보이며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깊이마저 느끼게 하건만, 그것이 녹아내리고 있으니, 그것은 영락없이 어딘가 허물어지고 질서잡혀 있지 않으며 볼품 없는 우리의 모습이구나[渙兮若氷之將釋]!
그리고 통나무를 쪼개고 다듬어 무언가를 만들면 때깔도 나고 또한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쓰이게도 되지만, 아직 다듬지도 쪼개지도 않은 통나무라, 그것은 말하자면, 아직 그 무엇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고 불분명하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 같은, 그래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질박한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敦兮其若樸].
또한 가득 찬 것 같기는커녕 텅 비어 있어 허허롭고 왠지 모르게 쓸쓸하기까지 하며[曠兮其若谷], 온갖 걱정과 염려와 번뇌(煩惱)로 뒤범벅이 된 탁한 물과도 같은 모습임에랴[混兮其若濁]!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노자는 말한다, 그것이 바로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도인(道人)의 모습이라고! 그 보잘것없는 예(豫), 유(猶), 엄(儼), 환(渙), 돈(敦), 광(曠), 혼(混) 그것이 바로 미묘현통한 도(道)라고! 속(俗) 그것이 바로 성(聖)이요 ― 이 절묘하고도 기가 막힌 비약(飛躍)이여! ― 번뇌(煩惱) 그것이 바로 보리(菩提)이며, 중생(衆生) 그것이 바로 부처라고! 그러니 따로이 구하지 말고 그냥 거기 있으라고! '미운 새끼오리'처럼 온전한 오리가 되기 위해 바깥으로 뛰쳐나가지 말고, 그냥 거기 있으라고!
그러면 그때 비로소 ― '미운 새끼오리'에게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듯이 ― 그 모든 것들로부터 놓여나게 되어 참 평안과 쉼이 오게 되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매이지 않고 거기에 물들지 않는 진정한 자유와 자재(自在)함이 온 삶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노자는 도덕경의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말을 애틋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不出戶 知天下,
不窺유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明],
不爲而成.
'나'라는, '번뇌(煩惱)'라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천하(天下)를 알며,
'현재'라는, '중생(衆生)'이라는 창문 밖으로 내다보지 않고서도 하늘의 도(道)를 보나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서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밝으며,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도덕경 47장)
누가 능히 탁함으로써 고요하여 서서히 맑게 할 수 있으며, 누가 능히 편안함으로써 움직여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는가?(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動之徐生)……'깨달음'이란 탁함을 버리고 깨끗함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탁함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아 사용이 자재함이 곧 그것이다. 그리고 그때 진정한 고요와 평화가 찾아온다. 그에게는 비로소 모든 분별(分別)과 비교가 끝이 난 것이다.
이제 그는 그냥 산다[保此道者, 不欲盈]. 그냥, 주어지는 현실에서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 뿐이다. 단지 그럴 뿐인데, 희한하게도 그의 안과 밖의 모든 삶은 저절로 서서히 맑아지며, 저절로 서서히 모든 것이 ― 하나도 남김없이 ― 살아난다. 분별과 비교 속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전부 되살아나는 것이다. 진정한 생명과 사랑으로―!
무릇 채우려 하지 않기에, 해어져도 새로이 이루지 않는다(夫唯不盈, 故能폐不新成)……사실 이제 그에게는 오직 '새로움'밖에 없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언제나 태초(太初)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니라."(이사야 65:17∼18) 아멘!
출처 : http://www.be1.co.kr/bbs/board.php?bo_table=menu3_1&wr_id=35&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