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고니시 유키나가 vs 가토 키요마사

김성진 |2006.10.18 18:37
조회 76 |추천 0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1600) 약종상(藥種商) 아들로 태어났다. 16세기부터 구마모토 일대는 비고구니(肥後國)라고 불렸는데 1588년 도요토미는 비고구니를 둘로 나눠 그 북부는 가토에게 남부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에게 넘겨주었다. 16:14정도의 비율이었는데 가토가 더 크고 좋은 곳을 받았던 것이다. 가토가 받은 지역은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고 고니시가 받은 곳은 안토성(安土城) 일대로부터 섬 지역 아마쿠사(天草)까지였는데 당시는 더 변방이었다. 이 아마쿠사가 지금 아트 폴리스 운동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아마쿠사 제도(天草諸島)는 구마모토의 남쪽에 있는데 아마쿠사 섬은 상도(上島)와 하도(下島)로 나눠져 있다. 그 주위에 120여 개의 섬들이 그림처럼 산재해 있다. 아마쿠사는 일본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이끌던 다이묘가 고니시 유키나가였던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3) 때인 1592년 4월 3일 15만 8천 8백여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조선 침략군은 고니시 유키나끼가 이끄는 제1군 1만 8천 7백여명을 선봉으로 해서 나고야를 출발해 노도와 같이 평화로운 조선으로 진격하였으며, 평양까지 침공하였다. 화평공작에 실패하여 귀국하였다가 정유재란(1597∼1598) 때 재침하였으나 위세가 떨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후퇴하여 갔다. 귀국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반항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참수형을 받았다. 즉, 왜란 중 가토와 고니시는 서로 견제하고 질시했다. 가토는 주전파였고 고니시는 유화파였다. 왜란의 패전 후에는 서로 다른 길을 가며 싸움을 벌였다. 도요토미가 1598년 8월 죽자 조선에 있던 왜군들은 퇴각했다. 가토도 구마모토로 돌아왔다. 가토는 패전이 아니라 개선자로 돌아 온 것이다.왜란이 끝나자 1598년 9월에는 세키가하라 싸움(關原戰)이라는 내전이 일어났다. 도요토미가 5월에 병들고 8월에 죽었는데 9월에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내전은 도요토미 파와 도쿠가와(德川家康) 파간의 싸움이었다. 조선에 있던 왜군이 모두 퇴각한 것이 10월이었는데 그 빈틈을 이용한 것이었다. 가토는 도요토미의 유언대로 도요토미의 아들 편인 서군(西軍)에 서지 않고 신흥세력 도쿠가와의 동군(東軍) 편에 섰다. 도요토미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였고 도쿠가와의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었다. 고니시는 서군이었다. 이제 두 왜장은 서로 적이 된 것이다. 고니시는 도요토미의 편에 서서 그 아들을 옹호했고 도쿠가와에게는 등을 돌렸다. 여기서 패한 고니시는 1600년 교토 육조(六條) 하원(河原)에서 가토의 칼에 맞아 죽게 된다. 고니시의 땅 아마쿠사도 가토에게 빼앗겼다. 고니시의 안토성은 헐렸고 그 부재는 구마모토 성으로 옮겨졌다. 한편,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앙심이 깊은 장군이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