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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탈리아 - 사라진 도시 폼페이 이야기

박현용 |2006.10.22 21:48
조회 48 |추천 0


 

폼페이

 

멸망시기 : BC 79년 8월

번성이유 : 초기 항구도시로 후기에는 윤락가의 대명사로 번성(당시 폼페이 윤락업은 합법)

멸망원인 : 베수비오 화산 의 대폭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灣)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人)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人)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그 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 후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 BC 91∼BC 88)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化)하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 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당시의 분화상황은 소(小)플리니우스가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財寶)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시드니(오스트레일리아)

 리오데자네이로(브라질)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에 속하는 나폴리...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몹시 지저분한

 거리풍경에 한번 놀라고,

 맛있다고 그렇게 소문이 자자하던

 나폴리피자 의 형편없는 맛에 두번 놀랐다.

 사실 카프리를 갈까 폼페이를 갈까

 몹시 고민했지만,

 비용을 포함한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결국은 폼페이로 결정을  내렸다.

 

 

 

어렸을적에 선생님으로부터,

거대한 화산폭발로 인해 모든것이 화산재에 묻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것이 전부인 나에게

폼페이는 그다지 큰 감흥으로는 다가오지 못했다.

지금와서 느끼는것은 만약 자기가 가고싶어하는 여행지가 유적지라면,

그것에 관한 공부는 꼭 해야하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느낀다" 라는 말이 있듯이 정말 거기서 느낄 수 있는것은 아는것만큼이다.

다시는 그런 후회스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한다.

 

 

[폼페이 유적지 안에서 - 정말 무더운 날씨였다]

 

1709년 이탈리아 중부 서해안에 자리잡은 베수비오스산 서쪽의 레지나 마을.

수도원 뜰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이 문득 무엇인가를 주워들었다.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이었다.

그는 몇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수돗가 - 생각보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1738년 4월 따뜻한 봄날.

한 농부가 베수비오스산 기슭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난데없이 괭이 끝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흙을 파헤치니 꽤 긴 쇠붙이가 나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목기사들은 그것이 아주 먼 옛날에 쓰인 수도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그 땅 밑에는 옛 도시가 묻혀 있다는 말인가.

나폴리 국왕 샤를르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스 산 기슭을 파헤쳤다.

알쿠비에르는 폭약을 써서 15m 두께 바위를 뚫는 데 성공했다.

이 발굴에서 그들은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

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

그들은 베수비오스 화산이 터졌을 때

용암에 파묻힌 1700년 전 로마 제국의 도시 헤르쿨레늄을 찾아냈던 것이다.

 

 

 

[당시 존재했던 상점]

 

저곳에서 갖가지 음식을 팔았다고 생각하니,

우리나라 장터가 갑자기 떠올랐다.

 

1748년 4월1일,

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베수비오스산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엿새째인 4월6일 이상한 돌기둥들이 나왔다.

거기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더 깊이 파들어 가자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다.

4월19일, 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오던 끝에

처음으로 사람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금화를 잔뜩 움켜쥔 남자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나폴리 왕국은 이 사건으로 떠들썩해졌고,출토된 유물들은 빠짐없이 국왕에게 바쳐졌다.

얼마 뒤 원형 극장을 발굴한 알쿠비에르는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을 그만두고 말았다.

 

1754년이 되자

이름 모를 지 하도시에 대한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그 지하 도시가 어느 시대

어느 도시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구나 샤를르 왕은 옛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흥미가 없었으므로,

그저 ‘보물 찾기’ 에 빠져

이곳저곳 옮겨 가며 파 헤치기만 했다.

훌륭한 문화 유적들이 무식한 일꾼들의

곡괭이에 마구 허물어지고 망가졌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지하 도시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파헤 쳐졌다.

 

 

 

 

 

 

[당시 폼페이의 벽화]

 

아주 사실적으로 음란하게 묘사되어 있는 그것들을 보면서

성의 문란함은 항상 멸망을 초래한다는것을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1755년 6월 어느 날 독일의 뛰어난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자기 집 서재에서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소(小) 프리니우스 편지집’을 읽어 내려가던

빙켈만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는 곳이 바로 로마시대 폼페이로구나!’

베수비오 산기슭에 묻힌 지하 도시가 폼페이란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빙켈만은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거기에는 화산이 터졌을 때 소 프리니우스가 아버지인 대(大) 프리니우스를 따라

폼페이 시민들을 구하러 간 일을 상세히 적은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는 그 끔찍했던 날의 폼페이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화산재에 그대로 굳어버린 시신 - 얼마나 뜨거웠을까....라는 생각밖에는]

 

 

품페이의 최후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폼페이를 배경으로 - 저 뒤에 그 사화산이 있다는.....]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없이 터졌고,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다.

 

 

[옛 폼페이의 거리풍경]

 

잘 포장되어있는 대로변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보니

그당시 얼마나 문화가 융성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집들이 다 창녀들만 산다는 집이라는......쩝!!

 

 

 

[폼페이 유적지 어느 골목]

 

저것을 복원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폼페이의 크기가 서울의 왠만한 구정도의 크기라고 하던데...

그런 면에서는 이탈리아 사람들 정말 존경스럽다.

우리 문화재는....제발 훼손이나 시키지 말지...쩝...--;;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로마 병사들,

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부서진 폼페이의 유적 - 어찌나 더웠는지..그들을 얼마나 더웠으랴.....]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스 산기슭에 세워진 헤르쿨레늄도 똑같은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두 도시는 서로 다르게 파괴되었다.

헤르쿨레늄에는 화산재와 비,용암이 뒤섞인 진흙이 쏟아졌다.

그것은 무려 20m 두께로 덮여 이 도시를 영원히 잠재웠다.

폼페이는 이와 달랐다.

흙탕물 대신 잿가루와 경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졌고,

유황 연기가 그 뒤를 따라 도시를 덮침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켰다.

폭발이 끝난 뒤에도 화산재 구름은 바람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갔다.

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원로원 파우노의 집]

유적지 발견당시 집앞에서발견되 반지로 보아 원로원의 집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천년 전 고대 로마의 저택의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고있는 집이라고 한다.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작업장에는 연장이,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품페이 발굴

 

 

1717년 12월9일

프러시아의 슈텐달에서

가난한 신기료 장수 집안에서태어난 빙켈만.

그는 어려서부터 옛 무덤을 찾아 시골을

떠돌거나 오래된 항아리들을 파내는일을 즐겼다.

폼페이가 처음 발굴되던 1748년 빙켈만은

드레스덴의 뷔나우 백작 집에 서적을 맡아보는 사서(司書)로 들어갔다.

거기서 옛 그리스 문화를 연구하던 그는

얼마 뒤 드레스덴에서 옛날 유물들이 발굴되자

그것을 연구한 책을 내어 그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1758년 빙켈만은 알바니 추기경의

고대 유물 수집품을 맡는 사서가 되었고,

1763년에는 로마 일대의 고대유물 감독관이

되었다.

그는 감독관자격으로 나폴리 왕국을 찾아갔다.

그의 가슴 속은,땅속에 묻힌 지하 도시가                                 [창녀의 집 표식 - 어떤 의미일까]

폼페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주인공으로서,

그곳을 과학적으로 발굴하여 로마제국의 

미술을깊이 연구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폼페이를 찾아간 빙켈만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일꾼들은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파들어 가다가

귀중품이 나오면 슬쩍 호주머니에 넣거나 왕에게 보냈다.

귀중한 사료가 되는 벽이나 건축물을 마구 부순 뒤 유물만 파내고 건물은 도로 묻어 버렸다.

빙켈만은 나폴리로 달려가 샤를르 국왕을 만났다.

 

“전하,나폴리 학자들이 폼페이를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발 폼페이를 훼손하지 말고 발굴해 주십시오.

 거기서 나오는 물건은 인류 전체의 재산이며,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할 귀중한 자료입니다.”

 

 왕은 벌컥 화를 냈다.

 

“무슨 헛소리냐? 여긴 내 땅이고 출토품도 내것이다.

 나폴리 학자들은 내 명령에 따라 폼페이를 잘 발굴하고 있다.”

 

빙켈만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폼페이에 가지 못하도록 감시당했다.

그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폼페이 출토품을 스케치하는 일조차 거절당했다.

 

 

[폼페이의 로마도로 - 이 도로가 로마까지 이어져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쉽게 물러날 빙켈만이 아니었다.

그는 현장 감독에게 돈을 주고 몰래 발굴 현장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지식을 가지고 그는

1762년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 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1764년에는 ‘고대 미술사’라는 길이 남을 책을 펴냈다.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와 ‘고대 미술사’는

폼페이와 헤르쿨레늄에서 나온 유물들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바르게 평가함으로써 ‘로마 미술사’라는 학문 체계를 세웠다.

빙켈만은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와

‘고대 미술사’에서 옛 유물을 통해 옛 문화를 이해하는 법을 밝힘으로써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는 아주 작은 실마리로부터 역사를 추리해 내고,유물을 통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역사학자나 철학자의 책상 위에서 맴돌던 고고학은 빙켈만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당당한 학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폼페이의 빵집터 - 정말 저기서...? 난 파리바게트가 좋은데......농담입니다..쩝]

 

1768년 6월8일,진정한 고고학의 창시자 빙켈만은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한 이탈리아인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이 나폴리 국왕의 미움을 산 데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범인이 빙켈만을죽일 살해 동기는 전혀 없었다.

나폴리,사르디니아,시칠리아 등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된 때는 1861년 3월이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고고학자 주제페 피오렐리로 하여금

폼페이를 과학적으로 발굴하게 한 것은,

빙켈만이 죽은 지 거의 100년이 다 돼서였다.

피오렐리는 빙켈만의 뜻을 이어 오늘날과 같은 발굴 방식을 처음 시도했다.

그것은 가재도구,집,거리…. 무엇 하나 빠짐없이 차근차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일은 지금껏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오고 있는데,약 5분의 4쯤 발굴되었다.

 

 

[가장 오래된 원형 경기장]

 

이 경기장은 기원전 80년에 지어진 경기장으로

원형 경기자 중 가장 오래된 경기장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경기도 벌였겠지만 글래디에이터 영화처럼 수많은 검투사들이

피비랜내 나며 서로 또는야수와 싸웠을 것이란 상상을 해보며

경기장 가운데 서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고 한다.

나말고 다른사람이......^^

 

 

여태까지 드러난 바로는,폼페이는 약 3㎞ 둘레의 타원형 도시이다.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성문은 모두 8개,길은 바둑판처럼 곧게 뻗어 있다.

길들은 7m너비로 모두 돌로 포장되었고,인도가 마찻길 양옆으로 나 있다.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전이 세워져 있어 집집마다 수돗물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발굴된 목욕탕은 네 군데. 한증탕,냉탕,온탕이 갖추어져 있었다.

도시 서남쪽에서는 광장 세 군데와 극장 두 군데(각각 800명,5,000명 수용)가 드러났으며,

근처에는 조합사무소,도량형 검사소,시청,체육관 따위 공공 건물이 모여 있다.

동쪽 끝에는 만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미술품 가운데

특히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은 로마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앞으로 10년 안에 발굴이 끝나면,

로마 제국의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눈부신 유산이 더 많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폼페이의 아름다운 정원]

그 당시에는 저렇게 피었을거라는 생각을 하며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저것보다 몇배는 아름다웠을 폼페이....인간의 죄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쩌면,

그 학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산재에 뒤덮여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폼페이는 멸망했다.

거기에는 정말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본다.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에는 많은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에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말자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은 몸소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는것이 올바른것인지 알려준 은인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가는것이 올바른 삶인가...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부질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야야 한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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