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召西奴)의 ‘국적’을 고구려로 보아야 하는가, 백제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는 문제가 있다. 소서노는 본래 졸본부여 출신이니 첫 번째 남편 우태(憂台), 두 번째 남편 추모(鄒牟)와 마찬가지로 부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추모가 나라를 세울 때 크게 조력하여 고구려의 첫 번째 황후가 되었으니 고구려의 여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뒷날 두 아들을 이끌고 망명하여 백제를 세우고 백제의 국모가 되었으니 백제 사람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필자는 소서노를 고구려 건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여기에선 고구려의 여걸로 간주한다.
백제의 시조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온조왕(溫祚王)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백제본기’ 첫머리도 시조 온조왕 조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 아니라는 이설도 와 , 그리고 중국의 사서들은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조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 이설에 따르면 온조의 형인 비류(沸流)가 사실은 백제의 시조라고 한다.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으니, 이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등이 주장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 : 召西努)의 백제 시조설이다. 단재의 주장 역시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백제본기’의 기록이다. 단재는 를 통해 소서노를 가리켜, ‘조선사상 유일의 여제왕(女帝王)의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건설한 자’라고 했다. 소서노가 백제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서 고구려의 건국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설․비류설․소서노설 등 세 가지가 전부냐 하면 그게 아니다. 여기에 우태설(優台設)과 구태설(仇台設)을 더하면 다섯 가지나 되는 셈이다.
이처럼 논쟁의 여지가 많은 전문적이며 학술적인 문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비류와 온조 형제의 어머니로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소서노, 따라서 우리 고대사 최초의 여걸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서노의 존재를 전해주고 있는 기본 사료인 ‘백제본기’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제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이다.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뒤에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 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했다. (중략)
그러더니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태자로 삼으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로 가서 살려고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 같은 천혜의 땅은 다시 얻기 어려우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를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 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위례성으로 돌 아와 보니 온조는 도읍을 막 정했으며, 백성이 편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 뉘우치며 죽었다. 그러자 그의 백성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뒤 계속 백성이 즐겨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서 백제(百濟)라고 했다. -
인용이 다소 길었지만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건국 초기의 백제는 처음 국호가 십제였으며,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 어머니는 추모의 두 번째 부인인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요, 백제는 처음에 비류왕과 온조왕의 두 나라로 잠시 분립했다가 비류왕이 자살함으로써 다시 합쳐졌다는 것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기록 다음에 덧붙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그 대목도 더불어 소개한다.
- 또는 말하기를 시조는 비류왕이고 그 부친은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며, 모친은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가 비류요 다음이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그는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 용납되지 못해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는 소서노에게 장 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라를 세우고 왕업을 여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은 그녀를 매우 총애했고, 또한 비류와 온조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예씨(禮 氏)의 아들 유류(儒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했다.
“처음에 대왕이 부여의 난을 피해 도망쳐 이곳에 이르자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 여 도와서 나라의 기틀을 이루었으니 그 공로가 얼마나 컸느냐? 이제 대왕이 돌아가면 나라가 유류에게 넘어가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 헛되이 있으면서 불안하게 사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 지 않겠느냐?”
하고 모친과 아우와 더불어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여기서 살게 되었다.
와 에서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東明王)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인애와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帶方)의 옛 땅에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으므로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 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
우리 고대사는 대부분의 기록이 내우외환으로 망실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불분명하고 불확실하기가 마치 미궁과도 같아서 정확한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하지만 에 실린 위의 기록만으로도 최소한 몇 가지 추론은 가능하다.
첫째, 백제의 뿌리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을 이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백제의 왕성(王姓)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사실로도 증명되고, 또 472년 개로왕(蓋鹵王)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한 대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부식이 에서 소서노의 전 남편이며 비류․온조 형제의 부친 우태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한 것은 틀린 말이다. 이는 그 자신 ‘고구려본기’ 첫머리 시조 동명성왕 조에서 해부루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사지내다가 마침내 곤연에서 금빛 나는 개구리같이 생긴 아이 금와(金蛙)를 얻어 양자로 삼았다고 한 말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 초기의 한때에 불과했든 오랜 기간을 지속했든 비류왕과 온조왕을 시조로 하는 두 개의 백제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셋째, 이들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가 추모대왕(동명성왕 :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함께 건국했으며, 뒷날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우리 고대사 최초의 여걸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소서노는 단재의 말처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을까.
백제사의 경우 신라․고구려에 비해 사료가 상대적으로 더욱 빈약한 까닭에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건넜다는 패수와 대수가 지금 무슨 강인지, 대방의 옛 땅은 어디인지, 또한 한산 부아악과 하남 위례성과 미추홀이 어디인지 수많은 이설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시조 문제부터 분명한 정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이 비류가 정말로 자살을 했고, 그래서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는 이야기가 정설인 줄 알고 있었으나 근래 들어 비류왕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온조와 분립한 채 독자적 왕국(비류백제)을 수백 년이나 유지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미추홀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살기 힘든 곳이라면 도읍을 옮기면 그만이지 그것이 과연 자살까지 감행할 정도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이었던가. 비류가 그처럼 나약한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수많은 백성을 거느린 채 신천지를 개척하러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애초부터 한 나라의 임금 될 자격도 없는 용열한 인간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추모성왕인가, 아니면 우태인가. 또는 동명의 후예 구태인가. 아니면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각각 달랐는가. 그리고 비류백제란 과연 실재했던 왕국인가. 하지만 이러한 소모적이며 학술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루고, 국모 소서노의 파란만장했던 비극적 한 삶을 사서의 기록과 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본다.
일세의 영걸 추모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 형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졸본부여로 망명할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인지라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과 임신 중인 아내 예씨 두 여인은 함께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따른 사람은 오이․마리․협보 등 심복 세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모둔곡을 지나다가 무골․재사․묵거 등 세 사람을 거두어 졸본부여로 들어선 것은 이미 유화부인편에서 말한 바 있다.
일단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추모는 이들 여섯 명의 심복을 비롯한 수개 부족을 거느리고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꾸던 나라, 단군왕검의 조선과 천왕랑 해모수의 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원대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천손국을 세운 뒤 옛 조선의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에 세운 나라들을 모두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추모의 필생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예나 이제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 소수의 심복과 불과 수백의 추종세력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때 만난 여인이 바로 소서노였다. 나이는 비록 8년 연상이요, 게다가 이미 두 아들을 둔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가 졸본부여에서는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인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이기 때문이었다. 연타발은 계루부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장사 수완이 비상하게 뛰어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남북 갈사(曷思 : 沃沮)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사업을 벌여 수많은 재물을 모은 거부였다. 자연히 추모로서는 연타발의 재산과 명성, 계루부의 세력에 의지하여 지지 기반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활 잘 쏘고 말 잘 타고 용모도 매우 준수한 젊은 영웅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이미 비류수와 졸본천 주변 사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연타발도 자신에게 찾아와 잘 부탁한다고 깍듯이 인사하는 추모를 대하자 첫눈에 그가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영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추모의 사람됨이 영특하고 무술 또한 비상하게 뛰어나니 한 부족은 물론이요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추모의 인품과 재능에 반한 연타발은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재물을 기울여 추모의 건국사업을 돕기로 작정했다.
물론 그것은 상술이 뛰어난 사업가의 안목으로나 계루부 지도자의 입장으로나 먼 앞날을 내다본 대담한 투자였다. 또한 그러한 적극적 지원과 협력의 밑바닥에는 과부가 된 외동딸 소서노의 장래를 맡겨야겠다는 속셈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한 번 시집갔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소서노, 어느덧 30고개에 이르렀으나 웬만한 사내들은 눈에 차지 않아 재혼을 마다한 채 홀몸으로 지내던 소서노, 하지만 아직도 젊은 시절의 미모와 열정은 그대로 간직하여 밤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뜨거운 여인 소서노, 그녀의 눈앞에 어느 날 갑자기 천왕랑 해모수의 아들을 자처하는 젊은 영웅이 나타났으니 첫눈에 홀랑 반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추모의 빼어난 인품, 준수한 용모, 늠름한 기상, 그리고 백발백중하는 신기(神技)의 활솜씨에 그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겠는가. 소서노는 추모의 매력에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어갔다.
추모는 그렇게 연타발 부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삼아 더욱 많은 문무 인재와 백성을 끌어모아 지지세력을 키우는 한편, 비류곡 졸본천 서쪽에 성을 쌓고 집들을 세우고 야장(冶匠)을 지어 무기를 만드는 등 한 해 동안 건국사업에 불철주야로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소서노는 남장을 하고 그림자처럼 추모를 따라다니며 그의 사업을 도왔다. 그런 모습을 본 졸본부여 사람들이 하나같이 연타발의 과부 딸 소서노가 이젠 추모의 여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결합을 했다. 추모에게는 이미 동부여에서 결혼하여 자신이 도망쳐나올 때에 임신한 본부인 예씨가 있었지만 연씨 부녀의 재산과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연상의 여인 소서노를 기꺼이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전 남편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으니 연타발과 소서노의 기분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소서노가 30세의 과부였고, 그녀가 16세 무렵에 시집갔다고 본다면 그때 비류는 많아야 12세, 온조는 10세 안팎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귀신같은 활솜씨를 지닌 추모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바람처럼 퍼져나가 원근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신민(臣民)되기를 자청하며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7년 10월, 만 22세의 추모는 마침내 대가(大加)들의 추대를 받아 대왕위에 올라 고구려 개국을 선포했다. 추모대왕은 자신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했으므로 본성이 해씨(解氏)였겠지만 새로이 나라를 열었으므로 높고 넓고 크다는 뜻에서 고씨(高氏)로 창씨하고 이를 왕성으로 삼았다.
동부여에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아들이 데리러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추모대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세상을 뜬 것은 고구려가 건국된 지 14년째 되던 해였다. 대왕이 14년간이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이 떠난 뒤에 태어난 아들을 데려오지 못한 것은 오로지 건국 초기 고구려의 국력 신장을 위해 동분서주했기 때문이었다. 대왕은 그동안 비류국과 행인국을 쳐서 아우르고 예족을 몰아내고 동부여를 공격하는 등 국토와 백성을 늘리기 위해 세월 가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사신을 보내 유화부인의 별세 소식과 더불어 왕후의 예로써 후히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오자 대왕도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한해두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구려의 황후가 된 소서노도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갔다. 소서노의 나이 벌써 44세. 해가 갈수록 얼굴의 주름살은 늘어가고 피부의 탄력도 줄어드니 자연히 대왕의 발길도 뜸해져갔다. 대왕은 이제 36세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소서노는 점점 걱정이 많아지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국력이 강해지고 대왕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자 자연히 후계자 문제가 당면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4년이 또 지났다. 대왕은 아직도 40세의 장년,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덧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날이 문제였다. 죽더라도 대왕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둘 중 누구든 왕위를 이어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겠는데, 만일 동부여의 친아들을 데려와 대를 잇게 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소서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소서노는 대왕에게 좇아가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주십사 하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 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졸라대자 나중에는 들은 척도 않았다. 이미 애정이 식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서노도 더욱 애가 타서 기를 쓰고 졸라댔다. 나중에는 나라를 세울 때에 재산을 기울여 조력했던 일까지 상기시켜가며 성화를 부리니 대왕은 아픈 옛 상처를 건드리기나 한 듯 불같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랑에 속아 몸도 주고 돈도 주고 결국에는 배신당한 연상의 여인 소서노,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그지없이 뼈저리고 살 떨리는 절망감을 그 누가 알아주랴.
추모대왕이 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데려온 것은 건국 18년이 지난 서기전 19년이었다. 는 유리가 어머니 예씨부인을 모시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을 거느리고 졸본으로 찾아왔다고 했으나 아마도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는 것이 보다 더 상식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고구려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18년간이나 아무 소식도 없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수시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주고받았으며, 두 모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따라서 추모대왕이 그때야 유리를 부른 까닭은 소서노의 성화가 귀찮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하루바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또 어쩌면 그 이듬해에 대왕이 만40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고 유리가 왕위를 이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 무렵 대왕은 무슨 중병에 걸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왕은 예씨와 유리가 오자마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황후와 태자로 각각 책봉했다. 그뿐이랴.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으랴. 배신의 아픔도 그렇지만 더욱 급한 것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은 대왕이 살아 있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뒷날 대왕이 돌아가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소서노와 두 아들의 목숨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 모자의 하루하루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비류가 아우 온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형제는 어찌하면 좋을꼬? 옛날 대왕께서 난을 피해 부여로부터 도망쳐 졸본 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어머니께서 가산을 죄다 털어 왕업을 이루는데 진력했음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황후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도 덤받이 자식 신세가 되었으니 이 무슨 꼴인지 모르겠구나! 대왕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이렇거늘 하물며 뒷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몸이다. 이렇게 사마귀나 혹같 은 신세로 구차하게 붙어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땅을 개척해 따 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천만번 낫지 않겠느냐?”
온조가 두말없이 좋다고 하여 두 형제는 당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 일을 상의했다. 눈물을 흘리며 듣고만 있던 소서노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너희 말이 옳다! 나 역시 이땅에서는 더이상 살고싶은 마음이 없으니 기꺼이 너희 형제 를 따르도록 하마!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 아닌 다음에 무엇이 두려워 도망치듯 몰래 떠나 랴! 대왕께 아뢰고 떳떳이 떠나도록 하자꾸나!”
그리고 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대왕에게 찾아가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자 고구려를 떠나겠다고 했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그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커녕 뒷날의 화근이 스스로 사라져주는 것이 대견하고 기특한지 많은 재물을 여행경비로 내려주기까지 했다.
서기전 19년 9월. 그렇게 해서 소서노는 마침내 회한만 남긴 채 졸본 땅을 영영 등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오간․마려․을음(乙音)․해루(解婁)․흘우(屹于) 등 열 명의 심복과 그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소서노의 뒤를 따랐다. 추측컨대 소서노의 나이가 그해에 만 48세였고, 그녀가 추모대왕을 만난 30세 이전에 과부가 된 사실로 미루어 추산하면 당시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각각 30~ 25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렇게 도성 졸본을 떠나고 고구려 국경을 지난 소서노 일족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사서에서는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은 그들이 대방의 옛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여’ 처음에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했고, ‘백가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나라를 세웠기에 국호를 백제라 했다고도 한다. 그때가 서기전 18년 10월이라고 하니 이는 망명길에 오른 지 13개월 만의 일이었다.
과연 소서노 모자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 과연 어디인가.
대방의 옛 땅이 어떤 학자는 오늘날 평양에 있던 최리(崔理)의 낙랑국 남쪽 황해도지방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이른바 한사군의 하나였던 요서지방의 대방군을 가리킨다는 사람도 있고, 황하 남쪽 산동반도 일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패수와 대수도 이설이 많지만, 가장 큰 쟁점은 한산 부아악과 하남 위례성, 그리고 미추홀의 비정이다. 지금까지 학계의 정설은 부아악은 북한산 인수봉, 위례성은 서울 강남, 미추홀은 인천으로 굳어져오다시피했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학설 대부분도 근래 새로운 연구 성과에 따라 많은 이설과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 하남 위례성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하남시 교산동과 춘궁동 이성산성 일대, 충남 직산설 등이 있고, 미추홀도 인천이 아니라 임진강 유역, 충남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설 등이 있다.
백제의 대륙경영설에 따라 소서노와 비류백제의 최초 건국지는 압록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간 중국 산동반도였고, 따라서 미추홀도 그 지역에 있었으며, 하남 위례성도 오늘의 서울 한강 남쪽이 아니라 중국 황하 남쪽의 옛 대방 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르면 온조는 소서노(비류왕)의 명령에 따라 신하와 백성 일부를 나누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건너와 마한 왕으로부터 영토의 일부를 얻어 또 하나의 백제를 세워 분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류백제설을 처음으로 제기한 재야사학자 김성호(金聖昊)씨는 고대의 한산은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요 광주의 속현이 용인이며 용인민속촌 남쪽에 부아산이 있으니 한산 부아악은 이곳을 가리키고, 하남 위례성은 의 직산설과 부합되는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납안리에 걸쳐 위치한 위례산 정상의 산성이며, 미추홀은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뒷산 금성리성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소서노가 수백 명의 망명 집단을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며 1년 3개월 동안이나 신천지를 찾아헤매다가 마침내 정착한 곳은 대방의 옛 땅이었다. 재물을 풀어 주변의 소규모 부족민 수천 명을 끌어들이고 집을 짓고 목책을 세우는 등 어느 정도 도읍의 기틀을 갖추자 소서노는 맏아들 비류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선포했다. 비류왕은 자신들의 뿌리가 부여에서 나왔으며 십제가 부여를 이었으므로 왕성을 해모수의 해씨도 아니고 고추모의 고씨도 아닌 부여씨라고 창씨했다.
백제조에도 ‘왕성은 부여씨인데,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 왕이란 뜻이다. 부인은 어륙(於陸)이라고 부르며 중국말로 왕비라는 뜻이다’라고 나온다.
국모 소서노가 근거지를 삼은 곳은 그 옛날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로 도망쳐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운 마한 땅이었다. 마한 왕에게 재물을 바치고 땅을 얻어 변방의 소국을 자처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말갈과 낙랑과 동예 등 주변의 강적들이 신생 약소국 십제를 얕잡아보고 걸핏하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십제의 군사력이라고 해봐야 기껏 1천 명 안팎이었을 것이니 하루가 멀다 하고 강적들이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니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소서노는 비류왕과 온조, 그리고 오간․마려․을음․해루 등 열 명의 대신과 의논 끝에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십제는 건국하자마자 다시 남부여대하여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황해를 남하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비류왕과 온조 형제의 틈이 벌어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형왕 비류에게 자신의 여생의 여력을 몽땅 쏟아 새 나라를 세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는 어머니에게 아우 온조가 시기를 하고 불만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라를 세우고도 10년이 가깝도록 정착을 못한 채 강적만 만나면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만 치는 소서노와 비류의 소극적이며 온건한 정책에 보다 젊고 혈기 넘치는 온조가 강경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기를 들고나섰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이 대방의 옛 땅을 떠나 바다를 남하하여 배를 댄 곳은 미추홀이었다. 미추홀이 지금 어디인지 확실히 비정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정설처럼 굳어져왔던 인천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서 2천 년 전에는 수십 명씩 태운 비교적 큰 배들이 쉽사리 접안하지 못했으리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는 ‘미추홀이 지금(고려시대) 인주(仁州)요, 위례성은 어딘지 모르겠다’고 한 반면, 는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편에서는 여러 이설 가운데 김성호씨가 주장한대로 직산과 가장 가까운 안성천 하류 아산설을 취하기로 한다.
미추홀에 상륙한 국모 소서노는 두 아들과 신하들을 보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비류왕은 온조와 신하들을 데리고 안성천을 따라 거슬러오르다가 상류의 용인 부아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때 나이든 중신들은 소서노를 모시고 미추홀에 남아 있었고 비교적 젊은 신하들이 비류왕 형제를 수행했는데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모아 비류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대왕폐하. 살펴보건대 이 하남의 땅이 북쪽으로는 큰물을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뫼들 에 의지했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졌으며 서쪽은 바다가 막고 있으니 이는 하늘 이 내린 다시 구하기 어려운 요지인 듯하옵니다. 원컨대 여기에 도읍을 정하심이 마땅한 줄 아룁니다!”
비류왕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 이래 십 년 동안이나 강적의 핍박을 받은 것은 내륙에 자리잡았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숱한 싸움을 치르며 여기까지 쫓겨내려온 게 아니오? 이제 우리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하면서 힘 을 길러야 할 것이오! 따라서 이제는 바닷가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바닷가에 자리잡으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소. 첫째,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고 뭍에 올라 와선 농사를 지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요. 둘째, 바다를 끼고 있으면 군사의 이동이 쉬워 해외로 뻗어나가기 쉽다는 점이요. 셋째, 또다시 감당하기 힘든 강적의 공격 을 받으면 재빨리 배를 타고 바다로 피하기 쉽다는 점이요....”
그때였다. 온조가 눈을 부라리며 고함쳤다.
“말도 안돼! 임금이란 사람이 도망칠 생각부터 하다니! 짐승도 힘이 없으면 다른 짐승 에게 잡아먹히고 나라도 힘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게 먹히는 법이오! 자꾸만 싸워서 백전 연마의 강병을 길러야만 살아남는 법이오! 험한 산에 의지해 성책을 두르고 들판에는 백 성들이 살게 하여 적이 오면 싸워 물리치면 될게 아니오? 형님은 어찌 지친 백성들을 이 끌고 또다시 도망칠 궁리부터 먼저 한단 말이오?”
두 형제는 대판 싸우고 부아산에서 내려왔다.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는데 대부분 온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소장 강경파였으므로 비류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싸움은 미추홀로 돌아간 다음에도 재개되었다. 어머니 소서노는 비록 예전의 패기를 잃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미 60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 그녀는 이번에도 맏이 비류의 편을 들었다. 소서노와 비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노장파와 온조를 축으로 삼은 강경 소장파의 틈은 점점 벌어져갔고, 마침내 태어난 지 10년밖에 안되는 나라, 그나마 작고 힘 약한 십제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온조가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내륙으로 들어가버렸던 것이다.
우태와 추모에게 두 차례 시집갔다가 두 번 모두 실패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 소서노, 하지만 그녀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오랜 옛적에 자신의 자궁에서 배태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불화 반목 대립이었다. 비류도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 온조도 내 배를 아프게 하고 태어난 아들이니 그 누구도 파멸당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국모 소서노는 바닷가 미추홀과 내륙의 위례성을 오가며 꾸짖고 타이르고 눈물로 설득해보았지만 이미 틈새가 벌어질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어느 쪽도 고집을 꺾기는커녕 나중에는 타협조차 하려고 들지 않았다.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위례성에 분립해 스스로 임금을 자처한 온조는 다시는 어머니와 형의 밑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마침내 소서노는 최후의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온조를 강제로 끌고서라도 미추홀로 데려와 두 형제를 화해시켜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싸울아비들을 이끌고 위례성으로 쳐들어갈까. 하지만 정면대결을 벌인다면 쌍방의 희생자만 늘어날 것이고, 또한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면 기습을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야음을 틈타 소리없이 재빨리 침입하여 온조를 감싸고도는 강경파 가운데 심복 몇 놈만 죽여 없앤다면 나머지는 모두 항복을 하고 온조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리라... 소서노는 그렇게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몇 차례 왕래하며 위례성 안팎의 지형은 눈에 익혀두었으니 내 몸소 장사들을 뽑아서 이끌고 가리라.
에서 ‘위례성은 지금 직산’이라고 했고, 이에 따라 김성호씨 등도 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그 위례성은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납안리에 걸쳐 있는 위례산(574m) 정상부에 있다. 에는 ‘위례성은 성거산(聖居山; 600m)에 있고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690자, 높이가 8자, 우물이 하나 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위례성은 성거산 맞은편 위례산에 있다. 위례산 정상 약간 못미처 토성과 석성 일부가 있고, 성터 한가운데는 기록과 같이 용샘이라는 옛 우물도 남아 있다. 위례산 바로 밑의 호당리 마을에는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이 우물로 들어가 부여 백마강으로 가서 국정을 보다가 날이 새면 다시 이 우물을 통해 위례성으로 돌아와 북쪽의 적군을 막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뿐만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정초에 지내는 동제(洞祭)의 제문에는 ‘온조구국(溫祚舊國)’이니 ‘예성유허(禮城遺墟)’니 하는 구절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정확히는 서기 6년 음력 2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남장을 한 60대 여인이 범같이 날쌔고 곰같이 억센 다섯 명의 장수를 이끌고 미추홀을 떠나 들판을 가로질러 이 위례산 밑에 다다랐다. 그들은 골짜기 들머리의 경계초소를 번개처럼 기습하여 순식간에 초병들을 해치우고 어두운 산길을 마치 평지를 가듯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여섯 명의 정체는 국모 소서노와 그녀가 이끄는 다섯 명의 특공 결사대였다.
“절대로 내 아들 온조를 해쳐서는 안 되느니라!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고 있나이다!”
소서노가 다섯 명의 장수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고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마침내 성밑에 다다른 소수 정예의 특공 결사대는 성벽을 타넘어 안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소서노의 지휘에 따라 온조의 심복들을 찾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좁은 성안은 이내 비명과 절규, 경고의 외침과 신음이 울려퍼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머리와 팔 다리가 떨어지고 살이 갈라질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소서노 일행은 무서운 투지로 맹공을 퍼부었지만 역시 중과부적 역부족이었다. 예상보다도 위례성의 위기대처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서노의 기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어둠 속의 난전이 끝났을 때 여섯 명의 결사대는 모두 어육이 되어버렸다.
“횃불을 가져오라! 빨리 불을 밝혀라!”
온조왕이 소리쳤다. 불을 밝힌 뒤 침입자들의 시체를 살펴보던 온조는 그만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이럴 수가! 복면을 하나하나 벗겨보니 그 가운데 남장을 한 채 죽은 자신의 어머니 소서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이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최후였다.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의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은 국모를 시해한 이 참극을 은폐한 기록이라는 것이 김성호씨 등의 주장이다.
‘왕도에서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비극의 해 서기 6년인 온조왕 13년이란 실은 비류왕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분립한 첫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듯하다. 단재는 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의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불안한 긴장감 속에서 양측은 대치를 계속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미추홀의 비류왕은 공격해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국모의 시신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다. 온조왕도 굳이 반격하려 하지 않았다. 온조는 어머니의 시신을 성밑에 가매장한 뒤 자신의 신민들에게 이 사건에 관해 엄한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3개월 뒤인 그해 5월에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자주 침범하므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소. 더군다나 요즘에는 요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고 국모까지 돌아가시니 형세 자 못 불안하여 장차 도읍을 옮기고자 하오. 내가 전에 보아두었던 한수 이남은 땅이 기름지니 그리로 옮겨 길이 태평을 도모함이 마땅하리라.”
그리하여 7월에 한산(漢山) 밑에 성책을 세우고 사람들을 이주시킨 뒤, 9월에는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에 정식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그러니까 직산 위례성에서 하남 위례성, 곧 한성으로 천도하는데 거의 1년이 걸린 셈이었다.
그러면 미추홀의 비류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성호씨는 비류백제는 그때 다시 남하하여 고마나루(熊津:공주)의 마한을 공략하여 근거지로 삼은 뒤 서기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413년간 사직을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또 한편 온조백제도 비류백제가 망한 80년 뒤인 475년 장수대왕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웅진으로 남천했다가 다시 부여로 천도해 의자왕 때에 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휴의 ‘백제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온조는 어머니와 형 은조(殷祚)와 더불어 남쪽으로 도망쳐 나라를 세웠는데, 은조는 건국 다섯 달 만에 죽었다.’ 여기에서 은조는 곧 비류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비류왕이 일찍 죽었으므로 결국 온조왕이 후손들에 의해 백제 시조가 되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그런데 온조의 형이 비류가 아니고 은조라는 기록은 뿐인데, 아마도 이승휴가 이 책을 쓸 때에는 비류와 온조 형제가 아니라 은조와 온조 형제에 관한 또 다른 사서가 존재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이런 이설을 내세우는 이도 있다. 비류는 산동반도 미추홀에서 건국했으나 강적의 침범이 잦자 온조를 한반도에 파견했다. 온조는 신민들을 나누어 바다를 건너 한반도 정착에 성공했다. 비류백제는 강적들에게 밀려 요서지방으로 북상했고, 온조백제는 분립에 성공하여 비류백제의 통제를 거부하고 본국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뒤 비류백제는 멸망하여 일부는 왜열도를 개척하고 일부는 온조백제와 합류했다. 이런 사실이 400년 뒤인 근초고왕 30년에 박사 고흥(高興)이 최초의 백제사인 를 편찬할 때에 양 백제사를 뒤섞어놓는 바람에 오늘날과 같은 혼란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있지도 낳았던 ‘하북 위례성’이 느닷없이 나오는가 하면, 온조가 충남 직산(하남 위례성)에서 ‘북쪽의 강적 말갈’의 침범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어 보다 더 북쪽의 하남인 서울(한성)으로 천도했다는 앞뒤가 안 맞는 주장도 나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사학자가 아니고 이 책은 전문적인 역사연구서도 아니다. 따라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숱한 백제사의 미궁은 고명하신 사학자들의 숙제로 넘기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걸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백제의 국모 소서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이 정도로 소개하는 것으로 본편의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출처; (책이있는마을)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