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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계절 - 5편

이준희 |2006.11.11 15:56
조회 29 |추천 0

* ‘안녕.’ *


이제 이곳에서의 마지막 저녁이 흘러가고 있다.

혜린이와의 저녁 약속을 했었다. 레스토랑 ‘파티오’에 8시 예약이었다.

묵고 있는 호텔과 가까운 거려였기에 느긋이 준비를 한다.

오늘도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종아리가 당긴다.


‘준희라고 그랬지?’


잠깐 동안의 대화였지만 귀여우면서도 당당한 구석이 있는 느낌이었다.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눈부시다.

둥그런 원형탁자에 유리와 조명이 어울어진 돔형식의 천정

정면에 배치된 무대에서 특별 디너 음악회까지 열리고 있다.

은은한 라이브 클래식을 들으며 앉아있으니 마치 공주가 되어있는 기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완전히 정리하고 잊은 거야?”


혜린이는 걱정되는 빛으로 위로하듯 물어온다.


“뭐 벌써 6개월이나 지난 일인걸....... 

 그리고 이제 잊었어. 그리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이 곧 까지 떠나왔던 거잖아.”


“그래도 둘이 사귄게 벌써 5년이나 됐었는데... 난 너무 놀랍다. 선배가 그럴 줄은 생각도 못해봤어......”


“그 사람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 사람도 힘들었을 거야.

 나는 다 이해하고 있어. 그리고 미워하지 않을 거야.“




율이와의 사이가 갑자기 서먹해 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 겨울부터였다.

몇 주째 연락이 뜸해지더니 벼르고 벼르던 겨울 여행을 취소하자는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아주지를 않았다.

문자도 메일도 모두 허사였다. 

찾아가보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찾아가서 선배의 눈앞에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라는 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전부터 조금씩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잦아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수경에겐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 전화가 왔다. 바쁘게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었다고. 미안하다고. 




율에게는 사랑보다는 야망의 유혹이 더욱 강하게 다가 왔다.

입사 후 승승장구하던 율이었다.

정확한 일 처리와 군더더기 없는 마무리 까지.

일찍 그의 능력을 알아봤던 그룹 관계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입지는 굳어져간다.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귀빈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룹 창립 40주년 기념 파티다.

TV에서만 보아오던 정・재계 주요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축사와 축하 행사가 이어지고 곧이어 만찬이 벌어진다.

그룹 총수 박회장이 율이를 부른다.


“어서 오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율이를 불러 와인잔을 부딪힌다.

평소 근거리에서 모셔오던 회장님이라 부담은 덜했지만 사적인 부름에 조금은 떨려온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하하. 자네들 같은 능력 있는 사원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걸세. 고생한 건 자네들이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묻는 박회장이었다. 


“자네 입사한지 이제 2년이 다 되가던가?”


“예 곧 그렇게 됩니다. 회장님.”


“그래 그래. 자네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젊었을 때 생각이 나곤 한다고. 하하하.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네.”


“네 회장님.”


박회장은 율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룹 역대 최고 성적으로 입사한 율이의 자질과 그간 옆에서 지켜봐 온 능력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박회장의 옆으로 박회장의 외동딸 윤정이 다가섰다.

몇 번인가 회장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자네 내 딸 윤정이와 안면이 있었던가?”


“네 회장님 사내에서 몇 번 인사는 나누었습니다.”


윤정과 목례로 인사를 나누며 답했다.


“그래 두 사람 즐거운 시간들 나누고 있게. 나는 또 손님들께 가봐야 하니 말이야.”


돌아서는 박회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윤정과 남게 되었다.

그녀와의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율이의 인생은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율이와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경이 느끼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가.......




이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내다보는 거리의 불빛이 흐릿해져간다. 

이제 외롭지 않겠다고, 이제 약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책장 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곡선이 흘러가고 있었다.



작업실에 앉아서 멍하니 캔버스를 응시하는 눈빛은 어제 오후의 그림자를 찾아 초점을 잃는다.

새로 꺼낸 바탕칠을 해놓은 캔버스다.

지금껏 그려오던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부드럽고 검은 머릿결과

거기에 어울릴법한 앙증맞고 귀여운 작은 얼굴.

작고 도톰한 입술에 하얀 앞니와 크고 귀여운 눈망울을 그려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 시각 수경은 창 밖 눈 아래에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다.

손을 뻗으면 하얗게 떠가는 구름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는 놓아 주려 한다. 이제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바르르 떨리는 눈썹과 함께 작게 속삭인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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