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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C] 자위행위를 끊기 원하는 크리스천들에게

박민진 |2006.11.12 08:58
조회 11,796 |추천 7

자위행위 자체가 사실 현재의 청소년과 청년, 그리고 이미 기혼의 크리스천들에게 까지도 심각한 문제와 좌절감을 심어주고 있으며 그로 인한 극심한 죄책감에 자해하는 이들까지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직시하는 것 가체를 꺼리기 때문이지 사실이다. 미국의 20세기 중반의 통계를 보아도 이미 그 당시에 남성의92%가 자위를 경험하고 여성의 70~80%가 자위를 경험했다는 통계를 볼 때 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더욱 개방적(정확히 말하자면 개방적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으로)이 된 이 시대에는 이 압도적인 수치를 더욱 압도하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일을 끊기 원하는 특별히 수많은 성숙한 크리스천 청년들과 아주 실제적이고 적용 가능하며 어쩌면 이전의 텍스트적인 나눔과는 다른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용어의 수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느낀다.


자위행위를 영어로는 ‘masturbation’이라고 하는데 이를 표현하는 두 가지 우리말이 있다. 첫째는 흔히 알고 있는 ‘자위’이고 둘째는 ‘수음’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자위는 ‘스스로 자(自)’에 ‘위로할 위(慰)’로 masturbation 자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음은 ‘손 수(手)’에 ‘음란할 음(淫)’을 써서 종교적인 윤리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masturbation이라는 사실 자체를 전 근대적 사회에서는 ‘눈살을 찌푸리는 행위’라고 인식했고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지옥에 떨어질 죄악’이라고 비난했지만 이런 사실들을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음탕한 생각과 함께 수반될 수밖에 없는 masturbation은 죄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옳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자위를 수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겠다. 그러나 만일 글의 제목에서 자위를 왜 수음으로 쓰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나는 이에 대해 사람들의 masturbation에 대한 인식이 수음보다는 자위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수음행위를 끊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나누어 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현실 적용적일 것이다. 나는 결코 내가 할 수 없고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지워줄 생각이 결코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먼저 오픈하고 나눔으로 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첫째는 인정의 단계이다. 우리는 ‘중독’이라는 말을 정신병원이나 판자촌 같은 데서 약물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쯤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중독이라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보게 되는 포르노나 사진들을 자신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신이 만일 그런 생각으로 이런 일을 주기적 혹은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면 당신의 가장 빠른 치료를 위해 스스로가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수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일이 반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중독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독은 치료가 가능하다. 따라서 중독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까지 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가 자신이 수음에 중독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된다. 따라서 이것은 죄를 인정하므로 용서받은 단계와 유사성을 가진다.


둘째는 생활 습관의 영역인데 여기에는 나누어야 할 세부 사항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습관적으로 성기에 손을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다. 남자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는데 남자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성기에 손을 갖다 대는 버릇이 있다. 이것은 꼭 수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무의식중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으로 만지고 긁는 등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이나 청년 이상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어린 남자아이들도(아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자주 자신의 성기에 손을 대고 만지작거린다는 것은 아이를 키우거나 주위에서 보아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들이 특히 혼자 있는 상황에서는 수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전이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성기를 만지는 행동은 의지를 드려서 끊어야하는 영역이다. 혼자 있을 때는 특히 더 의지적으로 손을 성기에서 멀리 둘 것을 권한다. 기억하라, 가려워서 만지는 것이 아니라 만지니까 가려운 것이다.


둘째는 늦은 밤 하염없이 TV채널을 돌려대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의도가 불순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케이블 TV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대에 어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늦은 밤 TV채널을 돌리는 것이 해로운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TV에 흥미가 없어지는 시간이 나의 취침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간을 타인에게 맡겨버리는 수동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이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우리의 시간을 디자인할 수 있다. 둘째는 음란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처음 볼 때 성전 높은 곳에서 그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본 것처럼 의도적으로 채널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라도 우리는 이러한 유혹의 루트를 철저히 차단해야한다.


셋째는 결혼하면 모두 해결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하면 우리의 모든 성적 만족과 욕구가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결혼관련 상담 책들을 읽어보면 성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남녀의 의식 차이가 생각보다 큰 것을 알 수 있다.(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남자의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보면 이런 사례가 소개된다. 한 사모가 상담가를 찾아갔다. 이유는 목사인 남편이 자신과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 침대 옆에 있는 포르노 잡지를 본 후에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 것 때문이었다. 사모는 계속에서 남편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목사인 그의 남편은 결코 그것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코 목회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러한 예를 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목회자들조차 이런 성적 유혹이나 중독에 빠져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신앙과 성적 죄악의 문제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성의 돌파구나 탈출구가 아니다. 물론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장시간을 가족 간에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든지 아내가 임신해 있는 경우 그럴 수 있다. 실재로 한 아이를 둔 남편 되시는 분께 아내가 임신해 있을 때 남자들은 성적인 욕구들이 쌓이게 되고 성매매의 유혹들을 많이 받게 된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따라서 결혼 전에 성적 방탕함을 정리해야만 결혼 안에서도 건강한 성 생활을 누릴 수 있다.


넷째는 목표를 정해서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이루는 생활습관을 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남자들의 경우에 더 유리한데 하루의 스케줄을 짜고 해야 할 목표를 세워 일에 집중하게 되면 여성에 비해 성적 유혹에 더 쉽게 쓰러지는 남자일지라도 일 중심적이라는 강점을 딛고 성적인 생각들을 이기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남자는 한 가지 일 밖에 집중하지 못함을 기억하자.


다섯째는 영적 멘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수음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고민하고 경험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렇다고 경험이 없는 사람이 수음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가서 도움을 청한다면 요청 받은 그 사람 또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노력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 코칭해줄 영적 멘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믿음의 소그룹에서 오픈하여 나눌 때 우리는 진정한 교제와 서로 안의 도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건강한 청년들의 경우 이런 소그룹을 이용해서 서로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체크해주기도 하고 운동을 통해 이런 욕구를 다른 방식으로 발산하는 것을 돕기도 하는 예를 볼 수 있다.


한 가지 사례만 소개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이 또한 [모든 남자의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소개 된 사례인데 교회의 한 청년이 자위행위에 빠져 있었다. 목사님과 이미 이 영역에 있어서 나눔이 있은 상태였고 목사님은 그것을 끊을 것을 강력하게 동기부여 했다. 그러나 그는 수음에 이미 중독되어 있었고 쾌락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청년이 목사님을 다시 찾아왔다. 처음에 그는 상상속의 여인과 수음 통해 간음죄를 범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수음을 할 때 상상하게 되는 상대가 동성인 남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제 서야 자신이 얼마나 성적 죄악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고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었다.


기억하라. 수음은 분명한 죄이다. 이것을 끊지 않고 이와 함께 올 수 밖에 없는 다른 성적 자극 요소들을 당신의 삶에 들여 놓기 시작한다면 처음에는 너무도 쉽고 작게 보일런지 모르나 짧은 시간 안에 당신의 음욕과 더 심각한 성적 죄악의 형태로 당신은 지배당할 것이다. 그 때 부터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다 강한 자극, 더 변태적인 자극을 찾아 당신을 끊임없이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이를 잠언에서는 소가 포주(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비유했다. 지혜의 책인 잠언의 5, 6, 7장이 성적인 죄악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천 청년들은 성적 순결을 위해 자신의 몸을 다스리고 훈련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분명히 끊을 것은 끊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글이 거룩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나로서는 더 한 기쁨이 없다.

추천수7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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