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쿠스틱 기타 홈페이지(목향)에서 글을 찾았습니다.
쳇과 토미의 이야기 입니다.
토미 엠마누엘이 6살일 무렵,
광부일을 그만 둔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로 이루어진 밴드를 이끌고
호주전역을 돌아다녔었다.
네째였던 토미를 포함한 그의 6남매들은 아버지가 마련해준 차에서
매일밤을 보내야 했고, 토미는 밴드에서 세컨드기타를 맏고 있었다.
공연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그날 저녁을 위한 빵과 우유를 위해서도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가 열한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우상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쳇 앳킨스 아저씨, 아저씨는 저의 우상이에여...저두 기타쳐여.."
몇주가 지난 후,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토미에게 편지가 한 장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짐을 내려놓고 방에 가보렴. 침대위에 깜짝 놀랄만한 것이 있을거야. "
그것은 갈색종이에 쌓인 소포였다.
미국의 우표가 찍힌. 콩닥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소포를 열어본 토미는
친필싸인이 된 사진과 한장의 편지를 발견한다.
"토미군, 나는 저 멀리 호주까지 나를 알고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정말 감동스럽군요. 가족들에게 고운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러나 둘 중 아무도 먼 훗날 그들이 마치 가족과도 같은 관계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랴.
토미가 쳇 앳킨스를 들은것은 1962년경 어느 날 라디오에서였다.
비록 그는 7살이었지만 위대한 대가의 테크닉과 감정을 어린 기타리스트는
본능적으로 느껴버렸다.
하지만 호주에서 쳇 앳킨스의 음반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
10살이 되어서야 토미는 그의 음반을 선물받을 수가 있었다.
앨범의 커버를 보는 순간에야 토미는 쳇의 기타주법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바로 일반적인 피크가 아닌,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피크를 사용하는 것.
이것을 사용하여 마치 피아노 연주자와 같이 엄지(왼손)로 베이스를,
나머지 손가락(오른손)으로 멜로디를 연주함으로서
마치 두명이상의 기타리스트가 동시에 연주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1966년 아버지의 사망이후, 밴드는 해체되었고 남매들은 정착하여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의 가족은 시드니 서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를 갔고,
쳇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토미는 Trailblazers라는 밴드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고,
틈이 날때마다 그는 쳇의 음반을 들으며 그의 스타일을 익혔다.
토미가 17살이 되었을때, 그의 친구 한 명이 토미 몰래 데모테잎을 만들어
쳇에게 보냈고, 쳇은 그의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의 데모는 정말 마음에 듭니다.
언젠가 그가 미국으로 와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2년 후, 토미는 스튜디오 세션맨으로 일하기 위해 시드니로 옮긴다.
첫 녹음이 끝난 후, 토미에게는 끊임없이 일이 들어왔다.
아무도 그처럼 완벽한 핑거스타일의 기타를 하는 연주자가
호주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당시 그는 정말 쳇 앳킨스의 음반에 미쳐 있었고 끊임없이
그의 노래를 듣고 따라하고, 꿈꿨다.
1980년, 토미는 미국 컨츄리 음악의 성지, Nashville로 향한다.
호텔에 들어간 그의 방에서 울리는 전화.
"헬로우 토미!! 지금 자네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네." 쳇이 말했다.
"내방에 놀러오지 않겠는가? 같이 연주도 좀 하구말야."
토미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우상 앞에서 연주를 했고, 쳇이 동참했다.
둘은 몇시간이 지나도록 연주를 계속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마치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감상에 빠집니다.
사실은 그를 알고 있는 거지요.
왜냐면 그의 존재가, 영혼이 벌써 음악에 들어 있으니까요."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말한다.
호주로 돌아온 토미는 이미 유명한 세션맨이었고,
에릭 클랩튼, 스티비 원더와 같은 인물들과 녹음을 하며 명성을 쌓아 갔다.
토미가 마침내 솔로 앨범을 내고 자신의 밴드들과 활동하고 있을때,
쳇은 토미에게 전화를 걸어 듀엣을 제안하고, 토미는 바로 내쉬빌로 날아가
자신의 앨범 The Journey를 위한 곡을 그와 함께 녹음했다.
서로의 앨범을 위한 몇 번의 스튜디오 녹음이 지난 후,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둘에게 제안했다.
듀엣앨범을 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앨범의 이름은
"The Day Fingerpickers took over the World".
토미는 쳇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개인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고,
토미에겐 곡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쳇은 이미 그때 뇌종양을 가진 상태여서 기력이 별로 없었어요.
곡들을 될 수 있으면 한 테이크에 가야했죠." 토미는 훗날 회상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토미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타리스트 중의 한 명이다."
쳇은 이 앨범의 감사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와의 공동작업은 나에게 음악인으로서 가장 흥분된 일중의 하나였다."
그 이후 쳇과 토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많은 사안에 관해 공통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아갔다.
" 정말 그다운 것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한다는 거죠.
식당의 점원이던, 집배원이던, 아님 대통령이던지요.
정말 그래요.. 음악보다 인간으로서 그에게 배운 점이 더 많은 거 같거든요. " 토미의 말이다.
1999년, 쳇 앳킨스는 토미에게 C.G.P.(Certified Guitar Player)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쳇은 다른 기타리스트들에게 이런 명칭을 부여할 정도의 위치에 올라 있었고,
쳇에게 이 명예를 부여받은 이는 전세계에 현재에도 4명뿐인 것이다.
쳇이 더욱더 쇠약해져 갈 무렵, 토미는 그의 집에 불려간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한명이었다.
2001년 6월 중순 토미가 그를 방문했을 무렵, 77살의 전설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손을 얹고 말했죠.
우리가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내가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요.. "
그도 힘든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답했다.
그가 쳇의 집을 떠나고 두 시간 후, 토미는 그의 간호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집을 떠난후, 쳇이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과 함께.
2001년 6월 30일, 쳇 앳킨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 시간에 토미는 잉글랜드를 순회하며 공연중이었고,
그가 전화를 받은 것도 무대위에 올라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무대뒤의 분장실로 가서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지금 나가서 연주해야 한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리곤 그는 쳇과 함께 녹음했던 곡들을 연주했다.
관중들에게 지금 한 명의 전설이 쓰러졌다는 설명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The Fingerpickers took over the world"를 들었죠.
듣고 또 들었어요. 그제서야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어요.
쳇은 그런 나에게 바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고,
또 아들이 없던 쳇에게 나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지요."
그의 가족사와 장례식이 겹치는 관계로 그는 쳇의 관을 들지 못했다.
며칠 후 토미는 꿈에서 쳇을 보았다.
쳇은 건강하고 밝게 보였고, 토미에게 말했다.
"무척 좋아. 모든 게 잘 될거야..토미." 그리곤 그는 달려갔다.
토미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리.
꿈에서조차 그의 우상은 그를 앞서갔던 것이다.
토미와 다른 모든 그에게서 영향받은 기타리스트들을 뒤에 남겨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