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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궁을 폭파하라! 여류비행사 권기옥!!

차효원 |2006.11.17 22:12
조회 162 |추천 1

 

천황궁을 폭파하라!  여류비행사 권기옥!!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1917년 5월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날개의 꿈을 키운다.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시절 3.1운동 참여와 비밀활동으로 멸치배를 타고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두 군데 항공학교에서 여자라고 입학을 거절당하자, 그녀는 임시정부의 추천서를 품고 직접 멀고먼 운남으로 향한다.

 

1923년 12월 하순 운남에 도착한 권기옥은 성장인 당계요를 찾아가서 직접 담판을 지어서 입학을 허가받는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성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 것이다. 마침내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여 자랑스러운 윙 배지를 달게 된다.

 

1928년 북벌전쟁에서 승리한 국민혁명군이 손정방 군벌의 항공기를 접수하여 공군 창설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기옥은 상해로 가서 중국 공군 비항원으로 임명받는다. 여기서 권기옥은 당시 손전방 공군의 비행사로 있다가 국민혁명군에 합류한 최용덕 비행사를 만난다.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은 1932년 상해를 공격한다. 상해전쟁이 터지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서 일본군에 기총소사를 퍼붓는다. 기옥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어 전면전이 되고 중국이 승리하면 조선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나약한 장개석 중국 정부가 만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정전협정을 맺자 권기옥은 통탄한다.

 

1935년은 비행사로서 권기옥이 꿈에 한껏 부풀던 해였다.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 부인이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청년들이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자 고심 끝에 여류비행사의 선전비행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까지 날아가는 화북선, 화남선,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일본까지 날아가는 남양선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상해에서 선전비행의 연습과 실무가 착착 진행되었다. 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을 일본 폭격으로 장식하겠는 뜻을 세우고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에서 대학생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권기옥은 육군참모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한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와서 정착하자 권기옥은 임정인사들과 빈번하게 교류한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선전부장을 맡는다.

 

1943년 여름부터 권기옥은 중국군에서 비행사로 활동하던 동지들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한다. 이 계획은 2년 후인 1945년 3월 임정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1945년 봄 권기옥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이제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리라던 19살 이후 20년간 품어온 꿈이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조국 진공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 권기옥은 힘차게 날개짓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권기옥은 조국으로 돌아와 최용덕, 이영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가 된다. 최용덕 장군이 공군창설의 아버지라면,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서 공군창설을 도왔던 권기옥은 ‘공군의 아주머니’로 불렸다.

 

 

평양(平壤)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의 부인이다. 평양 숭의학교(崇義學校) 졸업반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3주일 동안 구류되었다. 그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인 김순일(金淳一)·김정직(金鼎稷)·김재덕(金在德)·임득삼(林得三) 등과 임시정부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8월 광복군총영의 대한청년단연합회 소속 문일민(文一民) 장덕진(張德震) 등을 도왔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 접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 여자전도대장으로서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비밀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9월 상하이[上海]로 탈출,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 추천을 받아 윈난[雲南]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고, 1925년 중국군 혁명 장군 펑위샹[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복무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 북벌(北伐) 때 최용덕(崔用德)과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가담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으며, 1928년 5월에는 난징[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충칭[重慶]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는 김순애(金淳愛)·방순이(方順伊)·최선화(崔善燁)·최애림(崔愛林)· 최형록(崔亨祿) 등과 충칭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 사교부장(社交部長)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광복 후인 1949년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ㅡ오마이 뉴스 정혜주 기자(기사출처 공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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