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 그리고 실망
누구나 어떤 영화를 보기에 앞서서
그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가진다.
그 기대치란 실로 굉장히 관념과 물질사이에서 방황하는 개념이라,
사실 영화의 진정성을 약간 벗어난,
혹은 빗겨간 상태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따라 관객들이 그 영화를 보고
‘기대치에 달하지 못했다’며 실망이란 감정에
조금은 억울해 할 때도 분명한건 ‘잘못된’ 기대치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기대치를 모두 채울 영화는 그리 흔하지 않다.
어쩌면 ‘기대’란 그 뒤에 이어져있는
실망이란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장치일 뿐이기도 하니까.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치를 배신했던 태풍.
그리고 기대이상의 호응을 이끌어낸 왕의남자와 킹콩.
이 세영화의 기대치는 어디쯤이었기에,
어떤 영화는 ‘실망했다’는 소리 밑에 깔려 숨 못 쉬고.
어떤 영화는 ‘기대이상이다’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함에 소리치는 것일까.
분명한 건 세 영화의 기대치가 아마도
약간씩은 혹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왕의 남자’는 제목부터 아예 까 놓고
시작하는 퀴어적 코드와
한 번도 우리나라의 그 많은 영화중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광대놀이’를 다뤘다는 점,
광기어린 왕으로만 표현되고
자신의 욕망에 거짓이 없었던 여인으로
대변되던 ‘장녹수’의 관계를 재조명 했다는 것까지.
어느 하나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의 카피였고 큰 타이틀이었으며
그것이 영화가 말하려 했던 것이었다.
또한 이전의 시사회를 보고 왔던 사람들이나
영화잡지사의 기자들조차
‘2005년 12월의 끝자락에 2005년 최고의 영화 나타나다’고
누구 할 것없이 소리치며
별 다섯 개짜리 ‘참 잘했어요’를 쾅쾅 찍어대며
그 기대치에 기름을 들이 부었다.
할 수 없이 ‘왕의 남자’란 영화는 ‘한국영화 일보 전진하다’란
화려한 감상평 아래 처음부터 여유스런 미소로 일관했고,
결국은 그동안의 대중에게 언제나 먹혀들었던
절대적인 ‘민족주의적 코드’를 내던지고
‘개인주의’와 대립하는 측면으로만
재조명했던 ‘청연’을 따 돌리며 현재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왕의 남자’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나도 몰랐는데, 내가 일생껏 제일 감명 깊게 봤었던
‘트루먼쇼’나 ‘쓰리몬스터’에 버금갈 만 했었나 보다.
모든 사람이(이건 너무 과장?ㅋ 거의 대다수가) 수작이라며
박수를 짝짝치고 있는 와중에
나는 아직도 실망이란 감정에 허우적대고 있으니. 슬프다 슬퍼.
각설하고, 왕의 남자.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못하겠는
실망한 이유를 찾아나 보자.
물론 실망하고 있음에도 한번 더 보고 싶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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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남자 ]
왕의 남자는 참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영화다.
쉽게 제목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왕의 남자’가 누구냐?
또 앞서 그 ‘왕’이라는 존재 조차도 모호하다.
그거 공길이 아니었어?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화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왕의 남자라는 타이틀이 분명
공길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잡놈이 그놈 맘을 가져가는 것을 모르고...’
궁궐지붕에 달아놓은 ‘줄’로부터 이루어진
반 허공에 피 범벅이 된 눈 가리개로
‘맹인’이 됐다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 더 이상 쏟을 것도 없는
피눈물을 피범벅이 된 ‘말’로 내 지르는 목소리에
‘야 이 잡놈아!’ 하고 울먹이며 소리치는 공길.
그 바로 앞이나 혹은 영화 첫 컷 혹은
간간히 ‘내가 왕이다!’라고 소리치는 장생을
기억한다면 왕의 남자에서 ‘왕’은 장생이 될 수도 있고,
따라 왕의 남자는 공길일 것이다.
‘왕’은 그대로 연산이며 ‘왕’의 남자는 공길일 수 있고
거꾸로 ‘왕’은 장생이며 ‘왕’의 남자는 공길이다.
결국 왕이 누구든 간에 왕의 남자는 공길인거 아니냐?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진정한 왕의 남자는 처선이 아닐까 생각된다.
(처선영감 : 공길과 장생을 궁궐로 끌어들이고 결국은 자살하는 충신)
‘왕의 남자’라는 두 어절의 타이틀은 물론 퀴어적 코드로
이해될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으나 우리 역사에서의
‘왕의 남자’는 곧 신하이다.
‘왕을 가지고 노는’ 간 큰 광대 장생과 공길에게 ‘왕을 가지고 놀면서 왜 신하는 외면하냐’는 따끔한 일침을 주고,
놀이를 빙자한 날카로운 비판속에서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왕권 이 안정되기를 꾀했던 인물.
아쉬운 것은 광대를 궁궐로 이끄는 제법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기억속에 남을만큼
그 역에 비해 비중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목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고
여러 가지 관점에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은
‘수작’의 필요조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만큼 관객의 몫을 남겨두었다는 것이니 말이다.
[어려운 영화는 제발 그만!]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이 영화는
너무 많은 걸 보여주고 말하려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광대놀이, ‘광대’의 일생, ‘연산’의 아픔, ‘녹수’의 욕망, ‘장생’ 의 사랑 ....
그렇기에 주연도 네 명씩이나 되며 주연이 네 명이면
똑같이 나눠먹어야 공평하다는 조금은 낯설은(?) - 만약 다른 감독이었다면 아마도 ‘이준기 띄워주기’에 혈안이 되지 않았을까. -
그만의 논리로 인해 그 네명의 주연 중 어느 누구도 튀지 않게 말 그대로 ‘공평히’ 스크린에 등장하고, 그 캐릭터들이 담당하는 비중 역시 공평하다.
때문에 이 영화는 네 가지 인물 중 어느 누구에게나
감정이 이입되어 그만의 입장으로 영화 를 볼 수 있다는 다양성을
내재하고 있으나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기도 하다. 우리나라 영화 길어봐야 2시간이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혹은 나니아 연대기가 3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으로 짜여진 것을 봤을 때,
왕의 남자는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장면장면 사이, 혹은 영화의 흐름흐름 사이사이에
‘끊어 먹은’ 것들이 도대체 관객들이 어 디에다 임팩트를 맞춰서
영화를 봐야하는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또한 인물들의 행위의 동기도 뚜렷하지 않다.
장생과 공길은 어째서 만나게 됐는지,
둘 사이가 어떻게 진전됐는지,
연산이 왜 광기로 휘말린 인물이 되었는지,
영화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행위의 동기’가 없다는 건 그만큼 영화의 캐릭터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은 그것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영화는 임시방편으로 한 가지 모색을 하는데 그 한 가지는 영화적 리얼리즘이고
다른 하나가 ‘상징성’이다.
영화에서만 실제적이 될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예를 들면 어떻게 장생이 그 높은 궁궐지붕에다 줄을 매달았는지, 어떻게 ‘왕’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광대 놀이’에 몸을 내맡길 수 있는지 말이다.
또 상징성은,
공길이 연산에게 보여주는 인형극.
(대체로 많은 분들이 아셨겠지만 이 인형극은 동료를 죽이고 개울가에서 손을 씻는 장생과
공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그 개울가에서 손을 씻을 때의 배경음악과 인형극을 할때의 배
경음악은 동일하다.)
또는 연산이 공길에게 보여주는 인형극,
‘광대놀이’를 빗댄 인물들의 심정과 욕망.
마지막 줄을 타는 장생이 내 던진 ‘부채’등.
편집에 편집을 거쳐 압축된 ‘왕의 남자’는
어쩌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상징성과 영화적 리얼리즘으로
일관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영화적 리얼리즘과 그냥 리얼리즘을 황금비율로 적당히
조합한 ‘올드 보이’는 호평을 받았으나 영화적 리얼리즘과 상징성으로 일관했던,(이금자의 행위의 동기 또한 그다지 수긍가지 않았던 탓) 친절한 금자씨과 혹평과 호평으로 엇갈렸던 것을 상기한다면, 왕의 남자는 현명하게 그 사이를 파고들 줄 알았다는 나름대로 ‘약은’영화가 아닐까.
왕의 남자는 모든 것이 임팩트고 핵심이기 때문에
자칫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어디서 집중해야되는지 어디서 느슨해져도 되는지
모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 여기저기엔 관객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상징을 나타내는 ‘매개체’가 숨어있어 관객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이 관객의 몰입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수도 있다.
어디가 임팩트인지 모르는 관객들이 처음에는 집중해서 보다가,
결국에는 집중력이 떨어져
영화의 임팩트의 향연이 펼쳐질 때 관객들은 이미
눈을 감거나 타인과의 잡담으로 그 향연을 도외시하게 되어
결국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영화가 말하려 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만드 는 것이다.
지금 인터넷상 여기저기를 보면
왕의 남자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떠 돈다.
공길의 인형놀이가 상징하는 것이 뭐더라..
연산의 인형놀이가 뭘 상징하더라..
장생의 부채가 무얼 뜻하더라.
이 숨겨진 이야기가 영화의 입맛을 돋우는데
일조하는건 분명하지만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이 이야기는 영화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될 수 있고, 결국 그것은 관객의 공감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생각해보자.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영화관을 빠져나오고 인터넷에서도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는 관객.
억울하지 않은가?
이런 심오한 뜻을 모른 채 결국은 영화 겉 껍데기만 관람한것에 불과하니까.
제발 쉽게 영화를 만들자.
친절한 금자씨가 그렇게 외면당한 것이 장면장면 마다
너무 어려운 해석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었나?
이준익감독은 말했다.
인물들의 행위의 동기와 그 시절 궁안의 정치상을 설명하려면
러닝타임 3시간으로도 부족할 것이라고.
그러기엔 자기들 제작비가 모잘랐다고.
허허 웃으며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그 뒤에 뭔가 아쉽고 처연한 건 왜 일까.
어쨌든 이영화를 보려면 적어도
연산에 대해서는 알고 가야할 것이다.
관객의 준비성을 요구하는 영화, 왕의 남자.
쓰리몬스터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도대체 피아노에 여자 묶어놓고 손가락 잘라내는 이야기로 30분을 어떻게 채우나.
그리고 왜 이영화가 작품성이 제일 높다는 거야!!
그때까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작품성’이란 그냥 평론가들끼리 어려운 것 나오면
좋아라하고 붙여주는 멍에라고.
그리고 내 친구 노트북에서의 30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난 멍했다.
영화는 진실했고 감독은 현명했다.
길어야 2시간인 러닝타임동안 너무 많은 것을 전달하려 해
그 맥이 끊기는 수가 십상인 우리 나라 영화.
그 ‘맥’을 끊지 않기 위해서 그는 ‘30분’을 선택한 것이었다.
실미도에서 김일성의 목을 따내려고 북한으로 떠나려는 발길을 돌렸을 때 그 ‘맥’ 또한 끊겼으며 거기서 다시 영화에 몰입하기까지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냥 그 부대원들이 북한까지 까서 김일성의 목을 따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면.
아무튼 쓰리 몬스터의 30분은 아직도 숨막히게 매력적이다.
도저히 일상생활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만한
기괴한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이중성을 세밀하게 그려냈던 영화.
아무튼 단 한마디로 일축 해 ‘너무 많은 걸 말하려 했던’ 왕의 남자는 그래서 아쉬웠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쉽지만 의미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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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뒤지다가 밤 늦게 별 짓 다한다;
예전에 쓴 요것을 발견.ㅋ
그때는 워낙 왕의남자가 화두가 되고
나 또한 영화보고 거의 패닉상태라
완전 두서 없이 써버렸다;
내가 뭐라는지도 모르면서 글 썼던듯.ㅋㅋ
그래서인지 역시 내 입장에서만 죽어라하고 써댔다;
역시 시간은 사람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만드는 듯
뭐 어쨌건
왕의남자가 관객에게 말하려 했던 것 만큼이나
나도 이 영화한테 할말 열라많다
요기에 써버린건 프롤로그 뿐일 정도니까
뭐 할말 다한거지
이거 보구 좀 있다가
이게 태극기 이겼다그래서 완전 더 패닉상태였었다
뭐 물론 이 영화에 원빈과 장동건이라는 샤방샤방 꽃미남이
존재하지 않는다던가 (이준기는 내 기준에 맞췄을 때 열외다;)
빵빵한 감독이라든가 출연진, 뭐 스텝들이 없어서 놀란건 아니다
그냥 왠지 이건 아니다라는 막연한 생각
뭐 아마도 흥행에 기본적 요소였던
민족주의적 시각이 없었던
조금은 전과 다른 패턴의 이질감 때문이었겠지
또 횡설수설한다;;
아 근데 왜!! 이게 이준기의 영화니!!!
열받아서 시사회때 강성연 사진으로 할려다가
그건 너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저 포스터 사진으로 결정( 근데 강성연 너무 이뻤따.ㅠㅠㅠ)
근데 저것도 이준기가 제일 크게 나왔다;
기자분들 제발 이러시지 말라구요
나 이준기한테 아무감정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