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독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막 2장
Past
중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시은이는 보호자들 사이에 서 있었다. 호적상에는 스물이었고, 실제 나이는 열 여덟이었지만 발육이 부진한 아이처럼 마른 데다 키마저 작아 열서너 살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은이는 의례적인 절차에 의해 진행되는 입학식을 시종 일관 진지한 자세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환한 미소를 머금고 단풍잎 같은 손을 들어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교장 선생님 말씀 정말 좋다, 그치?"
지루한 식이 끝나자 시은이가 다가오며 물었다.
정우는 교장의 훈시를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단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았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함께 참석했더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응, 좋더라."
시은이의 진지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정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은이가 주인집에서 빌려 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혼자 찍기 미안해서 시은이도 몇 장 찍어 주었는데 렌즈를 통해서 보니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고 중국집으로 가서 자장면을 먹었다. 시은이는 자장을 입가에 잔뜩 묻히고는 까르르 웃으며 연신 수다를 떨었다.
"야, 너네 담임 선생님 대게 무섭게 생겼더라! 호랑이와 사자, 아니 호랑이와 곰 사이에서 태어난 새로운 인류 같아."
시은이의 목청이 컸는지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누나가 아니라 영락없는 여자 친구로 비칠 것 같았다.
"너도 장사를 해 봐서 알겠지만 잘 되는 시기가 있어. 공부도 마찬가지야! 공부해야 할 시가가 있는 거야. 그 시기를 놓치면 공부하기가 몇 배 힘들어져.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이제부터 공부에만 전념해. 너 하나쯤은 이 누나가 충분히 책임질 수 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은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누나 마음은 알겠지만 그럴 수는 없어!"
정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공부를 한다는 핑계하에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시은이에게 고스란히 떠넘길 수는 없었다.
"나도 조금씩은 일을 할 거야!"
"너는 이제부터 공부가 일이야."
"아냐! 공부하면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어. 내일부터 우유 배달이라도 할 생각이야."
시은이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펄쩍 뛰다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한발 뒤로 물러섰다.
"좋아! 그럼 우유 배달은 우리 둘이서 하자. 대신 너는 내가 장사할 동안에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거야. 어때?"
"좋아!"
정우는 머리를 끄덕였다.
길거리에는 틈틈이 공부를 했는 데도 검정고시에 붙었으니 새벽에 우유 배달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 공부한다면 반드시 반에서 5등 안에 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생각처럼 진행되지는 않았다. 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일하기가 날이 갈수록 귀찮아졌다.
시은이는 밤 늦게 장사를 하고 돌아와도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그러나 정우는 새벽에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시은이가 흔들어 깨우면 마지못해 일어나기는 했지만 다시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우유 배달은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우유 배달을 빼먹는 횟수가 차츰 늘어갔다. 자는 척하고 있으면 시은이가 두세 차례 흔들어 보다가 포기하고는 혼자서 배달을 나갔다.
처음에는 자책감도 들고 시은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죄의식은 조금씩 무뎌져 나갔다.
정우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 도서관에서 공부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전자오락실이나 만화가게에서 보낼 때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슷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친구들과 놀다 보니 돈이 필요했다. 그러기는 싫었지만 가끔씩 시은이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참고서를 사야 한다거나, 적당한 명칭을 붙여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돈이라 하면 시은이는 군소리 않고 주었다. 더러 수중에 돈이 없는 옆집에서 꾸어서라도 기어코 손에 쥐어주었다.
평상시에는 공부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나 시험 때가 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은이에게 보여 줄 성적표 때문이었다. 성적표는 시은이가 정우의 보이지 않는 생활을 측정하는 유일한 잣대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시은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정우는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밤을 꼬박 새며 벼락치기를 했다. 죽어라 공부를 해 가지고 시험을 보지만 성적은 항상 20등 안팎이었다. 그 이상 크게 오르지도 않았고 그 이하로 크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성적표를 갖다 주면 시은이는 너무도 좋아했다. 입이 귀를 잡아먹을 듯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우야, 네 밑에 자그마치 설흔여덟 명이나 있어! 야, 얘네들 정말 걱정된다, 걱정돼!"
[KIESBEST]
키 - 베 - 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