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독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막 4장
Past
시은이는 스물두 살 되던 해 봄에 맞선을 보았다.
중매쟁이는 노점상 건너편에서 약국을 하는 오십대 초반의 약사였다. 시은이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는데 요즘 사람답지 않게 순수해 보여서 조카를 소개해 주는 거라고 했다. 시은이는 내켜 하지 않았지만 약사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만나기로 했다.
"정우야, 미안해!"
"나 시험 공부해야 하니까 빨리 와야 돼!"
"알았어. 차만 마시고 올게."
시은이가 고개를 끄덕인 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손수레에는 금세라도 피를 뚝뚝 흘릴 것 같은 붉은 장미가 가득 실려 있었다. 정우는 무료해서 장미 한 송이를 집었다.
벌레 먹은 이파리도 떼어내고, 가시도 떼어내며 꽃을 손질하고 있는데 여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뒤를 돌아보니 청바지를 입은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네들이 마치 자신의 흉을 본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젠장! 괜히 잘난 척했어."
정우는 시은이의 밀짚모자를 푹 눌러썼다.
장미를 손질하고 있으니 은근히 화가 났다. 선 보러 가야 한다고 잠깐만 가게를 봐 달라고 했을 때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예전에 안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한다는 사실을 창피했다.
꽃을 던져 놓고 가방에서 무협지를 꺼냈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하나뿐인 누나와 헤어져 온갖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조만간 무림의 고수를 만나서 무예를 익히게 되거나, 벼랑 같은 곳으로 떨어져 공력을 일시에 배가시킬 수 있는 동물의 내단이나 신비의 약초를 복용하거나, 전설로만 전해져 오는 무예를 익히게 될 터였다.
"정우 왔구나!"
정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만두가게 주인 아주머니였다. 배달을 가는지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모르는 체할 수도 없어서 꾸벅 목례를 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닌데도 아주머니가 목청을 높여서 소리를 질렀다.
"네."
정우는 창피해서 재빨리 대답했다. 행인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 누나 생각해서라도 박 터지게 공부해야 돼!"
"‥‥‥."
"알았지?"
"네."
"출출하면 만두 먹으러 와. 몇 개 줄게."
"고마워요."
정우가 순순히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치마를 펄럭이며 멀어져 갔다.
"쓰벌! 지들이나 잘 살지, 참견은‥‥‥."
정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무협지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정우, 왔냐?"
읽던 곳을 찾고 있는데 다시 누군가 불렀다.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돌아보니 수레에다 카세트 테이프를 실고 다니며 파는 김씨 아저씨였다. 짜증이 났지만 모르는 체할 수도 없는 사이여서 목례를 했다.
"책 보고 있구나. 공부 열심히 혀! 공부 열심히 혀서 판검사 되어 설랑 시은이 호강 좀 시켜 줘라."
"알았어요!"
정우는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버스 지나가는 소리와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박씨는 농부가 마치 소를 몰고 가듯이 바쁠 것 하나도 없다는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수레를 밀며 동대문 쪽으로 내려갔다.
"쓰벌! 내가 지 자식이야? 내가 뭐가 되든 말든!"
정우는 다시 무협지를 읽어 나갔다.
열한 시에 커피숍에서 만나 차만 한잔하고 오겠다던 시은이는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헐레벌떡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짜증이 날 대로 나 있는 터여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많이 늦었지? 미안해, 미안해!"
시은이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정우는 전대를 풀어서 시은이에게 던지다시피 해서 건네주었다. 가방을 메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호기심이 일어났다.
"선 본 남자, 어땠어?"
"그냥‥‥‥ 그랬어."
"좋았나 보구나. 지금까지 있었던 걸 보니까."
"응. 사람은 괜찮은 것 같더라."
시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시인했다.
아무래도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정우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누나‥‥‥ 술 마셨지?"
정우는 짐작으로 짚어 보았다.
"아, 아냐!"
"뭘 마셨는데?"
"헤헤! 딱 한 잔 마셨어! 하도 권해서‥‥‥."
시은이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하하, 대개 웃긴다! 선 보러 가서 무슨 술을 마셨대?"
정우는 어이도 없고 재미있기도 해서 물었다.
"미안해. 그렇게 됐어."
시은이가 붉은 기운을 없애기 위함인지 손바닥으로 뺨을 연신 문질렀다. 그 바람에 뺨이 한층 붉어졌다.
평상시에는 전혀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시은이였다. 그런데 대낮에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술을 마시더니 사건이라면 일종의 사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말 좀 해 봐!"
"지금 내 정신이 아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궁금한 게 있으면 네가 물어 봐."
"좋아! 대신 솔직하게 대답해야 돼?"
시은이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건 어때?"
"음‥‥‥ 호감이 가는 얼굴이야. 처음 본 순간‥‥‥ 끌리더라."
시은이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키는?"
"나보다 머리하나는 더 커. 176이래."
"학벌은?"
"대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그만뒀대. 엄마 장사를 도와주느라고‥‥‥."
"몇 짼데?"
"오형제 중 삼남이래."
"뭐하는 사람이야?"
"시장에서 아르바이트생 한 명 두고 옷장사를 하고 있대. 가게는 자그마한데 알찬가 봐. 사람이 성실해 보이더라."
"조건은 괜찮네! 나이가 많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그렇지?"
시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누나는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고‥‥‥ 그쪽은 어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
시은이가 장미를 들어서 멀쩡한 꽃잎을 뜯어내며 말했다.
정우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허전했다. 마치 손에 가득 들고 있던 소중한 물건을 시은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이에 누군가 하나씩 훔쳐가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 이름이 뭐야?"
"안‥‥‥ 도‥‥‥ 형."
맛있는 사탕을 아끼느라고 입안에서 굴리듯이 시은이가 천천히 말했다. 순간적으로 모욕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간다!"
정우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가방을 들고 재빨리 돌아섰다.
키 - 베 - 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