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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사회

김명훈 |2006.11.28 17:23
조회 59 |추천 0
 

 

메소포타미아 시절부터 인간은 술을 마셔왔고 술은 커뮤니케이션의 촉매제 역할로 자리매김 해왔다. 특히 현대와 같이 개인주의문화가 확산되고 사람 사이의 마음의 벽이 깊게 드리워진 사회에서 술은 서로간의 과도한 경계와 장벽을 허물고 원활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수 있도록 도와줬다. 또 개인주의 팽배해진 현대 사회에 사람들이 함께 모일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술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좋지못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술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그리고 적당히 이용할 때 술은 계속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끄는 촉매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1. 서론


무엇인가에 취해 있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학문이라던가, 경치에 취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지만, 술에 취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우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되기 마련이다. 술에 취했다는 것이 이성을 잃었다는 의미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개인을 넘어서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로 이어지면 이성을 잃고 혼란의 세계가 모여 때론 폭력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는 반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연상하기도 쉽다. 술로 인해 파괴적이며 일상생활 속의 질서에 반하는 행동이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술자리라는 것을 떠올리면 지친 일상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생각나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하고, 일의 연장선으로서 보다 쉽게 일을 처리해 나갈 수도 있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면서 외치는 큰 소리들, 술잔을 부딪치는 그 큰 에너지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친 것 같지만 술자리에선 어느새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즐기는 과정에서 어느새 어디서 생겼는지도 모르는 에너지가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술에 만취하여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도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감정을 공유하는 분위기 또한 이것을 대변한다. 다시 말해 술자리에서 나타나는 무질서와 혼돈 상황뿐만 아니라 쾌락을 즐기고, 즐거움을 향유하며, 내면의 자유를 분출하는 것 또한 일상생활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술문화는 한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살펴보고자 하는 대학문화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문화 중의 하나이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혹은 대학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술 문화가 존재하고, 또 그것이 유지되면서도 변형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번 보고서의 방향을 나름대로 잡아보았다. 그저 술에 인한 신체적 변화라던가, 그로 인한 문화들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이끌어 내고 싶었다. 음주나 음주와 관련된 상황들에서 한 개인에게 국한된 개인적 사건만을 보는 대신에, 대학이라는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음주문화를 통해서 술이 만들어낸 사회현상, 사회현상이 만들어 낸 술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술이 바라보는 대학사회, 대학사회가 바라 보는 술, 집단성으로서의 술, 술의 이중적 모습, 술자리의 영향력, 술로서 만들어 지는 또 작은 사회, 술에 의한 공감대, 술로 인해 드러나는 감정, 달라진 대학의 술문화라는 작은 주제들을 가지고 이번 보고서를 이끌어 나가겠다.


2. 술을 바라보는 대학사회


지성인들이 모인 대학사회에서 술을 빼놓고는 아마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맞는 새터(새내기 배움터)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과행사, 대면식, 동아리 첫 모임, 축제를 시작으로 4년간의 모든 생활 곳곳엔 술이 함께 한다. 대학은 술을 부정적인 의미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과도한 술로 인한 폭력과 폭언,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일년에 한 두 번은 들을 수 있는 술로 인해 사망하는 대학 신입생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면 할말이 없겠지만,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대학 문화의 감초로 술 문화를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학생활에서 술은 필요한 것일까? 그 첫째는 해방감의 표상이다. 12년에 걸친 힘든 의무교육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자유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대학생들이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술이다. 아직은 사회인으로서는 미숙하지만 당당하게 음주를 함으로써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을 맘껏 즐기게 되는 것이다. 의식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다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네모난 학교, 네모난 책상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접하게 되는 새로운 세상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자리'라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대개 대학의 술자리는 술을 마시는 자리이기 이전에 함께 하는 자리로서의 의미가 있다. 또한 대학에서 술을 마시면서 술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즉, 우리의 경우 술은 일반적으로 그 맛을 음미한다든지 자체로서의 가치를 따지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기분 좋게 마시고 취하는 술에 대해서는 불평등, 계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차이성도, 어떠한 겉모습도 술 앞에서는 무장해제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단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키고 감정을 서로 나누며 그 순간만은 서로 친밀함을 느끼는 것이다. 개인 적인 대학문화 속에서도 집단성을 요구할 때 필수적인 요소가 술인 것이다.


셋째, 자율성이 아닌 타율적인 술을 바라볼 때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문화 자체가 예절을 중시하는 대다가, 우리 나라 주도의 특징이 대작 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다 보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술을 마시거나, 자신의 주량을 넘어섰음에도 타율적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고교에서처럼 최대 2살 터울의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과 함께 할 수도 있고, 또는 나이가 훨씬 어린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혹은 모임의 성격상 이런 타율적인 성격 때문에 때로는 시비가 생기기도 하고, 갈등과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3. 대학사회를 바라보는 술


우리 민족은 술을 즐기는 민족이었다. 술은 모든 근심을 잊게 만들어 준다는 뜻에서 '忘憂物(망우물)'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주선'이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자연을 벗삼아 술을 즐기기도 했고, 집팔아 술을 마시고 삼대째 내려오는 재산을 기방에서 탕진해 버리고도 마지막 잔과 함께 허허 웃으며 털어 버리고, 술만 있다면 오밤중에 남의 묘 앞에 놓인 상석에다 술판을 벌여 마실 수도 있다. 술을 남보다 잘 마시고 즐기는 사람을 풍류한(風流漢)쯤으로 여기는 우리 술문화의 일면인 것 같다.


현진건의 에 나오는 대목을 보면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오, 이 사회라는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고. 이 조선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고.... 정신이 바로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야... 몸은 괴로워도 마음은 괴롭지 않으니까. 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꾼 노릇밖에 없어.


도저히 제정신 가지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을 술로 풀었던 것이다. 술에 기대지 않고는 세상을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음습한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대학 술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자연과 함께 하던 술자리는 어두컴컴한 닫힌 공간에서 음모와, 억압, 절망과 울분의 자리로 변했다. 옳지 못한 것을 고치고 새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젊은 피들이 보인 대학이란 공간 속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겪었다.


경제논리에 이끌려 참된 교육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대학, 썩어빠진 정치에 반하면서도

그 소리를 숨어서 낼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모습으로 변해간 것이다. 술로 인해 바라보는 대학생활은 물론 그리 밝지 못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어차피 마시면 취하는 것이 술이라면 현실에서의 현상들을 흡수해 버리는 어떤 힘 같은 것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맥에서 술에 대한 논의가 꿈과 광기, 샤머니즘 등과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다. 알코올이란 말의 어원이 "눈과 포도주의 정령을 아름답게 윤색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세계관을 변형시키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술은 어쩌면 혼란하고 불투명한 우리 사회를 읽는 하나의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4. 술의 이중적 모습


술로 인하여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손쉽게 말해서 '사람이 죈가 술이 죄지'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술이 무슨 죄가 있나, 사람이 잘못한 거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간단한 표현에서 술이 지니는 이중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술이 죄라고 이야기 할 때 술은 정상적인 생활을 해치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 술이 끼여들어서 일상의 원형적인 모습이 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술이 아니라 사람이 죄라고 말할 때는 음주라는 상황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다는 것을 뜻한다.


대학에서 술을 이야기 할 때, 쉽사리 무질서한 모습을 상정한다. 또 실제로 질펀한 술자리는 그 자체가 무질서의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흔하게 술자리의 무질서가 지니는 의미가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에는 술을 마셔대면서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출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개인의 불안정한 상태를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의 기능과 함께 사회집단에게는 그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사회의 '안전판'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우리의 술자리 역시 이와 유사한 사회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적인 기능 속에서도 우리의 경우 술자리는 서양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대학 술자리는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는 다른 사회를 위하여 기능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 말은 즉, 무질서란 자리 자체가 오히려 한국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 특이나 구체적인 사회구성을 이루지 못한 대학생들에게 술자리는 결국 공식적인 자리보다 더 괴로운 공식적인 자리일 수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상대적으로 편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술자리에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질서와는 또 다른 질서가 형성된다. 물론 술자리에서도 공식적인 관계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단순히 공식적인 관계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질서가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거부하지 못하는 질서임과 동시에 그만큼 끈적끈적한 질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도'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술자리에서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술집에 같이 들어가더라도 상석을 우선 생각하게 된다. 무조건 아무나 상석에 앉지 못한다. 술을 따를 때도 순서가 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술자리에서 많은 술을 마시고 엉망진창이 되어도 그것은 질서 지어진 자리이지 결코 무질서한 자리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주에 기대는 것은 '술자리'라는 질서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행위가 된다. 술자리에서 아무리 마음대로 행동해도 용인이 될 수 있을 때는 자신이 자리한 술자리의 질서를 인정했을 때에 한해서다. 손윗사람들 혹은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그 질서를 거부할 경우, 거부한 사람에게 술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최소한 술자리 이전에 그 질서를 따른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그 집단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을 경우에 가능하다. 신입생 환영회 같이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일 때의 술자리가 흔히 들 수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환영회 같은 술자리는 거의 난장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언제 술자리가 끝이 났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술자리가 결코 질서가 없는 술자리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환영회라는 '의무적'인 자리가 있을 때 집합적으로 집단 내에서 과음과 만취가 의례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술에 취한다는 것조차 그 질서에 편입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술자리 나름의 질서가 파괴되는 극한 상황도 생길 수 있다. 강요된 과음으로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진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하고 술자리를 같이 한 경우에 술을 통해 쉽게 친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것은 그 자리에 같이한 사람들이 동일한 질서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간이 어떻게 해서 질서 아닌 질서, 공식적인 자리보다 더 공식적이 되는 술자리 공간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일까. 공식적인 질서를 벗어나 나름대로의 또 다른 질서를 즐기기도 하고 공식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도 인정되지도 않는 파격도 즐기지만 결국은 어떤 삶을 살든지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지혜일 것이다. 물론 자유를 만끽하는 대학생활이긴 하지만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이 힘들다고 하더라고, 예를 들어 술자리와 같은 또 다른 일상을 즐기면서 삶의 폭을 넓혀가기도 하고 나를 짓누르는 힘을 이겨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술자리조차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힘과 유사한 논리가 지배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질서' 의 술자리는 이제 또 다른 권력이 비집고 들어오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5. 술에 의한 공감대


술자리 함께하기에는 그 자리에 가기까지 혹은 술자리 중간에도 구성원간의 선택, 포함시키기, 배제하기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혈연, 지연 속은 집단이기주의와 같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조직원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떠한 장소에서도 모르는 사람과 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우선 연대감이 없는 사람들과 무엇이든 함께한다는 것이 익숙지가 않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가장 손쉽게 꺼내는 말이 고향이 어디냐, 내가 아는 모모 씨를 혹시 아느냐 등의 화제를 먼저 꺼내면서 연결될 수 있는 끈을 찾는다. 어쩌면 단일민족이니 하면서 개인들간의 동질성이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살다보니 끼리끼리 뭉치기 위해서는 오히려 거기에 속하지 않는 타인들과의 차이점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모습일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동질화된 이질성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한 번 뭉치려면 이 동질성을 이질화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술자리는 이러한 모습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1차까지는 대충 넘기고, 2차에서는 어느 정도 사람들이 추려지고 3차까지 이어지면 정말 '멤버'들만 남는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 친숙한 관계임을 확인한다.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든 정말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이루어 지든 여기에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이질화된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감이 존대한다.


서양 사람들에게 포도주는 신의 피가 변형된 것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술은 바로 우리들의 피가 된다. 같이 모인 술자리에서 자작은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술 습관이다. 서로에게 술을 따르고 잔을 돌리는 것은 서로 피를 나누는 것이 된다. 술 앞에서, 술을 통해 우리는 형, 아우, 가족이 되는 것이다. 술자리에는 아무나 끼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가까움은 술자리의 횟수와 술자리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한다. 정말로 가깝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낀다. 그리고 이 느낌은 그 뒤로 계속되는 술자리를 통해서 단지 느낌이 아닌 실질적인 관계로 공고화된다. 여기서 실질적인 관계란 바로 가족과 같은 관계다. 과장된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술자리에서 서로 통하는 사이임을 느끼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될 때 술은 피가 되고 술자리는 마치 피를 나눈 가족의 모임 같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술을 통한 연대감의 확인, 바로 우리의 독특한 대학 술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6. 술집을 통해서 본 대학의 술문화


현재 일부 대학생과 청소년층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록카페는 기존 카페의 테이블 사이에 공간을 넓히고 귀청을 찢을 듯한 록음악과 사이키 조명으로 분위기를 조성해 싼값에 앉은자리에서 술과 춤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신종업고...(《한국일보》1992. 3. 18)


10 대 후반,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록카페는 확실히 새로운 형태의 문화유형이었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술과 음악, 춤을 함RP 즐기면서 동시에 이성과의 데이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이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청을 찢을 듯한 강렬한 음악, 환각적이라 할 만한 조명, 심한 노출과 기괴한 옷차림,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부킹 등으로 이미지가 박힌 록카페에 대한 인식은 유흥가 일반의 폭력, 성적 문란행위 등과 맞물려 '젊은이들을 병들게 하는 퇴폐적 공간'이라는 비판으로 직결되기도 했다. (《한겨레신문》1992. 10.27)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대학생들의 자치적인 정화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양대생들은 최근 한 달 사이에 학교 앞에 록카페 2곳이 들어선 데 이어 인근 업소들도 업종 전환의 움직임을 보이자 총학생회 주관으로 지난 10일부터 록카페 퇴치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여 1천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학생들은 대포 50명을 선발, 16일 하오 이들 업소를 방문, 서명부를 전달하고 "퇴폐·불법영업 록카페를 추방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30여 분간 시위했다. …총학생회는… 당초 허가내역대로 대중음식점으로 업태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교수와 인근 주민들로부터도 지원을 얻어 폐쇄하도록 하겠다고 경고했다. 동국대 총학생회도 생활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지난 주 학교 주변의 록카페, 노래업소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마쳤다. … 특히 총학생회는 록카페·노래방 추방운동을 대학간 연대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일 서울 남부지역 대학 학생복지위원회 대표자들의 모임에서 이 문제를 공식 거론할 방침이다. 중앙대, 숙대, 숭실대 등 다른 대부분 대학에서도 주변 록카페나 노래방에 대한 추방운동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일보》1992. 3. 18)


그런데 이러한 대학가의 자체 정화운동은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던 당시 학생운동권이 처한 상황과도 직결된다. 즉 80년대를 거치면서 대중성이 약화된 학생운동권은 자체적인 이념 구축과 조직력은 탄탄해졌지만, 소수 정예부대로 전락함으로써 변화된 시대 상황에 걸맞은 대중적인 운동대상을 모색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고, 변화된 욕구의 세계와 환경 앞에서는 역부족을 드러내었다.


한편 록카페에 대한 비판 일변도의 분위기를 제어하는 움직임도 대학가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학생회의 주도로 '신촌 문화의 올바른 자리 매김을 위한 대안 모색' 이라는 토론회가 개최된 것이다.(1992년 10월 23일 개최됨). 이 토론회는 록카페의 주요 소비자인 대학생들 스스로가 록카페에 대한 허와 실을 살펴보고 심층적인 진단을 통해 대안을 찾아본 최초의 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서 학생들은 우선 언론·행정당국 등 사회 일반의 록카페에 대한 비판이 다분히 과장되어 있고 심지어 조작된 '마녀재판'의 측면이 강했다고 실질조사 결과를 밝히고 있다.


이들 록카페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향락·퇴폐 일변도로 외래·소비문화를 무조건 추종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많은 부분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록카페가 눈맞춤→합석→춤→여관행이란 '부킹의 천국'으로 소문나 있으나 실제로 살펴본 결과 록카페의 부킹은 소문만큼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또 퇴폐란 측면에서 볼 때도 텔레비전 같은 언론매체에서 실제 이상으로 부풀린 측면이 강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토론회에서 록카페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고립성과 규격성, 기계로 상징되는 새로운 권위체계로의 복속, 자본주의 문화상품에 의한 욕구의 왜곡 등이 지적되면서, 록카페를 젊은이들의 진정한 해방구로 상정하는 데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학생운동권에서 록카페를 찾는 젊은이들을 '의식 없는 날라리'로만 폄하하지 말고 '대중'으로서 끌어안을 수 있는 대안문화 찾기 운동이 건전 문화 육성이라는 캠페인 식의 운동에 앞서 전개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한다. (《한겨레신문》1992. 10. 27)


이와 같은 항변은 당시에 학생운동권과 비학생운동권 간에 대중문화를 보는 시각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운동권의 시각은 리비스주의식의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취하는 비판의 목적은 각종 언론매체나 기성세대의 비판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보인다. 왜냐하면 기성세대의 비판은 전통고수의 목적이 담겨 있는 규범주의적 토대에서 발로하는 데 반해, 운동권의 비판은 2차원적 사유의 마비라는 삶의 본직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발로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학가의 술집에 따른 문화를 보면 다소 비판적인 경향이 강하다. 술의 부정적 모습이 반영되어 하나의 사회 현상을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져온 대학생 스스로의 반성과 개선을 통해 새로운 대학 술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7. 음주행위의 사회·문화적 요인


사람들의 음주행위는 개인적 체질이나 음주습관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관련되어 음주에 대한 가치평가, 즉 음주행위의 계기와 의미부여, 음주를 사회화하는 과정, 만취에 대한 사회적 허용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국사회는 예전에 농업국가로서 게인 주의보다는 집단의식, 공동체 의식이 강했다. 그 후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개인주의가 현대인의 삶을 주도하는 원리가 되었고 그러나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에 비해 우리 나라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괴리를 상당히 많이 느끼고 있으며 이것들이 생활 속에서 뒤엉켜 나타난다. 서양인들은 술집에서든 집에서든 혼자서 술을 즐기는 경향이 많이 있다. 자작문화가 좋은 것이 타인이나 집단적 분위기에 의해 마시지 않아서 자신이 어느 정도 절제, 통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쁜 점은 음주행위가 습관적이 되어 만성적 알코올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한편 수작문화가 좋은 점은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경우가 드물다. 술 마시는 동기가 개인의 내부에 있다기보다는 외부적 요인에 있으며 또한 내부적 동기에 의해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같이 마실 사람을 물색하고 그래도 없으면 터덜터덜 집에 오게 된다. 그래서 습관적 중독자가 서구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나쁜 점은 분위기에 의해서 과음, 폭음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술 마시기 싫을 때도 주위 사람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술을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은 한 번 술 마시면 취할 때까지 정신없이 마셔야 하고, 술자리에서 웬만한 실수나 주정은 다 이해하고 덮어두는 경향이 많다. 즉 사회·문화적으로 음주절제의 메커니즘보다는 음주만취의 메커니즘이 음주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그것이 오랫동안의 음주관행이 되어서 사람들의 음주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인은 대학의 술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자본주의 체제의 유입, 급격한 사회구조적 변동, 가치관의 혼란, 정·경 유착, 빈부격차 등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대학생들 또한 경험하면서 이러한 술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8. 술자리에서 대학생들이 경험하는 정서


술자리에는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기도 하다. 짜내는 과거가 있으며 허망한 미래가 같이 춤춘다. 즐거움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지난날의 추억에서 고통만이 현재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고통은 즐거움이 만들어내는 탄식으로 더욱 빛난다. 쾌락의 가벼움이 아픔에 희생된다. 박커스의 향연은 어느새 '한 잔의 술잔에 슬픔을 털어 넣어 버리는' 그러한 술자리로 변한다. 아니 한국인들에게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는 그러한 고통이 있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고통과 슬픔이 없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돈 많은 쾌락주의 가는 고통과 번민을 움켜지고 술에게 화풀이하는 진지한 사색주의자의 고통을 한두 가지 정도도 토로하지 못하면 이미 그 술자리는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거침없이 뱉어져 조각 조각나 버리는 타인의 한숨이나 욕지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린다. 술자리에는 없던 고민도 만들어야 된다. 자기 고민거리가 없으면 남의 고민을 받아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든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최소한 나라 걱정이나 인류의 비극 정도는 한두 마디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즐기더라도 뭔가 있어 보이는 쾌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고통이 자기 탓이 아닌 만큼 고통이 없다는 것은 결국 남의 덕이거나 남에게 고통을 떠넘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괴롭지 않은 사람과는 별 할말이 없다. 어쩌다 통크게 모든 고통을 쓴술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허허 웃거나 좌중을 즐겁게 이끌어간다 하더라도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눈물겹게 그리고 자신의 큰 가슴으로 다 떠 안고 있다는 흔적을 언뜻언뜻 내비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그 즐거움은 사람들의 가슴에 얼얼하게 저리는 연민으로 더욱더 크게 자리잡을 수 있다.


9. 결론


이번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대학의 술문화도 어찌 보면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술문화의 축소판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술자리는 오히려 어디보다도 질서 있는 자리이며, 끈끈한 연대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또 일상 속에 퍼져 있는 또 하나의 권력이 행사되는 장소이다. 당연히 술은 이러한 관계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매개물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술문화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술을 즐기는 술자리 그 자체가 외적 요인에 의해서 왜곡,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기분으로 함께 자리를 했다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만큼 마셔대는 술, 술의 과소비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 술과 함께 따라 다니는 퇴폐향락문화, 음험한 뒷거래가 이루어지는 자리, 음주의 방식에조차 배어 있는 권위주의적 군사 문화의 잔재 등 그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한 모습들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비판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 술자리를 영위해 가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냥 함께 살아가는 바로 그 모습이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든, 만취 상태의 환각적인 상황이든 서로 술잔을 나누고 함께 하는 공간을 나누고 흘러가는 시간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융해되는 그러한 모습이다. 술 취한 채로 홍등가도 같이 헤맬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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