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오후 3시의 두류공원은 하루 종일 곱게 내린 가을비에 촉촉히 젖어있었다. 새색시 볼같이 발그레 예쁜 단풍은 포도 위에 김소월의 진달래꽃같이 흩뿌려져 걷는이의 마음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한다
뿌옇게 하늘은 저만치 내려와 앉았고, 간간이 내리는 안개비를 맞으며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잰걸음으로 산책을 즐기는 연인들, 부지런히 걸으며 운동을 하는 사람, 매점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모습들,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모습이 없다.
가을비가 내리고 단풍이 지고 포도 위에 낙엽이 쌓인 거리를 거닐면 괜스래 센치하게 사색에 잠기고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의 모습이 진지하고 고독하고 겸허하고 진실되어 보인다.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더욱 인간의 깊은 심연을 무거운 무게로 짓누르는 것 같다.
나는 오늘 같이 곱게 비가 내리고 낙엽들이 깔려있는 거리를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숙연한 기분이 되어 그냥 걷고 싶다. 이런 가을날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보면 마음의 모든 찌꺼기들이 깨끗이 씻겨가는 것을 느낀다. 근심도 걱정도 명예도 부귀도 부질없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미워했던 사람도 용서할 것 같고 그리운 사람도 보고싶어진다.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도 찾아 달려가고 싶다. 가을은 이렇게 찌들고 오염된 인간들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나보다.
온 몸으로 가을비를 맞으며 초연하게 서있는 나목들을 보라!
그들은 한해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마감하고 있다, 이른 봄 새파란 싹을 틔우며 부푼 희망으로 아우성치던 철부지 시절, 짓푸른 녹음으로 뜨거운 태양을 온통 삼키겠다던 한여름의 만용 , 짙은 향기와 화려한 빛깔로 영원한 청춘임을 노래하던 꽃들, 달콤하고 풍성한 결실들 그리고 용광로처럼 활활 붉게 불타던 단풍들 ! 그들은 이제 미련, 후회, 원망도 없이 무거운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고단한 몸을 쉬고 있다. 그리고 새해 새날에의 에너지를 충전하며 더 풍요롭고 화려한 내일에의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다. 이것이 나무의 아니 자연의 위대함인 것 같다.
우리 인간도 저 나무의 위대함을 배웠으면 좋겠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일년 동안 쌓아왔던 증오, 욕심, 원망, 시기, 욕망, 중상, 모략 등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겸허히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에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꿈들을 설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결실들을 조금씩 배풀어, 비가 내려 을씨년스런 이 가을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한 줌의 따뜻한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이 가을이 아름답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저 가을 나무들의 위대함을 닮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