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17세기 외국 작가들이 써놓은 연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를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J'에게 보내는 작가의 연서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삶의 단상에 대한 치열한 감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결국 '사랑하는 J'와 연관된 메시지로 전환시키는 능력. 를 썼던, 를 썼던 작가의 작품이 맞는지 수시로 의심스러울 정도. 물론 을 쓴 작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을 한편씩 써나가면서 소위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시 한수씩을 함께 묶어두었지만, 내가 그 시에 매료된 적은 거의 없다. 나는 오로지 작가의 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와중에 조금씩 읽어내려간 책이었음에도 내 마음에 박힌 말이 그토록 많았다는 것, 그게 그걸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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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 중요한 것은 우리는 단지 살아온 삶으로 이야기한다,라는 것이지만 지나온 삶이 곧 우리는 아니라는 것.
p22 멀리있는 J, 저도 이런 사랑의 포로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다만 그대의 사랑만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그대와 내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그냥 나여도 좋은 사랑, 서로의 사랑이 서로를 자라게 하는 사랑, 그대를 더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사랑, 그런 사랑을 말입니다.
p30 한 친구는 어느날 술에 취해 제게 말하더군요. 세상에 태어나 그냥, 어느 날 밤, 문득 누군가의 손을 꼭 붙들고 도망치고 싶어해보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하지 않겠다고. 그 애달픔을 모르는 자와는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중략)
J, 짧은 사랑이라 해도 소중합니다. 약속하지 못해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차피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과 깨어져버린 것보다는 그 '처음'을 항상 간직하고만 싶습니다. 그 처음이 있어서 저는 살 수 있었습니다.
p69 제게 봄날을 되돌려준 당신, 고맙습니다.
p75 진정한 외로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온다.
p79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토머스 머튼
p83 그대가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그대가 내 귀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등을 토닥이면서 낮게 속삭이는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소나기 지나간 자리에 흙과 풀들이 몸을 섞은 냄새들이 가득 피어오르는 여름밤, 박하향의 허브 냄새들이 풍겨우는 정원으로 난 창을 활짝 열고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날 재워줬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p103,104 심심하게 앉아 천천히 책상을 정리하고, 옷장 열어서 오래된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놓으며, 책장 앞에 서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처분할 책을 솎아내다가 잊었던 양서를 꺼내들고 그 자리에서 읽어도 하나도 마음이 바쁘지 않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그래서 오래전부터 해왔던 겁니다.
p142 저 사람, 심장이 터져 죽은 거야, 너무나 사랑해서 심장이 터져 죽은 거라구. 이 세상에 사랑 땜에 심장이 터져서 죽은 사람이 또 있는 싶어서, 라고.
p163 그런데 그 젓가락이라는 것은 남을 찌르지도 않고 사물의 원형을 보존한 채로 결합하며 꼭 필요한 서로인 다른 짝을 용접하거나 고리로 짜서 얽어매지도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해냅니다. 그리고 일을 끝낸 다음에는 제각기 흩어져 자신 스스로 존재하면 그뿐입니다. 게다가 그 둘 사이에는 무한한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과 파트너가 되어 제 할일을 하면 그뿐, 신발처럼 짝이 맞지 않아 멀쩡한 하나가 버려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그 둘은 짝이면서도 자유롭습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울부짖을 필요도 없겠지요. 무심히 가고 무심히 오나 서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
p203,204 괜찮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감정은 마치 절망처럼 우리를 속이던 시간들을 다시 걷어가고, 기어이 그러고야 만다고. 그러면 다시 눈부신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고. 그후 다시 먹구름이 끼고, 소낙비 난데없이 쏟아지고 그러고는 결국 또 해 비친다고. 그러니 부디 소중한 생을, 이 우주를 다 준대도 대신해줄 수 없는 지금 이 시간을, 그 시간의 주인인 그대를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