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법사상과 혁명사상 ]
Ⅰ. 서 론
Ⅱ. 變法思想의 형성과 전개
1. 변법사상 출현의 배경
(1) 淸末 公羊學派
(2) 초기 개량주의 사조
2. 변법론의 전개
(1) 康有爲의 변법활동과 변법사상
(2) 梁啓超의 변법사상
(3) 譚嗣同의 변법활동과《仁學》의 사회정치사상
Ⅲ. 改革과 革命
1. 革命思想의 발생과 전개
(1) 두가지의 길
(2) 강유위와 손문
(3) 혁명론의 대두
2. 개혁파내의 혁명사상
3. 혁명사상의 정립 -改革派와 革命派의 思想論戰-
4. 孫文의 혁명사상 -三民主義-
Ⅳ. 결 론
Ⅰ. 서 론
청말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된 중국은 서양 열강에 의해 중국이 분할되어 식민지화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싸이게 되었다. 이른바 이 「서양의 충격」에 맞서서 ‘富國․强兵’이라는 ‘自强’의 목표를 가지고 서양의 기술과 軍備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양무운동이었다. 그러나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양무운동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고 중국내 선진 지식인들의 위기감은 그 정도를 더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국내 봉건제도 및 봉건 지배집단의 무능함에 대처하고자 하는 두 가지 기운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改革과 革命이었다.
개혁과 혁명 즉 變法思想과 革命思想은 청말 사회정치사상의 양대 조류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열강의 침입이라는 위기상황에서 ‘救亡’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이 두 사상은 결국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上書運動과 광주봉기, 戊戌維新, 자립군 폭동계획과 혜주기의, 그리고 신해혁명이라는 일련의 정치변혁을 창출해 내게 되었다.
本稿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장「변법사상의 형성과 전개」에서는 변법사상 출현의 배경으로서 청말 공양학파와 초기개량주의 사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공양학파인 강유위의 사상의 근원을 찾기 위해 청말 공양학파의 성격을 알아보고 개혁론으로 연결되는 공양학파의 조류로서 공자진과 위원의 사상을 소개하는 동시에 양무운동기에 양무사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등장한 馮桂芬, 王韜, 薛福成, 陳熾, 馬建忠, 鄭觀應 등 초기개량파의 사상을 서술하여 변법사상에 영향을 준 이론적 배경을 밝히고자 한다. 둘째로, 康有爲, 梁啓超, 譚嗣同의 변법사상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여 변법론의 전개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3장「개혁과 혁명」에서는 청말 양대 정치운동인 개혁과 혁명을 하나의 주제안에 포함시켜 그 연관성과 대립 및 이행을 밝혀보고자 한다. 첫째로, 청말 중국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두 가지 길로서 개혁과 혁명을 상정하고 손문과 강유위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데 영향을 준 환경적 요인을 살펴보고, 여러 혁명론의 대두와 전개를 소개하여 혁명사상이 개혁사상(변법사상)과 대치할 수 있을만한 위치로 부상하게 되었음을 알아보고자 한다. 둘째로, 개혁파내에 급진적인 혁명사상을 함유한 양계초의 민권,평등론과 함께 개혁파에서 혁명파로 전향한 장병린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로, 손문을 주축으로 한 혁명파와 강유위, 양계초를 주축으로 한 개혁파 사이에 ‘혁명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혁명을 하면 어떤 혁명을 할 것인가’에 대한 사상논전을 살펴보고 이를 통한 혁명사상의 전파와 혁명기운의 흥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넷째로, 신해혁명을 창출해 낸 주역으로서의 손문의 혁명사상에서 大宗을 차지하는 三民主義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의 혁명관과 혁명방법 및 실행경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변법사상에서 혁명사상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당시 변법사상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한계와 이를 대치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혁명사상의 흥기를 통해 변법에서 혁명으로 이행하였음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Ⅱ. 變法思想의 형성과 전개
1. 변법사상 출현의 배경
(1) 淸末 公羊學派
康有爲의 변법사상을 내재적으로 준비한 청말 公羊學派의 사상적 원류와 그 사상사적 推移를 검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청말 공양학파는 일명 今文學派라고도 한다. 금문학파는 古文學派와 함께 後漢이래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經學을 연구함에 있어서 依據하는 經典을 달리하였고 결과적으로 경전의 해석도 달리하게 되었다. 또 학문적인 경향을 보더라도 고문학파는 주로 訓詁, 名物, 度數에 長한데 비해 금문학파는 微言大義를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인 경향의 차이는 청조에 이르러서도 계승되었다. 즉,《春秋》三傳인《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糸染傳》에 있어서 청 고증학의 경우에는 후한의 고문학을 중시하여《春秋左氏傳》을 취한데 대하여 공양학파가 대두되면서 이들은《春秋公羊傳》을 중시하여《春秋公羊傳》에 담겨있는 미언대의를 추구하는 이른바《春秋》의 자유해석적인 학문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청말 공양학파의 祖를 莊存與(1719-1788)라고 한다. 장존여의 학문적 경향은《春秋》의 書法과 미언대의를 중시하여 청조 고증학자들의, 註에 의거한 經義의 해석만으로는 성인의 미언대의 즉 성인의 道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존여의 학문적 경향은 그 후 莊述祖(1750-1816)를 거쳐 劉逢祿(1776-1829)에로 계승되나, 그 학문적 경향이 단지《春秋公羊傳》의 미언대의 뿐만 아니라 經世致用의 學으로서 미언대의를 논거로 하여 정치적 비판과 改革論에로 전개되는 것은 龔自珍(1792-1841)과 魏源(1794-1856)에 이르러서였다.1)
龔自珍(1792-1841)의 자는 瑟人이고 호는 定庵이며, 절강성 인화(지금의 杭州) 사람이다. 그의 출신은 관료 지주 가정이었으며 저명한 한학자인 段玉裁의 외손이다. 그는 21세 때의 副榜貢生考充武英殿校隶 이후 기간에 봉건적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저작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그가 펼쳤던 이론은 아주 예리하였는데 그의 유명한 저서인《明良論》《乙丙之際著議》등은 모두 이 당시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28세 되던 해에 그는 상주학파인 유봉록으로부터《公羊春秋》를 학습하였다. 그는 청소년시대에 송대 왕안석의 개혁의지를 흠모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으며 38세(1829)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사가 되었고 장기간 동안 내각중서, 예부주사 등의 한직에 머물렀다. 1839년,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1841년 봄에 강소단양 운양서원의 講席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가을 단양에서 죽었으며 그의 저작을 편집한《공자진전집》이 있다.2)
공자진의 사상 가운에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그의 사회비판론이다. 그는 당시의 봉건사회를 고질병을 앓고 있어도 약을 구할 수 없는 환자로 보았으며 썩은 나무에서 곧 떨어지려는 꽃으로 보았고,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는 쇠퇴의 시기로 간주하였다. 그는 봉건적 전통 문인들이 당시의 사회를 미화하여 태평성대라고 하는 논조에 쐐기를 박고 현재 사람들은 이 암흑의 시대에 대하여 동감은 하지만 할 말도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청왕조 관료정치의 심각한 부패상에 대하여 공자진은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는 그의 초기 저서인《明良論》에서 당시의 봉건 관료집단은 무능할 뿐 아니라 부패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의 관료들과 봉건적 지식인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다.
공자진은 봉건 관료 집단이 부패하게 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우선 봉건 전제군주 제도에 맞추고 있다. 그는 날카롭게 “지금의 현실은 크고 작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깨뜨릴 수 없는 어떤 규율(例)에 모든 것을 묶어버리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규율은 바로 고도로 집권화된 봉건군주 전제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전제군주제의 압제하에서 관리들이 군주에 대하여 아첨과 아부만을 일삼고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古史溝沉論》에서도 “옛날의 천하를 제패한 제왕들은 다른 사람의 수치는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최고로 높였으니, 한사람은 강해졌을 지는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유약해지게 되었다”고 서술하여 신하된 자들이 염치와 수치를 잃게 된 원인을 상대적으로 찾고 있다.
둘째로, 공자진은 당시의 불합리한 과거제도에 대하여 비판하고 이러한 병폐는 봉건적 지식인들에게 과거를 자신의 신분을 높이는 수단으로만 삼게 하고 또한 그들의 언행에 진실성이 없게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번째로, 공자진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 자격을 논하는 제도”에 대하여 비판한다. 즉 “보통 처음 벼슬을 하기 시작한 날로부터 35년이 흐르면 1품 정도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도 더 빨리 승진할 수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세월만 지나면 그런 지위에 오르게 된다”고 하면서 당시의 구태의연한 승진제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는 또 현재의 관료들이 이러한 현실에 찌들어 앞뒤의 눈치만 살피고, 스스로 위축되어 수동적으로, 태만하게 현재의 지위에 급급하기 때문에 “주위의 상황을 살피면, 눈치를 보게 되고, 눈치를 보게 되면 자리에 연연하고, 자리에 연연하다 보면 시체처럼 수동적이 된다”고 하였다.3)
당시의 지주계급 개혁파의 입장에서 공자진은 봉건통치의 옹호라는 근본 관점에서 출발하여, 당시 사회에 대하여 강력하게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는 강조하여 “한 시대의 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봉건제도라고 하는 틀 안에서의 개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에서 아주 지엽적인 개량성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정치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봉건적인 규범을 수정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여 법을 토론하고, 國是를 의논하는 것과, 관리승진에 있어서의 능력제 승진, 관리등용에 있어서 四書문장 등과 같은 것으로 하지 말 것 등이 있다.4)
魏源(1794-1857)의 자는 黙深이며, 원래의 이름은 遠達이다. 湖南 邵陽 사람으로 지주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嘉慶帝 말년에 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배웠는데, 후에 공자진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사람들은 ‘龔魏’라고 불렀다. 그의 중년이후의 학문상의 입장을 보면 前漢의 今文學說을 중시하여 전한의 經說에 담겨 있는 微言大義를 강조하고 있다. 아편전쟁 발발후, 그는 양강총독 裕謙의 막부에 들어가 절강전선의 항영투쟁에 참여하였다. 또한《怪武記》를 분발 제작하여, 이 책으로 청나라 통치자로 하여금 무기준비를 진흥하여 외래침략을 억제하도록 격려하고자 하였다. 한편 임칙서의 부탁을 받고 임칙서 주편역의《四洲志》의 기초위에서 중국근대를 제1부로 하는 세계역사, 지리를 소개한 저서《海國圖誌》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출판된 후 중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중국 자산계급 개량파에 대해서 계몽적 작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전해져 일본 유신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5)
아편전쟁 전 위원은 청왕조의 대내외적 정책과 봉건통치 집단의 부패에 대해서 강렬한 불만을 품었다. 그는 당시 아편의 범람, 은의 만연 및 재정곤란, 관리의 부패, 인민의 곤궁한 상황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아편전쟁의 실패는 위원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海國圖誌》에서 모든 혈기 있는 사람이 의당 분개하는 바요, 모든 지각있는 사람이 의당 도모해야할 바라고 말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전후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을 중심과제로 삼고 일련의 방안을 제출하였다.
정치적 측면에서 위원은 아편전쟁의 주요 실패원인이 청나라 정부의 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는《怪武記叙》에서 국내의 정치궤도가 “관리가 적재적소에 배치되고”, “국경에 허술한 곳이 없다면”, “외적을 물리침에 무슨 근심이 있으리요”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인심의 누적된 근심”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그가 말한 “누적된 근심”에는 “인심이 깨이지 못한 근심”과 “인재가 공허한 근심” 두가지가 포괄된다. 위원은 “허식, 가식, 두려움, 용렬함을 버리고, 머뭇거림을 버림으로써” ‘깨이지 못한 근심’을 제거하고, “또한 현실적 사물에서 실제적인 노력을 하고, 실제적인 노력으로 실제적인 일을 할 것을 제안하여 만용을 부리지 말고 공상을 아니하는 것” 등으로 ‘공허한 근심’을 없앨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봉건 관료집단 가운데에 만연한 여러 가지 비열한 심리와 부패된 기운을 제거하고 실제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원이 제출한 “오랑캐의 우수한 기술을 스승으로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는 구호이다. 이것은 중국근대사상 가장 먼저 제기된 서양학을 향한 구호이다. 위원은《海國圖誌》를 편찬한 의도에 대하여 “夷를 가지고 夷를 攻擊하고 夷를 가지고 夷를 和하고 夷의 長技를 배워 夷를 制馭하는 데 있다. …이 書에 언급된 것은 兵器이며 兵本이 아니다. 有形의 兵이며 無形의 兵이 아니다.”6)라고 논하고 있듯이 外夷를 제어하기 위하여서는 外夷의 實態와 實情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외이를 제어할 수 있는 병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원은 무엇보다 서양국가의 “우수한 기술”을 학습하지 않고서는 외국침략자의 고도의 인식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명확하게 파악하였다. 그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외국의 오랑캐를 잘 배우지 못한 사람은 외국 오랑캐에게 제압당한다”고 하였다. 당시 완고한 봉건세력은 위원의 제안을 이른바 “이상한 기술과 음탕한 기교”, “형기의 말단(形器之末)”이라고 반대하여 이러한 학습의 진행을 거절하였다. 위원은 이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指南制는 周公이 만들었고, 絜壺創은 周禮에서 나왔으니 이렇게 유용한 물건은 기묘한 기술이지 결코 음란교사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위원은 강렬한 민족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지혜는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하여 중국인민의 총명한 재기가 서양에 뒤지지 않음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는 “오랑캐의 우수한 기술을 스승으로 삼아” 중국이 장차 부국강병하고 서양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위원은 봉건제도는 원칙적으로 유지한다는 전제 아래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배워서 중국을 강대하게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상의 한계로서 당시의 시대적 풍조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위원이 어느정도는 봉건군권을 반대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통적 忠君思想에 대하여 “죄악이 임금에게 있다면 누구든지 임금을 때려 죽여도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미국적인 연방공화제를 찬양하여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치를 하게 하고 그 직위를 세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4년마다 교대케하여 고금의 정치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평가하였다. 아울러 미국이 “각 연방마다 대표자를 뽑아서 다스리므로 그 제도가 아무리 오래 갈지라도 폐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그는 이러한 제도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이러한 제도를 실행하고자 주장한 것은 아니다. 위원이 자산계급 민주제도에 대해서 찬양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시 중국의 봉건군주전제와 거기서 비롯된 폐단에서 나온 정치현상에 대한 불만의 반영이다.7)
(2) 초기 개량주의 사조
아편전쟁 이래 태평천국혁명의 실패로부터 청일전쟁까지(1864-1894)의 30년간 서양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세력이 날로 대규모화되어 중국을 반식민지화하려는 ‘중국분할’ 경쟁은 확실히 그 이전의 外壓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청왕조의 부패성은 점점 폭로되고, 대중적 불만과 절박한 위기감은 지주계급 혹은 지식인 및 봉건통치계급 내부의 몇몇 개명한 인물사이에정치적 자각을 불러 일으켜 구 통치질서에 어떤 변혁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도 長江유역의 태평천국 잔여지부와 黃․淮지구의 捻軍 및 서북, 서남 소수민족의 반청무장투쟁이 지속되기는 하였으나 점점 약화되었다. 그러나 반침략 투쟁 즉 반기독교 군중운동의 형식은 각지에서 발전되어 갔다. 초기개량주의 사조는 이와 같은 역사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개량주의 사조는 위로는 아편전쟁 이래의 임칙서, 위원의 애국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무술시기 강유위 등의 변법유신사상에 영향을 준 19세기 후기 중국사상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조중의 하나이다.8) 여기에서 개량주의란 물론 부르주아적 개량주의를 말함이지, 단순한 전통적 개혁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편전쟁 이후 외국세력의 침입에 직면하여, 만주인 지배에 대한 反滿的 반대파를 포함, 그 당시 봉건적 지배집단의 내부에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정치적 분파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국가가 망한다 할지라도, 법을 바꾸어서는 안된다”(寧可亡國, 不可變法)고 하여, 모든 개혁에 반대한 반동적인 보수파이며, 여기에는 권력을 장악한 만주인 귀족이 그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을 ‘頑固派’라 부르기도 한다. 또 하나는 “中學을 體로 하고, 西學을 用으로 한다”(中學爲體, 西學爲用)는 것을 주장하고, 적극적으로 서양의 근대적 기술을 도입하려 했던 ‘洋務派’이며 曾國藩, 李鴻章, 左宗棠, 張之洞 등 중국인 출신 大官 및 지주가 그 중심세력이었는데, 이들은 중국의 전반적인 자본주의화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외국세력의 침입에 일보일보 타협, 후퇴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근대적인 병기로 청조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봉건적 전제주의 지배를 재편, 강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자본주의적 기계공장의 도입은 하였으나, 정치적으론 보수 반동적인 입장에 서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위 同治中興(1860년대-70년대)이 이 양무파 관료의 활동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무파는 완고파와 결합해 권력을 장악하고, 실력파를 형성했다.
이와 같은 양무파에 맞서 ‘변법자강’을 주장한 ‘변법파’는 중국의 구 정치체제 전반에 걸쳐 위로부터의 힘으로 그것을 개편하고 근대화하려고 한 부르주아적 개량주의파였는데, 康有爲, 譚嗣同 등의 개화적인 지주계급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들은 모두 외국세력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던, 봉건적 지배계급 내부의 정치적 분파였는데, 이들 모두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시민적인 革命派였다.
변법파의 사상적 계보를 따진다면 林則徐나 魏源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직접적으로 양무파의 노선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에 서서 변법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초기개량파9)인 馮桂芬(1809-1874), 王韜(1828-1897), 薛福成(1838-1894, 陳熾(?-1899), 馬建忠(1844-1900), 鄭觀應(1841-1920) 등이다.10)
그들은 전통적인 봉건문화교육을 받았으나, 한편 서양학문지식을 접해 사회방면과 문화방면의 개혁을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정치상 봉건전제제도의 근본을 저촉할 생각은 없었으며,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당시 형성중이던 극히 미약한 민족자산계급의 요구와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초기 개량파의 중요한 역사적 공헌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근대초기의 중국학과 서양학 혹은 구학과 신학의 사상문화투쟁 속에서 자산계급의 신문화를 전파하여 봉건문화적 구문화와 서로 대항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을 초기의 新學派 혹은 西學派라고 칭할 수 있다. 그들은 서방으로부터 救國救民의 진리를 학습하려고 분발노력하였다. 초기 개량파는 서방의 과학기술을 중시했을 뿐 아니라, 서방의 사회정치제도를 학습하는 데 주의하기 시작하여 병원개설, 商務부흥, 과거제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양무파와 서양 선교사들이 말하는 “서학”에 불만을 가지고 새로이 기구를 설립하고 역량을 조직하여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과학서적을 번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건충은《擬設飜譯書院議》속에서 동문관, 제조국과 같은 양무기구를 비난하고, 체계적으로 세가지 서적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각국의 현대 정치에 관한 책, 둘째는 각종 관리의 업무규정에 관한 책(행정, 군사, 재정, 교통, 체신 등 포함), 셋째는 서양학교의 교과서로서, 여기에 초기개량파와 양무파간의 구별이 반영되어 있다.11)
초기개량파는 중국이 낙후된 원인을 깊이 탐구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낙후가 과학기술의 미발달만이 아니라, 사회․정치제도 방면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정치풍토와 사회제도방면에서 서양선진국가의 부강한 원인을 탐색하였다. 이것이 초기개량파의 특색중의 하나이다.
마건충은 유럽에 유학하면서 서양자본주의국가의 사회정치제도에 대해 어느정도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는《上李伯相言出洋功課書》중에서 말하기를 “각국의 관료정치에는 다른 점과 같은 점이 있는데, 혹 군주제도 있고, 혹 민주제도 있으며, 혹 군민이 공동주관하는 나라도 있지만, 그 입법, 사법, 행정을 나누어서 분담하여 한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지 아니하여 권력을 서로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정치에 기강이 있어 찬연히 볼 만하다”라고 하고, 또 “사람마다 자주권이 있고 사람마다 自愛의 권리가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가 자산계급민권에 대해 마음을 쏟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의회정치 주장을 정면으로 제출하지는 않았다. 그는 설복성과 마찬가지로 양무파 관료집단중에서의 지위가 비교적 높았기 때문에 봉건정권에 대해서 지대하게 의지하고 있었다. 사회지위가 다소 낮은 왕도, 진치, 정관응 등은 비교적 공개적으로 “君民共主(군주입헌)”의 우수성을 선전하였다. 왕도는 말하기를 “군주국이 되면 반드시 요․순같은 임금이 위에 있는 다음에야 장구하게 안정하는 정치를 할 수 있고, 민주국가가 되면 법제가 많아서 어지럽고, 마음과 뜻이 오로지 한결같기가 어려워서 그 극도에 이르면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오직 군민이 함께 주관하는 정치라야 위아래가 서로 통하고 민중의 힘으로 임금의 과실을 숨겨주며 임금의 은혜가 또한 민중에게 내려가서 모두 함께 토론하고 깨달으므로 중국의 3대 이상의 전해준 뜻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치도 지적하기를, “태서의 의원제도는 군민이 한몸처럼 화합하여 위아래가 모두 한마음이 된다”라고 하여 “미․영의 각국이 부국강병이 되어 사해를 종횡으로 주름잡는 근원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군민이 공동관리하는 입헌군주제도는 사해 끝까지 행한다. 방금 새로 일어난 것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常道는 아니고 형세이다. 성인이 다시 나와도 나의 말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12)라고 하였다. 정관응도 “의회제도가 일어남으로써 민심이 화합하고 민중의 의지가 강해진다”라고 선전하여 군주입헌정체설을 중화민국이 외국의 모멸을 벗어나는 유일한 출로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서양자본주의제도를 “중국에서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 법을 변통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변통이란 것은 각 지방의 서원이 “의원” 즉 일종의 請議機構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은 초기개량파 마음속의 民權, 실질적 臣權을 표명한 것이다.13)
풍계분은 저서《校邠廬抗議》에서 변법론을 역설했다. 그는 중국의 전체적인 정치체제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는 폐단을 통열히 지적하면서 “무릇 국가가 민생을 계획함에 있어 보탬을 주는 것은 모두 옳으며”14) “중국의 전통적 윤리와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삼고, 이에 여러 나라의 부국강병 기술을 보충해야 한다”15)고 주장했다. 이 글은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 개량주의적인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이룩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었다.
정관응의 변법론은 풍계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정관응은《盛世危言》애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양무파를 비판했다. 즉 “서양문물을 배우러 넓은 바다를 건너 어느 날 어떤 도시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인사를 만나 생활양식을 관찰하고, 그 나라 정치와 종교를 접하는 등 그 풍속의 이해득실과 성쇄의 본질을 살펴보았더니, 그 나라 다스림의 근원과 부강의 원천이 결코 군비의 우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議員 모두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심으로 교양을 쌓고, 학교를 부설하고, 서원을 넓히고, 기술을 중시하고 考課를 나누어 사람에게 그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하며, 農學을 가르치고, 물의 흐름을 다스리고 瘠土를 갈아 옥토로 만들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모두 이용하며, 철도를 만들고 전선을 설치하고 세금을 줄이고 상업을 보호하여 물건의 흐름을 넓히는 것에 있음을 알았다.”16) 그는 또 의회제도와 아울러 군주와 국민이 함께 주인이 되는 입헌군주제를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의 학문이 근본이고, 서양 학문은 그 나중이 된다. 이에 중국의 학문을 주로 배우고 서양 학문을 보충한다.”17)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양무파가 말하는 “中學爲體, 西學爲用”과는 다른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왕도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천하의 일, 오래토록 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고, “孔子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반드시 옛날에 구애받아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8)라고하여 변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왕도가 목표로 한 것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영국에 따를 국가가 없다”19)고 한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영국적인 입헌군주제였다. 또한 양무파를 비판하는 왕도의 근거는 ‘민의 이익’과 ‘민의 뜻’으로써, “민을 다스리는 것은 本이며, 서양의 법체를 모방하는 것은 末이다”20)고 주장했다. 또 “민을 다스림에 있어 중요한 것은 민의 이익에 따르고 민의 뜻에 쫓아 이를 통하게 하는 것에 있다”21)고 하고 “외모는 살찌고 요란하나 실속이 없는 자(양무파)는 민을 재난에 빠뜨려 민에게 복이 되지 않고 종종 민에게 해를 끼쳐 민의 이익을 위하지 않는다”22)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왕도의 입장이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23).
何啓․胡禮垣의《曾論後書》에 있어서는 “民政은 本이요, 軍政은 末이다. 內修를 하는 것은 처음이요 外攘을 하는 것은 끝이다”24)라고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은 변법에 의한 자강론에 傾倒하고 있었다.25)
이밖에 湯震, 陳虯, 陳熾 등과 같은 적극적인 변법론자가 있어 변법자강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당대에 이렇다할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26)
2. 변법론의 전개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진압과정을 통해 서구의 군사기술의 우수성을 자각한 일부 대관료들에 의하여 1860년대 중반 이후 추진된 양무운동이 궁극적으로 부국강병이라는 자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인식이 양무운동이 한창중이던 때무터 이미 일부 식자층에 번져간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한 인식의 계기가 된 것은 구체적으로는 1874-1875년 일본의 대만점령사건으로부터 시작된 대외적 위기를 맞아 정부(내지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양무파 관료하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이에 대처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즉, 일차적으로 강병을 추구하여 외세의 위협을 막아낸다는 명분하에 추진된 양무운동이 대만사건, 청불전쟁(1884-1885), 청일전쟁(1894-1895)에서의 굴욕적 타협 내지 패배로 인하여 여지없이 파탄에 직면케 된 것이다.
종래 군사기술 수용 위주의 고식적인 양무사업만으로는 부국강병 내지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양무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서구의 정치제도(주로 議院制)의 도입 즉 제도적 개혁을 주장한 변법론은 청불전쟁이 패배로 끝난 후인 18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게 되었다. 이렇게 양무운동이 한참 궤도에 오른 1880년대 후반부터 변법론이 대두하게 된 까닭에 대하여 간단히 짚고 넘어가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로 거론될 수 있는 것은 전술한 바 대외적 위기상황(대만사건, 청불전쟁 등)에서의 굴욕적 타협으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자각된 상황이었음을 들 수 있다. 강유위의 정치활동에서의 급격한 浮上이 反양무파적 노선의 淸流派와의 연결을 통해 가능하였음27)은 이미 입증된 일이거니와 바로 이와 같은 반양무적 분위기가 대외적인 위기상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궁극적인 방안으로서 양무운동을 대체할 변혁의 이론을 모색케 하였고 그 와중에서 政制로서의 西學을 수용하자는 변법론이 표면화하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정관응의 反양무적 내지 변법론적 입장이 官督商辦 형태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던 데서도28)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통한 부강추구에 洋務企業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도 변법론으로의 추이에 작용하였음을 들 수 있다.29)
(1) 康有爲의 변법활동과 변법사상
청일전쟁은 중국과 일본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下關조약에서 결정된 막대한 배상금과 개항장에서의 제조업 허가만으로도 중국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으나 그 당시 중국인들에게 더욱 큰 충격을 던져준 것은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을 선두로 한 제죽주의 열강의 경쟁적 租借地 요구였다.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요구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의 간섭으로 일단 철회되었지만 그 대가로 중국이 3국 및 영국, 일본 등에게 여러 군데의 영토적 권리를 넘겨주도록 강요당해야만 하였던 상황은 1,2차 아편전쟁 단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같은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과거 중화적 세계질서의 변경에 처한다고 보아 열등시해 온 일본에게, 그것도 중국의 양무운동기에 조금 뒤져서 서구식 근대화를 개시한 바로 그 일본에게 패배하였다는 것은 곧바로 양무운동의 파탄이라는 인식으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적 계기를 구체적으로 변법론의 운동화로 연결시킨 것이 강유위(1858-1927)의 변법론이었다. 강유위의 변법 주장이 최초로 정치활동으로 나타난 것은 청불전쟁이 끝난 후인 光緖 14년(1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