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인간
남자는 거울 속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시선은 거울 속의 얼굴, 턱 주변을 거뭇하게 덮은 수염에 닿아있다. 수염은 턱을 에워싸고 인중까지 올라있다. 사실 남자는 수염이 인중에서부터 자란 건지, 턱에서부터 자란 건지 기억하지 못한다. 남자에게는 일정기간마다 수염을 다듬는다는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남자의 현실, 그것은 언제나 모호하다. 불현듯 솟아오르기도 하고 어느 순간 꺼지기도 한다.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의문도 불안도 가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이유 없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턱엔 하나의 생채기가 자리하고 있다. 턱 중앙부터 오른쪽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그것은 이주 전쯤에 면도를 하다 생긴 흔적이다. 보고 있노라면 이젠 느껴지지 않는 아픔이 리와인드 된다.
크림을 잔뜩 짜내 조심스럽게 턱에 바른다. 면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품의 분배다. 턱부터 시작한 거품을 뭉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꼼꼼히 펴 바른다. 너무 많이 바르면 거품에 밀려 털을 깎아내기 어렵고, 너무 얇게 바르면 거품이 사라진다. 면도라는 것은 섬세한 작업이다. 그는 면도를 할 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방울지는 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취향 한번 클래식하다니까. 종잇장처럼 얇은 면도 크림이 날이 선 칼날을 채 이겨내지 못하고 선을 이었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까 좀 바꿔, 세상에 좋은 면도기가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그런 구식 면도칼을 써. 새하얀 크림 위에 방울방울 지기 시작한 피를 보고 남자는 생각했다. 아프다. 남자는 생각보다 행위가 앞섰고, 그 행위대로 생각이 움직였다.
지루한 사람. 누군가가 남자에게 중얼거리곤 했다. 조금도 변할 줄 모르는 지루한 남자라서 재미가 없다고.
남자는 상상해본다. 하얀 벽면에 자신의 피가 튀는 장면을. 실핏줄 하나를 건드려서 아프지 않은 데도,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이 그려진다. 하얀 타일에 튄 핏방울이 꽃잎처럼 아롱아롱 맺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자의 생각은 거기서 멈춘다.
그러게 좀 조심하지. 남자는 목소리를 기억해본다. 말은 오래전부터 들어온 것처럼 익숙하지만 정작 상대는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더라.
생각을 더듬으며 남자의 손이 작업을 시작한다. 거품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순하다고 선전하는 것은 그 외 기능들이 떨어진다. 면도 크림 역시 그렇다. 순하다고 해서 산 것인데 다른 것보다 거품이 빨리 녹아버린다. 때때로 눈보다 다른 감각들이 훨씬 빠를 때가 있다. 피부에 닿는 거품은 뺨을 간질이며 이미 녹아들기 시작했지만, 눈앞의 거품은 그대로다. 턱을 가볍게 들어 목과 맞닿는 지점부터 천천히 칼을 대 본다. 차가운 칼날이 닿자 남자의 목젖이 작게 경련한다. 금속의 느낌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 거품의 끝이 깔끔하지 못하게 발려져 있다. 높낮이도 다르고, 범위도 일정치 않다. 어느 선 즈음을 갈라놓고 천천히 안쪽으로 칼날을 끌어당긴다.
남자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 그럭저럭 만족한다. 남자의 섹시함은 역시 이런 거지- 생각한다. 남자는 각도를 바꾸어 여러 번 거울 속의 자신을 확인한다. 그러면서도 손놀림은 느릿하게 움직인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수록, 칼날은 거품을 드러내며 여린 속살을 보인다. 정확하고 유연한 남자의 손길에 매끈하게 깎인 털은 거품과 함께 세면대 위에 툭툭 떨구어진다. 물을 틀면 소리도 없이 거품은 녹아들겠지. 동시에 남자의 털도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남자는 물을 틀까 망설이지만, 그의 생각보다 빠르게 손이 먼저 움직여 세면대의 물을 튼다. 순식간에 거품과 섞인 물은 망설이지 않고 흘러내린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린다.
‘작위적이야.‘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인 것도 같고, 여자의 목소리인 것도 같다. 작위적이야, 작위적이야, 작위적이야. 남자가 바라보는 세면대는 거품도 털도 없다.
남자는 자꾸만 작위적이라고 중얼거렸다. 또르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남자는 중얼거렸고, 여자를 만나러 가기 직전 기억이 없는 단골가게에 들르면서도 중얼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그를 괴롭힌 것은 언제부터일까.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였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말을 많이 하면 부쩍 그렇다. 나중엔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분명치 않게 된다. 문장호응에 맞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엉키기도 한다. 누군가가 남자에게 위안을 얻었었다 말하며 감사를 표해도, 정작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너무 많은 말은 기억조차 불분명하게 만드는 걸 깨달은 남자는 말이 없어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여자가 그를 부를 때까지도 남자는 작위적이라고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이 여자를 언제 만났더라. 기억을 하려고 하니 파바박- 하고 순식간에 데이터가 마련된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의 오랜 친구 사이였지만, 사귀게 된 것은 최근이고, 같은 대학의 동기이다. 내가 대학에 다녔었군. 학교에서 배운 것은 거의 없지만, 연애학개론이라면 자신 있었다. 남자에게는 승부욕도 있었다. 친구의 애인이기도 했던, 그녀를 차지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는 말이다.
남자는 갈증을 느낀다. 그 타이밍조차 작위적이다. 남자는 턱 주변을 슬쩍 닦아내는 시늉을 한다. 땀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더운 날이다. 보송보송했던 턱 주변은 제법 축축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제안한다. 어디든 들어가자. 더워? 그래, 더워. 여자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하얀 원피스에 손만 몇 번 문질거릴 뿐이다.
남자는 필연적으로 하얀 원피스에 눈이 간다. 이상하다. 평소의 자신은 하얀색을 좋아하는 편이다. 왜인지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자는 하얀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까만 가디건을 걸쳤다. 너무나 단순하고 뻔한 디자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 왜 이렇게, 답지 않게 굴어?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쉬이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가 보기에도 남자가 어색하다는 뜻이다. 남자는 생각한다. 나다운 게 무엇일까. 신기할 만큼 만난 시간보다 여자의 존재는 가볍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된 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여자와 만나기로 하고, 여자를 만나러 준비를 하는 내내 남자는 머리가 멍했다. 누군가가 머릿속을 표백이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다. 그렇다고 기억을 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생각하면 그에 관련한 것들이 데이터를 처리하는 컴퓨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기계적이기까지 해서 이질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여자, 김지연, 동갑, 스물여섯, 피아노 학원 강사 겸 대학원생, 서울 D대학교 음악교육과 졸업, 나와는 동문, 좋아하는 꽃은 안개꽃, 하얀색을 좋아함. 하얀색.
여자의 스푼이 천천히 커피를 가르며 물결을 만든다. 여자는 커피를 좋아한다. 크림이 든 종류라면 사족을 못 쓴다. 무어라고 떠드는 입과 달리 표정은 심각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자의 말보단 행동에 집중한다. 행동을 보다 보면 여자와의 기억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생동감이 없다. 지금의 남자 자신처럼 멍하고 어딘지 흐릿하다.
뒤죽박죽으로 쏟아지는 데이터를 떠올려보면 어느덧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그녀와의 마지막 섹스와 첫 섹스, 수많은 중간 중간의 섹스들이 그려진다. 그녀의 원피스만큼이나 새하얗던 모텔의 빳빳한 시트에 묻었던 그녀의 생리혈. 그녀의 얼굴은 발개졌지만 남자는 속지 않았다. 다만, 발칙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어.
그녀가 말한다. 손으로는 스트로우의 잘게 접힌 주름을 아코디언을 연주하듯 신축시키고 있다. 목이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든다. 이제 스트로우는 주름대로 접히지 않는다. 제멋대로 구겨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싫증이 난 듯, 남자와 눈을 마주한다. 기억이 조금도 나지 않는 생경한 눈으로 여자는 말한다. 그 사람에게 가고 싶어.
여자가 일어선다. 남자의 눈에 하늘거리는 여자의 원피스가 보인다. 여자의 치마단이 흔들리는 사이로 실밥이 보였다, 사라진다. 하나, 둘, 셋 세다 만다. 남자의 시선은 여자에게 닿지 않는다. 여자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작위적이야.
남자는 또다시 중얼거린다. 여자는 남자에게 너무나도 작위적이다.
남자는 하얀 도화지를 보면 그림부터 그리고 싶어진다. 하얀색은 뭐든 잔뜩 칠해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절대로 그저 흰색인 채는 안 된다.
눈을 떠보니 모든 일은 벌어져 있는 상태다. 남자는 당황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얀 원피스는 붉게 물들어 있고, 목에 칼이 박힌 여자의 시선은 자신의 등 너머 허공을 향하고 있다. 남자의 마음은 복잡해지지만, 마음과 달리 손은 깔끔하게 움직인다. 기억을 하려고 애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이란 잔인하다.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다. 남기고 싶은 것만 남기고, 지우고 싶은 것은 너무나 깔끔하게 지운다. 남자는 또다시 중얼거린다. 씨발, 작위적이야. 대체 언제 이 여자에게 칼을 겨눴을까.
왜 나는, 알지도 못하는, 아니 조금 전에는 연인이었다는, 여자의 목에, 칼을, 겨눴을까. 왜, 왜, 왜.
하얀 벽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언젠가 본 칸딘스키의 그림처럼 추상적이고 자극적이다. ‘야옹’하고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먹이로 줘버릴까. 손은 점차 빠르게 움직이고, 생각은 점점 극에 달해간다. 냉동시켜서 보관할까. 어차피 올 사람도 없는 집인데. 남자는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처음으로 당황하기 시작한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 피비린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좀 쉬었다 하자.’
어디선가 음성이 들린다. 소리는 벽에서부터 들렸다. 남자는 호흡을 멈춘다. 누굴까. 옆집 사람일까. 아니지, 화장실은 위아래층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 위층일까. 파이프를 통해 이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하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남자는 행동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고도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구부정한 자세로 멈춰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남자는 호흡하지 않고도 살아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뇌까린다. 이 작위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나열한다. 놀랍게도 단어를 생각하는 순간 남자의 경험과 맞물린다. 턱, 수염, 인중, 면도, 크림, 아픔, 리와인드, 종잇장, 거품의 분배, 하얀 벽, 피, 칼날, 각도, 세면대, 물, 작위, 작위, 작위.
그 순간, 남자가 주저앉는다. 막힌 호흡이 한꺼번에 열려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소통이 버겁다. 남자는 가위에 눌렸다 풀린 사람처럼 발가락부터 움직여본다. 엄지가 들리자 검지도 들린다. 크게 호흡을 해본다. 깊이, 깊이, 몸 가장 깊은 곳까지 공기를 불어넣는다. 풍선처럼 빵빵해진 배를 부여잡고 다시 바람을 뺀다.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남자가 가졌던 기억은 점차 희미해진다. 기억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 생각해내지 않으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
남자는 여자의 시체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일단 저것을 치워야겠어. 남자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남자의 몸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물과 함께 하수도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칼.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날이 나간 면도칼뿐이다. 면도칼론 무리야. 남자는 화장실을 떠나 거실로 들어선다. 움직일 때마다 피와 엉킨 선홍색 물방울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남자의 표정은 비장하지만, 고양이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야옹? 남자는 부엌에 비치된 식칼을 꺼낸다.
다리를 토막 내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살이 썰리는 소리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소리보다 더 무서운 건 영상이다. 물에 씻어내도 핏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머리와 몸이 분리될 즈음부터는 남자는 끔찍함조차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이 여자를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 대체 왜 여자에게 이런 짓을 할 만큼 분노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남자는 또 되뇐다. 작위적이다, 끔찍할 만큼.
‘안 돼, 작위적이야.’
거울에 비친 타일은 새하얀 색이다. 남자는 퍼뜩 정신이 들어 사방을 쳐다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거뭇한 수염이 자라나 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실제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남자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남자는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그 모든 일이 상상이었을까. 그렇다기엔 너무나도 생생하다. 이건 마치 도로시의 주문 같다. 톡톡톡 구두 뒷굽을 세 번 부딪히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도로시의 주문. 남자는 다리의 힘이 풀려 맥없이 주저앉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러면서도 남자는 면도날을 다듬는다.
그는 아무런 곳에도 가지 않는다. 그저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 지점에만 머문다. 간혹 남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대로 움직일 때도 있다. 그러나 역할을 끝내고 나면 언제나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 자신의 좁은 욕실, 하얀 벽면 속으로 숨어든다.
남자는 수많은 사람이 되어본다. 살인자가 되기도 하고, 신부가 되기도 한다. 술에 절기 바쁜 실업자 아버지가 되는가 한편, 동생에게 빼앗긴 젖이 샘이 나 동생을 구박하는 철없는 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길인지 알 수가 없어 그만둔다. 수 없이 수정되고, 변경되어 온 자신의 길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작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가봐야 후회뿐이라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체험한 그는 더 이상 삶에 소원하지 않는다. 다만, 내 운명이라는 것이 제대로 그려진 세상 속에서 한번이라도 살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는 버티고 있다.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야만 한다. 이렇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더 생각할 수 없는 공포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한다. 한때는 누군가의 연인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아버지기 이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한 그는 정작 자신에 대해 아무런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트에 ‘나’라고 새기면서, 그동안의 체험으로 겪은 수많은 이야기 속의 자신을 나열해본다. 유명한 연기자인 적도 있고, 거렁뱅이였던 적도 있고, 대기업 총수였던 적도 있고, 파렴치한 제비였던 적도 있다. 그 어느 것 하나 남자가 아닌 것이 없었지만, 온전히 남자였던 것도 없다. 항상 자신이 아닌 자신을 연기해야만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런 것도 없다. 노트의 잉크는 비정기적으로 날아가 버린다. 흔적조차 남지 않는 그 흔적을 몇 번이나 보곤 남자는 아무런 것도 기록하지 않게 된다. 무기력이 그를 덮는다.
남자는 또다시 면도를 한다. 이주 전쯤 생긴 상처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말끔하다. 종이를 지우개로 지웠다면 종이 보풀이라도 일었겠지만 자신은 그런 흔적마저 없다. 면도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지. 남자의 섹시함의 상징. 왜 난 면도에 이렇게 신경을 쓸까.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자라나는 털인데도. 남자는 하얀 벽면으로 가득한 자신의 욕실을 둘러본다. 선명하게 자리했던 붉은 피는 이제 없다. 루미놀 조사라도 해볼까. 남자는 면도를 하다가 종종, 아무도 없는 욕실을 둘러보곤 한다. 기억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 내가 이런 성격이었나. 남자는 생각해본다.
남자는 길모퉁이에 서서 한 여자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이야기에 자신은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였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자신이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히 자신이 아니지만,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가. 그저 스쳐 지나는 우연이라도 그에게는 필연이나 인연이 될 수 있으리라. 그는 다짐한다.
어느 날, 그는 새하얀 달빛에 노출된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게 된다. 하얀 원피스에 까만 모피코트를 차려입은 그녀는 우아한 백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살포시 웃어 보이며 시선을 멀리한다. 습관처럼 지어진 그 웃음에 홀린 사람은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날부터 매일 매일 여자를 기다린다. 여자의 귀가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그녀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하루의 유일한 낙이므로 그는 상관없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어차피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타인과 똑같은 냉담함으로 대한다. 그것이 못내 슬픈 남자였지만, 어차피 자신은 엑스트라나 다름없는 역할임을 알고 있다. 기왕이면 자리 좋은 곳에서 그녀를 좀 더 바라볼 수 있다면-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레슨선생이나, 그녀의 매니저나, 그녀의 아버지였다면, 그녀의 연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따위를 상상한다.
그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지연이란 여자를 죽인 다음부터다. 죽음은 아무런 현실도 되지 않았지만, 여자의 눈빛만은 끔찍하게 자신의 뇌리에 박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게 된 여자와 마주칠 때도 그녀의 어깨 언저리만 바라본다.
왜 눈을 마주치지 않죠? 여자가 묻는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정확히 대꾸하지 못한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눈을 보고 말하는 거에요. 여자는 딱부러진 말투로 말한다. 남자는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시선이 닿은 것은 눈이 아니라 검은색 앞머리다.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봤네. 여자는 남자를 지나친다. 여자의 하얀색 원피스가 눈에 익다. 끔찍하군. 그녀는 여자가 어떠한 결말로 희생될지를 생각한다.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지만, 이미 자신에게는 한 번의 전적이 있다.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남자는 그 뒤로 몇 번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등장했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아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남자의 집에 매일같이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펼쳐들자 한 면 가득 여배우의 의문의 죽음을 장식한다. 그는 다시 신문을 덮는다. 그녀의 죽음이다.
고양이가 남자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가르릉 거린다. 무릎이 저릴 정도로 커다란 고양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가 넘쳐서 이렇게 사람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쓴다. 고양이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기분이 좋으면 해죽거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꼬리로 바닥을 탕탕 내려친다. 이 작위적인 현장에서 가장 작위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놈이다. 남자의 고양이는 남자의 무릎에 앉아 여유로운 낮잠을 취하고 있다. 그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어도 고양이는 될 수 없다, 씨발.
어떻게 해도 작위가 진행된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이제는 정말 아무런 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저 시간이 가면 가는 대로, 누군가가 오면 오는 대로 멈추어 있다. 전에는 원래로 돌아오기라도 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작위인 이상은 아무런 것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움직여지는 대로 움직이고, 숨 쉬어지는 대로 숨 쉬면 그만이었다. 왜 죽지도 않나. 이렇게 재미없는 삶.
‘졸라, 작위적이야.’
하얀 벽이 말한다. 속 시원한 소리가 들리는군. 남자는 생각한다.
‘이게 문맥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왜 안맞아?’
‘문장 호응이 하나도 맞지 않잖아.’
누군가는 꾸짖고, 누군가는 꾸짖음을 당하고 있다. 남자는 귀기울이려 하지 않아도 언젠가부터 그 목소리를 듣게 된다. 벽과 대화하는 사나이라니 이거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군.
‘포스트 모더니즘도 몰라? 현실과 비현실의 조화를 그린 거라구.’
‘말이 좋지.’
‘H교수님이 그러디? 자신 없으면 지껄이라고.’
벽의 대화는 계속 된다.
‘그리고 이 캐릭터 계속 남길 거야?’
‘그 캐릭터가 왜?’
‘어정쩡하잖아.’
‘말도 마, 사실 걔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내가 만들었지만 저렇게 손에 안 잡히는 캐릭터도 드물어, 진짜. 몇 번을 써봤는데도 감이 안 잡혀.’
‘빼. 죽이지 말고. 흰 드레스도 그만 입혀.’
‘어차피 남자야.’
이번엔 내 차례인가 보군. 남자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잘 버텼지. 이 하얀 감옥 안에서 밑도 끝도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성격도, 캐릭터도 매력적이지 않고 더군다나 내용은 더더욱 없는 소설 따윈 불쏘시개로도 아깝다.
붉게 물든 타일이 가득한 화장실에 모로 누워 남자는 히죽 웃는다. 자신은 어떻게든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한번은 멋진 주인공이고 싶었는데.”
남자는 두 눈을 감는다. 멋진 음악이 흐른다면 좋겠다. 히히히. 이 장면만큼은 내가 써야지. 남자는 생각해본다. 어차피 공상대로 움직여지는 남자다. 누군가의 공상이든, 자신의 공상이든. 누군가의 공상이 더 크게 작용하지만 그가 움직이지 않을 때 조금씩 자신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쓰라 그러지 뭐. 히히히.
남자의 귓가에만 음악이 흐른다. 명멸하는 의식 너머로 흐르는 음악은 powder blue다. 우울하고 어둡다. 수 없이 만난 사람 중 한 소녀가 그랬다. 죽는다면 이런 음악을 듣고 싶다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죽는 순간 음악이 들린다면 이 음악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젠장, dancing queen이나 들을 걸 그랬나. 너무 우울하고 어두워서 자꾸 슬퍼진다.
남자의 손엔 무지의 책 한 권이 들려있다. 남자의 이야기를 빼곡히 적으면 지워지고 적으면 지워지던 공책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순간이다. 잉크가 없네. 벽면을 가득히 메운 핏방울을 펜촉에 묻힌다.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라고 쓰기엔 자신이 삶이 너무나도 가난하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본다. 하얀 도화지는 아니지만 여백은 꽤 넓다. 죽는 건 아닐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 비뚤비뚤 그려진 그림은 끝이 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잘 썼네.’
‘아 그거. 왜, 그럴 때 없어? 그냥 손이 막 가는대로 쓰는 날.’
‘있지. 하지만 그건 결국 자기 작품에 무책임하단 소리야.’
‘암튼 그런 날 쓴 거야. 손이 막 지 멋대로 가는거야.’
‘암튼 오늘 합평 끝났으니까 참고해서 퇴고해.’
‘응.’
남자는 히히 웃는다. 마지막까지 그럴 생각이다. 글이 어디가 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는 죽어도 어차피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죽었다가 다시 살리지는 않겠지, 설마. 에이,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도 아니고, 그러진 않을 거야. 이왕 끝나는 거 확실하게 끝나버리게 그냥 하얀 원피스입고 죽어버릴까. 아니야, 어쩌면 이 사람이 번개를 맞아서 기적적으로 소설의 천재가 되어 버릴지도 몰라. 그때가 될 때까지만 살아볼까. 아냐, 그 나이 될 때까지 우문, 비문 구별도 못 하는 걸 언제 기다려. 일본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게 빨라. 그래도 지가 잘 쓰게 되면 날 다시 살려주려나. 그때까지만 날 잊어줬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만 날 좀 그만 고생시켰으면 좋겠다. 남자는 숨을 고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남자는 거울 속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본다......
(57.6매)
-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페이퍼를 올려봅니다.
지금 읽고 계신 소설은 소설이라 부르기조차 엉망인 소설이에요.
초고임을 감안해주시고 읽어주시구요.
소설은 언제나 퇴고 중입니다.
저의 한계를 느끼셔도 할 수 없어요.
갑작스럽게 소설의 내용이 매끄러워지거나 좀 더 나아졌다 하시면
그건 제가 퇴고를 하면서 좀 더 수정한 거란 점을 알아주세요.
좀 더 완성된 글을 남기고 싶어서 소설을 올리지 않았었는데
오픈하여 글을 올리는 것도 저에겐 새로운 자극이 될 것 같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