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6년 8월 3일//
박홍양, 이약우를 탄핵 함
태학(太學) 유생(儒生)이 권당(捲堂)하고 소회를 진달하기를, “오혁(吳爀)의 소장(疏章)은 윤증(尹拯) 부자(父子)가 의리를 원수처럼 보고 현사(賢師)을 배척(背斥)한 죄를 대강 거론한 데 불과하며, 이는 모두 열성조(列聖朝)에서 처분(處分)을 내린 일이고, 여러 선현(先賢)들이 이미 정해 놓은 의논인 것입니다. 이는 국승(國乘)에도 기재되어 있고 야첩(野牒)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니, 어찌 일자 반구(一字半句)인들 더 첨가하여 부연한 것이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저들이 무슨 발명(發明)할 단서가 있기에 한 번 팔도소(八道疏)가 나오고부터 눈을 부릅뜨고 주무(綢繆)하니 화기(禍機)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난가(彎駕)가 장차 출발하기 위해 군령(軍令)을 이미 발포한 때를 당하여 배호(陪扈)하는 반열과 장병(將兵)의 중임에 있는 사람들이 혹은 소장을 올리고는 곧바로 나가거나 혹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사진(仕進)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그들이 단지 윤증(尹拯)이 있는 것만 알고, 군상(君上)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리들 가운데 태학(太學)에 적을 두고 있는 자들은 석전(釋奠)을 하루 앞두고 부산하게 다투어 나가 버렸으므로, 제사(祭事)를 행하는 날 저녁에 반열에 참석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단지 윤증이 있는 것만 알고, 공부자(孔夫子)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함이니 심한 것입니다. 윤증의 폐해가 백여 년 동안 해독을 전하여 와서 그 여얼(餘孽)들로 하여금 조정에 있을 경우에는 군상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태학에 있을 경우에는 공부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했으니, 국강(國綱)과 세교(世敎)가 멸절(蔑絶)되었습니다. 아! 참혹합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성인을 무시한 죄에 대해 대각(臺閣)에서 이미 성토(聲討)하였고, 사림(士林)에서도 병기(屛棄)하였으니, 신 등이 중첩되게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홍양(朴弘陽)이 제일 먼저 흉소(凶疏)를 올리고 이약우(李若愚)가 연명(聯名)으로 패려(悖戾)한 소장을 올린 데 이르러서는 감히 선정(先正)이니 사문(斯文)이니 하는 칭호를 윤증의 부자에게 가하면서 이를 제멋대로 임금에게 고하는 내용에다 썼으니, 방자하여 기탄함이 없는 것이 이렇게 심합니까? 아! 옛날 우리 숙종조(肅宗朝) 병신년495) 에 처분을 내리셨을 때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죄는 곧 하나의 사문(斯文)의 변괴이니, 유현(儒賢)으로 대우하거나 선정으로 일컬을 수 없다. 나의 자손(子孫)이 된 사람은 이를 굳게 지켜 동요됨이 없게 하라.’ 하고, 이어 그의 관작(官爵)을 빼앗고 그의 향사(鄕祠)를 철거하며 그의 문자(文字)와 판각(板刻)을 헐어버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아! 당일의 처분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우리 나라의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두고 땅을 딛고 선 사람이라면 누군들 지금까지 엄숙하게 외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영조조(英祖朝)에 이르러서는 건극(建極)의 정치를 힘써 용사(龍蛇) 같은 무리로 하여금 스스로 교화되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자복(自服)한 실정을 굽어 살피시고 성교(聖敎)를 내리기를, ‘이는 소인(小人)으로서 겉으로만 마음을 고친 체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버려두고 묻지 말아야 할 자들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병신년의 처분이 있은 뒤 저들의 원망이 갈수록 가슴속에 쌓여 신축년496) ·임인년과 무신년497) 의 화(禍)를 양성(釀成)하게 되었으나, 일부러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게 함으로써 반측 자안(反側自安)498) 하는 바탕을 삼았던 것이니, 어찌 일찍이 선정(先正)이라고 일컫고 유현(儒賢)으로 대우한 적이 있었습니까?
더구나 우리 정조조(正祖朝) 병신년499) 에 다시 처분을 내리셨을 때 이명휘(李明徽)의 흉소(凶疏)로 인하여 천노(天怒)를 진동하시어 특별히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처분이 엄중하지 않은 탓으로 이런 패려한 의논이 있게 되었다.’ 하고, 직접 이 명휘를 국문한 다음 먼 변방으로 찬축(竄逐)하고, 윤증을 추죄(追罪)하여 고명(誥命)을 삭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하여 존숭하고,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수즙(修葺)하여 천명(闡明)하였습니다. 처분이 결정되고 난 뒤에는 모든 사설(邪說)과 피언(詖言)이 감히 다시 행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음산하게 덮여 있던 기운이 깨끗이 걷히고 화란(禍亂)의 싹이 영원히 끊겼습니다. 그러다가 임인년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는 경사가 있기에 이르러 윤증의 직첩(職牒)을 도로 주었으나, 윤증이 전후에 반복해서 속인 정상을 그 무리들에게 환하게 유시(諭示)하여 전의 잘못된 견해를 굳게 지키지 말게 함으로써 개과 천선(改過遷善)의 길을 열어 주니, 저들도 모두 감오(感悟)되어 마음을 고치는 공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얼(遺孽)이 잠복(潛伏)해 있다가, 윤광소(尹光紹)의 소장이 나와서 감히 선정이라고 일컬어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려 하자, 고 상신(相臣) 김익(金熤)이 엄중한 말로 통렬히 공척하니, 윤광소는 참망(僭妄)을 범한 죄를 받았고, 상신은 정대한 의리를 펼 수 있었습니다. 아! 열성조(列聖朝)의 전후 처분(處分)이 이처럼 명백하고도 통쾌하였는데, 저 박홍양(朴弘陽)·이약우(李若愚)의 무리는 유독 조가(朝家)의 신자(臣子)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또 감히 선정(先正)이니 사문(斯文)이니 하는 말을 장독(章牘)에 올려 은연중 시비(是非)를 현란(眩亂)시키고 현사(賢邪)를 혼동시키려 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간사한 사람을 비호하여 임금을 속인 죄의 하나입니다. 박홍양의 소장에 또 이르기를, ‘한쪽에서는 무함하고 한쪽에서는 변명한다.’고 했는데, 그가 이른바 무함한다는 사람은 누구이고 변명한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초에 윤증 부자에게 악을 편들고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죄로 분명하게 공척(攻斥)한 것은 모두 명신(名臣)·석보(碩輔)이고, 사림(士林)의 영수(領袖)로서, 일세(一世)에 존숭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보위(保衛)한 공이 사나운 물결 속에 우뚝하게 버틴 지주(砥柱)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선배들의 광명 정대한 의논을 곧바로 무망(誣罔)한 죄과(罪科)에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윤증을 위해 한쪽을 편들고 윤증을 부호(扶護)하는 사람은 이세덕(李世德)·이진유(李眞儒)·조태억(趙泰億)·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같은 역적들의 와주(窩主)이니, 아! 통분스럽습니다. 저들은 간사한 역적의 도당(徒黨)으로서 임금을 속이고 시비를 어지럽히는 말을 가지고 도리어 변명하는 과조(科條)로 돌리고 있으니, 이것이 역적을 편당들고 어진이를 업신여긴 죄의 하나입니다. 또 더구나 이약우는 소장에서 소장(消長)하고 왕래(往來)한다는 것을 말했는데, 대저 소장하고 왕래한다는 것은 군자와 소인이 막히고 통하는 기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들은 윤증 부자를 추탈(追奪)하였을 때를 가리켜 도(道)가 소멸되었다고 하고, 신설(伸雪)하였을 때를 가리켜 도가 신장되었다고 하였으니, 은연중에 윤증을 군자의 위치에 두고, 당시 조정에 있던 군현(群賢)들을 소인으로 귀결시켰습니다.
또 태평한 시대가 가면 비색한 시대가 온다는 시운(時運)을 가지고 은연중에 병신년 처분을 내렸던 때에 견주었습니다. 이는 군현(群賢)들을 무함하여 모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없이 엄한 지위(地位)를 핍박하기까지 한 것이니,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것이 과연 오늘날 북면(北面)하고 있는 신하로서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이것이 성조(聖朝)를 무함하고 핍박한 죄의 하나인 것입니다. 이약우가 소장에서 또 정기(正氣)와 절의(節義)를 가지고 말했는데, 아! 윤황(尹煌)·윤전(尹烇)의 기절이야 우리 나라의 인사(人士)로서 누군들 그 풍절(風節)을 듣고 일어나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그의 아들 윤선거(尹宣擧)는 한 번 심도(沁都)500) 에서 절개를 잃었고, 미처 노예로 변복(變服)했었다는 수치를 씻지 못하였는데, 재차 난적(亂賊) 윤휴(尹鑴)와 교제하여 기꺼이 악을 편당드는 부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윤증은 윤선거보다 더 지나쳐서 아비의 허물을 숨길 줄 모르고 기필코 선인(先人)은 당초 죽어야 될 의리가 없었다고 말하였고, 《춘추(春秋)》의 의리를 원수처럼 여겨 50년 동안 섬겨 온 스승을 배반하고 윤휴의 도당에 아첨하여 붙좇아 은밀히 유현(儒賢)인 대관(大官)을 도모하였으며, 선정(先正)을 해쳐 기사년501) 의 흉화(凶禍)를 양성(釀成)하였습니다. 그들이 평일에 시행했던 일들을 추적하여 마음먹은 것만 가지고 주참(誅斬)한다는 법을 적용한다면 윤선거·윤증 부자(父子)는 명가(名家)의 패역한 자제(子弟)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만세 명의(名義)의 죄인이니, 어찌 치감(郗鑑)의 충성 때문에 가빈(嘉賓)502) 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겠으며 노혁(盧奕)의 절의 때문에 남면(藍面)503) 의 간사함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저 이약우의 무리가 어떻게 감히 정기와 절의 등에 대한 말을 가지고 천청(天聽)을 기망하고 조정(朝廷)을 우롱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가 세벌(世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일세(一世)를 속인 죄의 하나인 것입니다. 아! 이들은 간인(奸人)을 편당들고 정인(正人)을 배반한 습성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기필코 국시(國是)를 무너뜨리고 국기(國紀)를 혼란시킨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따라서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여서 엄중한 처분(處分)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난적을 징계할 방도가 없고 정론(正論)을 신장(伸張)시킬 때가 없게 될 것이므로, 신 등이 일전에 대략 소회를 진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성교(聖敎)를 받드니 사사(私事)를 편당드는 습성이 있다고 하셨고, 또 반드시 혼란해질 형상이 있다고 하셨으므로, 더욱 황공스럽고 위축됨을 금할 수 없고, 이어서 더욱 의혹됩니다. 신 등이 진달한 것은 열성조(列聖朝)의 처분이 본디 있었고, 여러 선현(先賢)들의 정론(正論)이 이미 정하여진 것이니,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私事)를 편당드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국가를 위하여 정맥(正脈)을 부지하고 사문(斯文)을 위하여 사설(邪說)을 물리치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들은 완전히 사와(邪窩)에 빌붙어 정인(正人)에게 추욕(醜辱)을 가할 계책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사사를 편당들어 기필코 혼란시키려는 조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용히 깊이 생각하시고 과단성 있게 건단(乾斷)을 내리셔서 저 박홍양·이약우 등의 무리에게 속히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여 먼 변방으로 쫓아냄으로써 국기(國紀)를 바로잡고 제방(際防)을 엄중하게 하소서. 신 등이 그저 엄외(嚴畏)한 마음을 품고 명장(明張)시키는 의리에 대해 망설인다면, 국가에서 5백 년 동안 배양해 온 사기(士氣)가 신 등에 이르러서 땅을 쓴 듯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종(情踪)으로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개석(開釋)한 것이 상세하고 간절한 정도뿐만이 아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또 번거롭게 하니, 진실로 매우 놀랍다. 즉시 학당으로 들어가도록 권하라.” 하였다.
【원전】 48 집 598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註 495]병신년 : 1716 숙종 42년.
☞ [註 496]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497]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498]반측 자안(反側自安) : 마음이 불안하게 모반(謀叛)을 생각하는 사람을 묻지 아니하여 스스로 안심하게 한다는 뜻.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이들의 문서를 받았으나, 이를 살펴보지도 않은 채 태워버림으로써 반측(反側)한 사람들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한 고사(故事)에서 온 말임.
☞ [註 499]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 [註 500]심도(沁都) : 강도(江都).
☞ [註 501]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502]가빈(嘉賓) : 진(晉)나라 때 사람인 치초(郗超)의 자(字). 아버지는 치음(郗愔)이고 할아버지는 치감(郗鑑)임. 치초는 환온(桓溫)에 의해 참군(參軍)으로 발탁되었는데, 뒤에 환온에게 임금을 폐립(廢立)시키도록 사주한 잘못이 있었음.
☞ [註 503]남면(藍面) : 당(唐)나라 때 사람인 노기(盧杞)의 별명으로, 그의 얼굴이 푸르스름하였다고 함. 당나라 덕종(德宗) 때 정승이 되어 권력을 전횡(專橫)하여 정치를 문란시킨 데 반하여, 그의 아버지 노혁(盧奕)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조복(朝服)을 입은 채 죽은 절의를 세웠기 때문에 하는 말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