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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 『흡혈귀』

김남호 |2006.12.13 23:16
조회 98 |추천 0

글의 처음부터 난해했다. ‘머릿글인가...?’ 시작하자마자 김영하 자신의 이야기가 필자가 아닌 화자로서 글 속에 나오고 있다. 좀 당황스러웠다. 점차 뒤로 읽어내려 가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 글은 김영하 자신에게 온 어느 여성의 편지 내용이다. 사실 이 내용이 진짜 받은 편지내용인지 아니면 김영하의 표현방법인지 알 수가 없지만은 나는 한참을 쓸데없는(?)고민으로 시간을 허비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생각에만 국한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김영하가 보내는 메시지이며(혹, 진짜 편지의 내용일지라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임에 틀림이 없다.

 

 

김영하의 글은 대체적으로 정말 그럴 듯 하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현실성이 만들어낸 허구라 하지만 세밀하게 묘사된 부분 이라던지 장면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필체는 그의 글을 실제로 있는 일처럼 ‘신용’있게 만들어 준다. 앞서 나에게 혼돈을 주었던 편지 글이라는 것도 그렇고 이야기의 전반부인 여자의 대학생활(남편을 만나기 전)을 굳이 표현하고 있다는 것에서 허구상태의 글에 개연성이 정말 그럴듯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또한 이런 간결하고 솔직한 문체가 가져오는 ‘신용’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진실성 있고 강하게 나타내는 듯 하다.

 

 

그의 서재는 여느 사람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런데 책꽂이 옆에 이상한 나무상자가 놓여 있는 거였어요. 책 상자인가 싶어서 들춰보았죠. 하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다시 뚜껑을 닫고 나서야 전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건 관이었습니다.

 

 

김영하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통해서 첨단기술과 물질주의가 낳은 현대인들의 인간성상실과 정서파괴를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고독과 고뇌를 통해 김영하는 ‘죽음’이라는 새로운 모티브를 제시하는데 이는 그의 작품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보면 자살을 하기 쉽도록 도움을 주는 ‘자살도우미’의 주인공을 통해서 생을 미학적으로 마감하려는 현대인의 욕구와 그 속에 감춰진 고독과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죽음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요소중의 하나이다. 흡혈귀로서 살아남기 위해 피를 포기하고 밥을 먹고 인간세상에 적응하여 오지만 영생의 몸을 가진 채 알 수도 없을 만큼의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다른 이들의 죽음, 삶의 고통과 인간사를 너무도 많이 알아버린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죽지 못해 고통스럽기까지도 하다.

 

 

"그럼 왜 저랑 결혼하신 거죠?"
"누구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한다면 거짓말이거나 무지의 소치다. 나도 답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견디기 위해서다."
"뭘 견디죠?"
"시간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막연히 죽음은 존재의 부재, 영원한 종말의 의미로서 누구라도 원치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고뇌를 죽음을 통하여 해소된다고 보고, 이를 통하여 현대인들의 고통과 고뇌가 얼마나 극심한가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흡혈귀로 죽지 못하며 고통 받는 것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 자살이란 안식처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잘못된 이 시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현상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글을 통하여 현대인의 고독과 무료함을 잘 그리고 있는데 오랜 세월을 죽지 못하고 살아온 흡혈귀의 모습을 통해 삶의 무료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저와 제 애인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계시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피곤하죠."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 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 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흡혈귀로서의 남편은 아무런 욕구도 없다.

피를 빨지 못하는 흡혈귀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은 무엇이 있겠는가. 잠자리마다 사정없는 섹스와 조금씩 먹는 식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에서 식욕, 성욕, 수면 욕을 가지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채 시간만을 보낼 뿐이다. 욕구가 없다면 어떨까? 인간의 욕망은 끊임이 없고 이러한 욕망, 꿈이 있기에 살아가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하가 표현하는 현대인의 인간상에는 이러한 욕심, 꿈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를 무엇 때문에 살고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컴퓨터게임이나 인터넷채팅이라는 소재도 생각 없이 무료한 삶을 즐기게 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벌써 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아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그는 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타인의 경계에 들어놓지 않으려 하는 이기주의적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철저한 개인적인 삶을 그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 낀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서 오후가 다 되도록 119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의 모습과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의 모습 속에서 ‘함께 더불어 가는 세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또한 그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삶이 반복되는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자아상실도 나타내고 있다. 모두들 자신만을 생각 하다 보니(부부간에 조차도) 남이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함에서 존재의 상실, 부재의 두려움이 생긴다.

 

“나를 기억해주겠나?”

“네?”

“이 첫날밤을 기억해주겠느냐고?”

“그럼요. 죽을 때까지.”

“고맙다. 처음이라는 건 참 아득한 거다.”

 

김영하는 35세의 젊은 나이이다 즉, 우리와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물질이 풍요하고 생활이 편리한 현대의 자손들이다. 인터넷채팅을 즐기고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며 티비를 켜고 방송을 즐기며 전화를 통해 식사를 해결하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듯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그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한다 아니 부르짓는다. 현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 보라고

 

우리나라 통계청에 따르면 죽음의 사인 중 4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많이들 보고 들어왔겠지만 옆집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진다. 나 역시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옆집의 사람이 몇 명이 살고 있는지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시점에서 죽은 할머니의 시체가 아무도 모른 채 죽은 지 6개월 만에 변사 채로 방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신문기사는 놀랄 일이 아닌듯하다.

 

우리는 그가 예기하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들을 한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지식인들로서 단순한 액자 속에서 죽은 사람 소식만 듣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다. 일단은 재미가 없다. 나 역시 대중문화(컴퓨터, 영상매체)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일지는 모르나 문학작품이란 것이 언제 재미있었던 적이 있던가. 영화를 봐도 해외에서 상 받았다고 하는 영화 중에 재미있던 것은 정말 드물다. 대중문화가 항상 호기심을 유발하며 흥미진진하듯 시대를 비판하고 문학사에 남을만한 그러한 작품도 역시 재미있으면 좋겠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거 아니겠는가? 머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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