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바보 아버지
이치로는 1973년 일본의 아이치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배트를 손에 쥔 것은 세 살 때로 그의 아버지 스즈키 노부유키가 아들에게 사준 것이었다. 이유는 하나 스즈키 노부유키 자신이 고교 시절 고시엔을 꿈꾸던 야구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아들에게 대물림한다는 흔한 스토리인 셈이다. 아무튼 이 열혈 야구 바보 아버지는 이치로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이치로를 들볶기 시작했다. 이미 아버지의 의도대로 야구에 빠지기 시작한 이치로는 아버지와 즐거운(?) 야구 연습을 시작했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은 3학년이 되면 무조건 특별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치로의 학교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야구부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이치로는 자연스럽게 방과 후 아버지와 야구 연습을 하게 됐다.
아버지와의 하드트레이닝
스즈키 노부유키는 이치로가 야구 연습은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훈련 내용을 이치로가 원하는 대로 짰다. 항상 가벼운 캐치볼로 시작하여 가벼운 멀리 던지기로 몸을 덥힌 후 피칭 연습 50개를 했고 티배팅은 70개씩 3회에 나누어 약 200개를 했다. 굳이 70개로 나눈 이유는 매우 심오하게도 그의 집에 야구공이 70개뿐이었기 때문이다. 빨리 다음 연습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이치로는 바닥에 떨어진 공을 총알같이 주워 담고는 했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가 가진 빠른 발을 만든 이유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때리는 노크를 받는 수비 연습에서 이치로는 각 포지션별로 연습을 했다는 점이다. 이치로가 팀의 일원이 됐을 때를 대비한 정말로 용의주도한 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아버지만큼이나 이치로도 대단했다. 연습 첫날부터 공을 무서워하지 않고 정면에서 처리한 것이다. 대단한 아버지와 아들이다
한 달 스윙 6250회, 1 년 360일의 타격연습
타격에서도 이치로는 상당한 센스를 보였다. 아버지의 전력투구를 때려 냈고 발목으로 날아오는 폭투도 잽싸게 피해낸 것이다. 이정도면 이치로가 괴물인지 아버지가 바보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된다. 이치로도 대단했지만 아버지도 평균에서 좀 떨어지는 신체 능력이었다는 선에서 대충 타협점을 찾으면 될 거 같다. 결국 이치로의 아버지는 정상 투구거리인 16미터를 포기하고 홈플레이트 앞 10미터 지점에서 공을 던져야 했다. 상당히 위험한 연습이었지만 이 거리가 이치로에게 딱 적당한 거리였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이 거리도 소용이 없었다. 볼이 자꾸 멀리날아가 버려 줍는 일이 큰일이 되어버리자 이치로의 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바로 배팅 센터에서 연습을 하는 방법이었다. 돈을 투자하는 대신 팔다리가 편해지는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 투자한 돈은 한 달에 약 5만 엔 정도였는데 이미 본전의 수천 배는 뽑았을 테니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당시 그들이 이용한 배팅 센터의 비용은 1게임에 200엔으로 공이 25개가 제공됐다. 이치로의 한 달 타격 연습량은 약 6250회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배팅 센터에서 한 연습만 따져서 그렇다. 이치로의 아버지는 이때부터 이치로에게 선구안을 기르도록 가르쳤다. 볼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배팅 센터의 피칭 머신은 아버지보다는 강했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았다. 토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미 130km짜리 피칭 머신을 때려내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것도 모자라 타석 앞으로 나가서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배팅 센터에서의 연습은 고교시절까지 1년에 360일 이상 계속됐다.
초중학생급 성적
이치로의 집요한 아버지는 연습이 끝난 후에도 이치로를 가만두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면 홈플레이트로 쓰던 판을 손가락 끝에 끼우고 집으로 향하게 했고 평소에는 납이 들어 있는 스냅볼(손목의 회전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고안된 야구공)을 쥐고 다니게 해서 악력과 손목의 스냅을 키우도록 했다. 이치로 역시 야구에 대해 진지했다. 6학년 때 수학여행에 가서도 혼자 조용한 방에서 스냅볼로 연습을 한 후에야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을 정도였다. 어쩌면 야구 바보 아버지의 협박이었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훈련을 바탕으로 이치로는 중학교 3년 동안 에이스 겸 클린업트리오의 일원으로 지구대회 우승, 현 대회 베스트8, 주니치 소년야구 현 대회 우승, 전 일본 소년 연식 야구대회 3위라는 성적을 남겼다.
고교 첫 시합부터 레귤러
중학을 졸업한 이치로는 아이코다이메이덴고교로 진학을 하게 된다. 이 팀은 3년 만의 고시엔대회 출전이 확정된 나름의 강팀이었다. 하지만 이 팀의 감독은 처음에 이치로를 보고 실망했다. 중학 시절의 성적이나 명성에 비해 몸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치로의 신체 사이즈는 키 170cm, 몸무게 55kg, 가슴둘레 82cm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치로가 메이덴 고교에서 주전으로 뛰는 데에 신체 사이즈는 아무런 장애가 못 됐다. 능숙한 미트질, 날카로운 스윙, 총알 같은 송구 능력 등 갓 들어온 1학년생이 야구부원 전체를 놀라게 했다. 그해 첫 연습 시합이었던 4월 2일 이치로는 선발 3번 타자에 우익수로 출전했다. 메이덴 고교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일본 야구 사상 23번째로 200승을 달성한 대투수로 이치로의 고교 선배인 구도 기미야스 조차 데뷔는 5월 5일에 했던 것이다. 이날 이치로는 3타수 1안타 1도루를 기록했는데, 당시 감독은 그의 적극적인 자세를 높이 샀다. 타석에 선 고 1짜리 이치로에게서 이미 '반드시 때리고 만다'는 투지를 느꼈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이치로도 고민이 있었으니 워낙 공을 맞추는 재주가 뛰어나 스트라이크 존이 지나치게 넓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타자는 심판과는 관계없이 자기만의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있는데 이치로는 너무 잘 맞추는 만큼 노리는 공의 범위도 엄청나게 컸다. 그 스트라이크 존의 범위는 메이저리그에 가서도 변하지 않아 지금도 그의 볼넷은 리그 최저 수준이다. 고교 2학년 때 쓴 그의 일기에서 이런 고민을 엿볼 수 있다. "7회 말 1-3에서 어려운 낮은 공에 손이 나가 버린 것이 너무 분하다. 나는 다음 공을 치자고 생각했는데 손이 저절로 나가버렸다. 거기서 볼이 왔으면 한 개 더 기다려야 했다. '인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성적인 적극성과 배트 컨트롤의 능숙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치로는 고시엔대회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메이덴 고교가 그다지 강팀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치로 개인의 성적은 대단해서 프로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표참조). 특히 주니치에서 투수로 키우기 위해 주목을 했었다.
주니치맨 오릭스에서 시작하다
이치로는 뼛속까지 주니치맨이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이치로는 일본에서의 프로 생활을 오릭스에서 했다. 드래프트 직전 이치로는 역지명(프로구단이 일방적으로 선수를 선택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 선수가 가고 싶은 팀을 직접 지명하는 것이다. 단 3년간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어야 하는 등의 불이익이 있다)하는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주니치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 대부분이 반대했고 이치로도 거기에 수긍했다. 드래프트에서 이치로는 네 번째로 오릭스에 지명되었다. 당시 오릭스는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막 바뀌었을 때로 인지도가 형편없었다. 주니치에 지명을 받지 못하자 이치로와 이치로의 아버지는 크게 실망했다. 왜냐하면 주니치는 거의 이치로를 지명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로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주니치에서 이치로를 주목하고 있던 스카우트가 다른 부서로 가버리면서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또 투수로서의 이치로를 주목하던 주니치로서는 투수 이치로를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치로는 오릭스 구단의 시설을 둘러보고 대만족했다. 자신이 성장하기에 충분한 훈련 시설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계약조건은 계약금 4천만 엔, 연봉 430만 엔으로 평번한 수준이었다.
2군에서의 2년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치로의 프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 당시 오릭스 도이 감독 탓에 처음 2년간을 대부분 2군에서 보내야 했다. 프로 1년 차 시덜 고졸루키로서는 사상 두 번째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물론 2군에서 말이다. 당시 타율은 0.366였다. 1군 경기에도 드문드문 출전하여 95타수 24안타를 쳤다. 1.5군으로써 1~2군을 왔다 갔다 한 것이다. 그건 데뷔 이듬해인 1993년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건 이치로의 고집 때문이다. 타격 폼에 손을 대려는 코치의 지시를 이치로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프로야구에서 감독이나 코치의 지시를 듣지 앟ㄴ는 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치로는 무조건 자기 페이스대로만 밀고 나갔다. 결국 이는 데뷔 후 2년간 2군을 들락거리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그 와중에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는데 바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한 것이었다. 상대는 긴데쓰의 노모 히데오. 그렇다. 지금 메이저 리그에서 함께 활약하는 대 투수 노모가 그 상대였다. 둘의 인연은 기묘하게 이어져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얻어낸 첫 데드볼 역시 노모가 상대였다.
이치로가 입단 3년 차가 되던 1994년,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도이 감독이 물러나고 오기 아키라 감독이 들어왔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오기 매직’의 장본인이다. 그는 취임과 함께 1군 타격코치로 아라이를 데리고 왔는데 공교롭게도 이 아라이 코치는 일본 프로야구가 팀당 시즌 130경기를 치르게 된 이후 최다 안타 기록을 갖고 있었다. 바로 그 운명의 1994년 이치로는 ‘진자타법’을 완성하고 아라이 코치의 기록을 넘어버렸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이치로
이후의 메이저리그 진출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다. 2004년 9월 16일 현재 데뷔 후 4년 연속 200안타를 돌파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으며, 조지 시슬러의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도 도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페이스라면 충분히 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아직도 ‘단타쟁이’에 불과한 이치로를 평가절하하지만 야구에서 중요한 것은 홈런만이 아니다. 만약 홈런만이 야구의 전부라면 모든 게임을 홈런 더비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어느 메이저리그 대타자의 일화 하나가 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홈런을 못 치나요?” “안 칠뿐이다. 야구에서 홈런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짓말!” 발끈한 그는 다음 날 한 시합에서 홈런 세 개를 때려 자신의 말을 증명한 후 다시 본래 단타쟁이로 돌아가 안타생산에 열중했다. 비록 이치로가 홈런을 ‘안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못 때리는 것’일지언정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베이브루스의 홈런 기록은 중요하고 이치로의 내야안타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보다는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빛나는 대기록을 남길지 지켜보는 쪽이 훨씬 재미있을것이다. ‘인조인간 27호’가 어디까지 해낼 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