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타란티노 영화를 별로 안좋아합니다.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란
그럴싸한 별명도 선혈낭자, 신체훼손 장면을 싫어하는 저에겐
꽁기꽁기하고 스타일 하나는 인정합니다만 별로 기분좋게 본
영화들이 없어서, 게다가 1편도 안봐서 이것도 사실 안볼라고
했습니다만... 시사회에 당첨이 됐는데 빠지면 미안해서 그냥
갔는데...
오우 와우 어우!!!!!! 어떤 시인이 자기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던
데 제 영화적 감수성의 8할까진 못되도 8푼 이상은 충분히 차지하고
있는 촌티 풀풀 날리는 뻥스런 중국 무협영화!!! 그 감성이 너무나도
충실하게 패러디가 아닌 오마쥬에 가까운 형태로 영화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반가움이란...
초등학교때 지역 유선방송에서 하루종일 틀어주던 중국 무협영화들,
지금도 생생합니다. 액샌트가 강한데다 연기마저 오버스러워 귀가
따가울 지경인 중국어 대사들, 암투나 음모가 모의되거나 하는
장면에서 지겹도록 등장하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얼굴 클로즈업 +
볼이 미어져라 불어대는 관악기소리의 결합 초식, '심장파열권'같은
유치한 필살기 이름 붙이기... 타란티노는 이런 중국 무협영화들의
색채를 헐리우드화하지 않고 거의 원래 느낌 그대로 영화상에
살려놓았습니다. 얼굴은 팽팽한데 허연 수염을 붙인 뭔가 어색한
파이 메이의 연기는 그래서 우습다기보단 정겹더군요. 특히 제자
꾸짖을 때의 오버하는 억양이나 수염 터는거, 제자의 무공이 조금씩
늘때 므흣해하는 표정, 음모로 죽어갈 때의 분노하는 연기 등에
어렸을 때 중국 무협영화 많이 보셨고 그 추억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라면 반가움에 몸서리가 쳐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타란티노가 비디오 가게 점원을 하던 시절 많은 삐짜 영화들을
섭렵했고 그것이 그의 영화 스타일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인데 관객 역시 그런 삐짜 영화적 감성에 많이
젖어있는 사람일수록 타란티노 영화가 재미있게 느껴질 거 같네요.
중국 무협영화 뿐 아니라 우마 서먼이 차를 몰고 가는 흑백 장면에선
마치 싸이코의 첫장면이 생각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서부영화같은
느낌도 나는데 이런 것들이 단지 어디서 본듯한 장면만을 흉내내서
모아놨다기보단 영화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했다는 게
타란타노의 역량이 아닐까 싶네요. 서태지보고 외국 음악을 흉내만
낸다고들 하면서 서태지만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말이죠.
영화 보는 내내 군데군데 음악에서 로베르토 로드리게스의 영화가
생각났는데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니(전 영화볼 때
엔딩 크레딧 다 봅니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 자르는 극장 정말
싫습니다.) 진짜로 로베르토 로드리게스가 음악을 담당했네요. -_-
이 감독 자기 영화 음악 자기가 다 만들고 재주 많다는 소린 들어
봤는데 진짜로 재주 많네요. 타란티노랑도 친한 모양입니다. 같이
영화도 찍었고 영화 스타일도 왠지 서로 통하고... 엔딩 크레딧에
배우 이름 하나 하나 나올 때 주인공에게 처치당한 등장인물들은
이름 위로 선이 죽 그어지는데(생사여부를 알 수 없을 경우엔
물음표... 3편에 재등장할지 모른단 복선일까요?) 이런 게 엔딩
크레딧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이자 타란티노의 장난기이기도
하겠죠. ^^
어찌보면 괜히 후까시잡는거같은 말장난들이 참 많은데(등장
인물은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양 얘기하지만 관객은 저거
뭐야? 식으로 시큰둥하게 반응하게 되는...) 그 대사들중에
제 처지랑 은근히 와닿는 게 좀 있었습니다. 저에게만 그런진
몰라도 마냥 생각없이 현란한 오락영화로만 느껴지진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