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닷컴 ㅣ 임근호·배병철기자] 이.순.재. 이름만 들어도 권위가 느껴지는 배우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적인 배우다. 그런 그가 '야동'(야한 동영상) 앞에서 무너졌다. 아니 '야동'으로 망가졌다. 하지만 전혀 게의치 않는다. 그게 바로 연기기 때문이다.
"(하하 )'야동순재'라고? 내게 그런 별명이 붙었어? 그렇다면 성공이네. 연기를 잘한건가. 사람들에게 그만큼 공감을 샀으니 말이야."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 이순재 .연기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이지만, 그래도 칭찬은 좋은가 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야동순재'로 불리며 최고 인기라 말하니 그새 사람좋은 웃음을 짓는다. "점잖은 체면에 이거….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싫다고 안할 수 있나. 맡은 역할이니 최선을 다할 수 밖에."
그래도 가족 몰래 야동을 보는 장면은 리얼해도 너무 리얼했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야동을 즐겨 보는 건 아닌지. 이순재의 대답은 '역시나' 였다. "별로 취미없어. 연기니까 그런거야. 만약 바람둥이 역할을 맡았다 치자고. 본인 입장에서는 거북해도 어쩔 수 없잖아. 완전 바람둥이가 될 수 밖에."
요즘 이순재는 하루를 30시간처럼, 일주일을 10일처럼 산다. 주중 4일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이순재로 보내고, 주중 3일을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박동만으로 지낸다. 그런 그를 지난 6일 코엑스 아트홀에서 만났다. 이순재에게 던진 '거침없는' 질문은 총 5가지. ▲ 시트콤, ▲ 야동, ▲ 연기철학, ▲ 후배, ▲ 연기대상 등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이순재의 '거침없는' 답변은…. 이렇다.

◀시트콤▶ 사실 이순재하면 대쪽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허준', '12월의 열대야' 등을 거치면서 '칼'같은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때문에 이번 시트콤 도전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코믹 이미지 자체가 일종의 모험아닐까.
"시트콤이라는 장르를 따로 만들어서 그렇지. 넓게 보면 희극의 하나야. 희극이라고 코미디만 생각해서는 곤란해. 세익스피어의 작품도, 찰리 채플린의 영화도 다 희극이었으니까. 예전부터 희극을 하고 싶었어. 희극에는 메세지가 있거든. 무작정 웃기기만 하는 게 희극이라 생각하면 곤란해. 그 속에는 사회풍자도 있고, 페이소스(연민)도 있거든."
"진정한 희극은 무엇일까. 난 희극이 비극보다 어렵다고 생각해. 웃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지는, 웃고 나면 눈물이 어리는, 그런게 바로 진정한 희극이거든. 그러고 보면 '거침없이 하이킥'이 그래. 아직 체계가 다 잡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지. 어쩌면 코미디가 사회적 메세지를 전달하기엔 더 좋은 것 같아. 찰리 채플린이 '위대한 독재자'에서 히틀러를 풍자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듯이 말이야."

◀야동▶ 지난 8일 방송분을 보면 그렇다.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아들 이준하(정준하 분) 때문이다. 어렵게 재취업을 했다가 하루만에 해고 당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아버지 같아 짠하다.
"그게 바로 희극의 페이소스지. 연민이라는 거야. 공감대를 자아내기 때문에 웃기면서도 슬픈거지. 드라마는 한 테마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여유가 잘 없어. 시트콤은 소재가 매번 바뀌니까. 때에 따라선 사회적 소재를 택할 수도 있고, 정치적 소재를 다룰 수도 있지. 아직은 시작 단계라 적극적으로 메세지를 전하긴 힘들어. 점점 자리가 잡히면 달라지겠지."
"야동? 야동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닐까. 공감대지. 누구나 한번쯤은 야동을 봤자나. 아마 제일 크게 웃은 사람이 제일 많이 본 사람일꺼야 (하하). 인간의 본능적인 속성을 잘 끄집어내는 소구지. 물론 문제는 청소년이야. 이미 너무 많은 유해환경에 노출돼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야. 때문에 부모의 역할, 교육의 역할이 더 중요한거야.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느냐가 일종의 과제지."

◀연기▶ 단수로 따지면 '9단'이다. 내공으로 따지면 '고수'를 넘어 '신'에 가깝다. 이순재의 연기가 그렇다. 지난 50년 동안 안방극장의 주인공으로 '국민배우'와 '명품연기'라는 수식어를 한 몸에 받아온 이순재. 그가 생각하는 연기란 무엇일까.
"내게 연기는 끊임없는 과제야. 새로운 도전이고. 솔직히 아직도 연기가 어려워. 한 드라마를 끝내면 그 캐릭터를 지우고 다시 백지에서 시작해야 하거든. 그래서 더 힘든거야. 만약 내가 '대발이 아버지'로 인기를 끌었다고 치자고. 그렇다고 늘상 연기를 '대발이' 식으로 끌고갈 순 없는거야. 그건 연기가 아니거든. 내 연기에서 덧칠은 없어. 언제나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지."
"그래서 항상 고민을 하지. 캐릭터가 전과 비슷하면 헤어 스타일을 바꿔서라도 변화를 주려고 시도해. 그걸 만드는 과정이 쉽지가 않아. 새로운 걸 만들기 위해 항상 도전하고 노력하고 훈련할 뿐이지. 시트콤도 마찬가지야. 웃음을 유발하는 요인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 대본에서 파생되는 액션 끄트머리까지 연구할 수 밖에 없어."

◀후배▶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이순재가 안방극장에 얼굴을 내민지 벌써 50년. 강산이 5번은 변해도 더 변했을 시간이다. 아니 말이 짧아 50년이지, 그의 연기 경력은 이미 반세기를 넘어섰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순재는 급변하는 방송가를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어떤 톱스타는 (드라마 속) 아버지를 자기가 골라. 잔소리 하는 깐깐한 선배와는 같이 일 못한다는 거지. 그렇게 바뀐 아버지가 실제로 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몇십년을 연기한 선배가 대사하나 제대로 못하는 후배 때문에 짤려 나가는 현실이야. 물론 똘똘한 친구들은 선배들의 지적을 달게 받지. 하지만 하루아침에 뜬 배우들은 그저 귀찮을 뿐이야."
"사실 요즘 후배들을 보면 외형적인 조건은 너무도 훌륭해. 그러나 노력이 없어. 대본만 외우면 다라고 생각하지. 기본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저 시청률을 위해 투입되니 드라마 질은 갈수록 떨어지는 거야. 외국의 경우 신인상이란 게 따로 없어. 데뷔하는 순간부터 프로니까 .거대 매니지먼트 시대? 좋아. 하지만 진짜 연기자를 만들려면 교육부터 먼저 시켜야해. 스타가 아니라 배우를 만들 의무가 있는거야."

◀시상식▶2006년 '연기대상'은 그 어느해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공동수상과 특별상 남발. 심지어 상보다 수상자가 2배 이상 나오는 기형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한해를 평가하는 시상식 보다 제 식구 챙겨주는 위로잔치에 가깝다는 평가다.
"방송사가 해마다 진행하는 시상제도를 나무랄 생각은 없어. 누가봐도 자화자찬이지만 그래도 괜찮아. 방송사 일련의 자기평가라고 보면 되니까. 선정기준이야 방송사 양식에 맞기면 되는거고. 하지만 한가지 아쉬움은 들어. 왜 우리나라는 '에미상' 같은 통합 시상식이 없냐는 거지. 국회의원 시절 권위있는 방송상을 만들자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왜 안될까."
"권위있는 시상식은 양질의 방송을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 있어. 방송 3사의 작품을 한 데 모아놓고 객관적인 심사를 공정하게 수여하는 거지. 물론 상은 배우 뿐 아니라 작가, 스테프 등 작품에 참여한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해. '같이 고생한 스테프 여러분들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이 수상자의 감사멘트로 끝나서는 곤란하지. 정말 새해에는 권위있는 통합 방송상이 하나 생기면 좋겠다."
90여분간 진행된 인터뷰를 끝내고 이순재는 분장실로 들어갔다. 연극 때문에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작 죄송한 건 꿀맛같은 휴식을 빼앗은 기자인데 말이다. 잠시후 무대에 선 그를 보았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객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0년만 더 이렇게 우리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설명=코엑스 아트홀에서 자신의 연기관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순재. 2,3번째 사진은 MBC '거침없는~' 홈페이지- 색깔있는 뉴스 스포츠서울닷컴 (sportsseoul.com)Copyrights ⓒ 스포츠서울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