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좋은 아침
그녀가 나가고 나서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로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아픈 걸까.
그것도 두 여자가 동시에.
왜? 무엇 때문에?
그녀들이 아프건 말건
또 어디가 얼마나 아프건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인데
그녀는 왜 굳이 나에게
그것을 전달했으며
나는 왜 그 얘기에
이토록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가.
별의별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도는 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리니지 아저씨가 부스럭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리니지 아저씨가 나가고
피씨방이 텅 비어 버린 시간이
여섯시 삼십 분.
서둘러 청소를 해야겠다.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내부 청소를 대충대충 서둘러 끝내고
계단 청소를 마치고 오니
청소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언제나 청소를 마치던 그 시간이다.
이제 곧 교대자가 오겠구나.
“띵동.”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텅빈 피씨방 안까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벌써 왔나 보구나.
가게 문을 힘차게 제치며
요란하게 들어서는 사람은
다른아닌 경림이다.
“하이! 좋은 아침!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도망칠까봐 걱정이 돼서 말야.”
“......”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러 왔구나.
고작 밥 한끼 얻어먹으러 온 것뿐인데
수금하러 온 사채업자처럼 보이는 건 뭘까.
적절한 어휘구사 하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까먹지는 않았을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어? 조 좋은 아침.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밥.”
“아, 역시 그렇구나.”
역시 그렇겠지.
까먹었을 리가 있나.
치밀한 년 같으니.
“아직 사모님 안 오셨어?”
“응, 아직.”
사모님이란 다름아닌
나의 근무교대자.
사람이 거의 없는 아침시간에는
컴맹인 사모님이 카운터를 봐 주신다.
그리고 한 번도 늦게 오신 일이 없었지.
나는 알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사모님께서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많이 늦게 나오거나
아예 안 나오길 빌고 있다.
연장근무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저 괴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우리의 냉정한 사모님은
오늘도 여지없이
내 퇴근시간보다 십오분이나 일찍 오신다.
“좋은 아침! 어? 경림이도 와 있었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빠한테 밥 좀 얻어먹으려구요 사모님.”
경림은 생글생글 웃으며
사모님께 갖은 아양을 떤다.
저 보스몹이 저런 짓도 하는구나.
역시나 사모님과 나의 레벨 차이인가.
아니면 단지
사모님의 아이템빨인가.
“둘이 데이트하는 거야? 야아, 좋겠다.”
“니기미! 데이트같은 소리하고 있네! 개소리는 집어치워!”
라고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를 뻔 했다.
감히 그 따위 망언을.
“호호홋, 데이트는 무슨요. 그냥 직장동료끼리 식사나 같이 하는 거죠.”
아냐.
그걸로는 부족해.
좀 더 강하게 부정하란 말이야.
“암튼 부럽네? 참 니들은 젊어서 좋겠다.”
“사모님도 아직 한참 젊으신데요 뭘.”
경림의 연이은 아부 어택이 이어진다.
저 여자는 어쩜 저리도
나같은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것일까.
아 그것보다
좋기는 뭐가 좋겠다는 거야.
아주 죽을 맛이구만.
“오늘은 화장실 청소 안 해도 돼. 숙녀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아닙니다. 그래도 할 건 하고 가야죠.”
“후훗, 됐어. 사장님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데이트 잘 하고 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화장실청소가 하고 싶어졌다.
그때 당시의 심정으로는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 고마워요 사모님. 그럼 저희 가볼게요.”
멋대로 고마워하지 마라.
말을 마친 경림은
내 옷소매를 붙잡고는
뒤쪽으로 슬슬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왜 이래?”
“으응? 뭘?”
“당기지 마. 옷 늘어나. 이거 빙폴꺼라 죵니 비싸.”
“호홋, 오빠도 참. 내가 언제 당겼다고 그래.”
경림은 여전히 여유있는 말투로
사모님을 향해 생글생글 웃어 보인다.
생긴 건 곰인데
하는 짓은 완전 여우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너의 본 모습을 드러내게 해 주마.
“아 그만 좀 당기라니까! 이거 빙폴에서 오만구천원 줬단 말야!”
사실 나는 기가 굉장히 약하다.
따라서 험악한 남중남고를 거치면서도
동무들과 한 번도 주먹다짐을 나눈 적이 없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서 꼬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나같은 놈이 이 험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눈치라도 빨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림의 온몸에서 뿜어나오는 살기 정도는
간단히 느낄 수 있다.
앞에서 다짐했던 그녀를 골탕먹이려는 생각보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머리를 치켜든다.
식은땀이 흐른다.
“사모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그래, 니들도 데이트 잘하고.”
가게에서 벗어나니
다행히도 경림은 다소 누그러진 듯하다.
씨바 살았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暠?r
건물 밖으로 나서자
밝은 햇빛이 내리쬐고 있다.
가을 아침인데도
쌀쌀하다는 느낌조차 없다.
말 그대로 좋은 아침이다.
일단은 다리 건너편의
우리 아파트단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유흥가인 이 동네에서
이 시간에 밥을 먹을 만한 곳은 없다.
어쨌든 이 동네는 벗어나야만 한다.
여차하면
그대로 집으로 튀겠다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늘만큼은 밥이 쉽게 넘어가지 않을 듯하다.
물론 평소에도 아침밥은 잘 먹지 않지만.
“...오늘...꼭 먹어야겠어?”
“무슨 소리야. 오늘 먹으려고 이 시간에 온 거잖아.”
“사실 오늘 내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밥 생각이 그다지...”
“오늘 안 먹으면 기분뿐만 아니라 몸도 별로 안 좋아질지도 몰라.”
“......”
“......”
“...가 가자;”
역시 이 여자는 프로다.
저런 우회적인 표현으로
나를 협박하다니.
여차하면 도주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다.
그랬다가는
몸이 굉장히 안 좋아질 것 같다;
그 동안은
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이 여자 또한 생각보다 말이 상당히 많다.
말이 많은만큼 폭력이라도 좀 덜 휘두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평소에 일 끝나고 집에 가면 뭐해?”
“잔다.”
“밥은 안 먹고?”
“안 먹어.”
“그럼 자고 일어나면?”
“출근.”
얼마 전에 채연이 물어보던 것과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답변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인다.
당연히
물어보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지.
“대답이 어째 좀 불성실하다?”
“피 피곤해서;”
오늘도 역시
그때 그 해장국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 시간에 문을 여는 식당은
아는 곳이 없다.
이미 우리 아파트는 지나쳤다.
도주의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
콩나물해장국집은
그때 그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와본 지 얼마 안됐거든;
“안녕하세요?”
경림이 씩씩하게 인사를 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선다.
목소리 한 번 크구나.
“아유, 총각 또 왔네. 오늘은 다른 아가씨랑 왔네?”
주인아줌마는 상당히 눈치가 없다.
내가 혹시라도 바람둥이였다면
어쩔 뻔 했는가.
“뭐야, 딴 여자랑 여기 와 봤어?”
“응. 애인이랑.”
“......”
“......”
“...지랄한다.”
여전히 예리하구나.
내가 지랄한다는 것을 벌써 눈치채다니.
주인아줌마는 그제서야
무언가 안절부절하더니
다시 한 번 말을 꺼낸다.
“아...그 그때...어머님이 참 젊어 보이셔서...아 아가씬 줄 알았지...오호홋...”
......
이 아줌마 참...
눈치 한번 되게 없구나.
내가 울 엄마랑 해장국 먹으러 올 일이 뭐가 있다고.
아줌마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들어간다.
나는 구석으로 가서 앉으려 했으나
경림은 이미 뻔뻔하게도
신발을 벗고 있다.
성격만 놓고 본다면
경림은 채연의 그것과 흡사하다.
먼저 방으로 올라선 경림은
방의 한가운데로 가서는
테이블 양쪽으로 방석을 낼름 깔아버린다.
새삼 채연과 함께 밥을 먹은 기억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한다.
“난 콩나물해장국 먹을 테니까 넌 딴거 먹...”
“여기 감자탕 중짜 하나요!”
“......”
“응? 뭐라고?”
“아 아냐;”
감자탕이라니...
그거 죵내 비싼거잖아;
그것보다도
양이 장난이 아닐 텐데.
“중짜면...3~4인분인데...어떻게...”
“괜찮아. 생각보다 양 얼마 안돼.”
생각해보니 소짜는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둘이서 먹긴 좀...
물론 비싸서 그런건 아니고.
“언제 복학해?”
“내년에.”
“왜 이번에 안했어?”
“남이사.”
“복학하면 몇 학년인데?”
“초딩.”
“......”
“......”
내가 생각해도
채연이 물었을 때와 비교해서
상당히 성의없게 대답한 거 같긴 하다.
그렇지만 물수건을 던질 필요는...;
경림이 묻는 것은
채연과 함께 왔을 때
그녀가 내게 물어봤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 그녀가 굳이 내게
그러한 질문들을 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일반적인 관심사였을 뿐이었단 말인가.
혹은
그저 예의상의 질문일 뿐?
감자탕 중짜가 나오면서
대화는 이내 중단되었다.
역시나 그때와 마찬가지로
경림 쪽에서 먼저 입을 닫아 버렸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경림은 감자탕을 입으로 쓸어 넣는데 정신이 팔려
말을 할 수 없을 뿐이다;
내가 이미 한참 전에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경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뼈에 붙은 살코기들을
단 한놈도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다.
“얼마예요?”
“만 팔천원이요.”
엄청난 타격이다.
아침밥도 먹지 않는 녀석이
만팔천원씩이나
저 몬스터의 입으로 집어넣다니.
만원짜리 두 장을 건넨 것이
딸랑 천원짜리 두 장으로 돌아온다.
피눈물을 삼키며
경림의 뒤를 따라 나선다.
이 인간은 지가 먼저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보고 열라는 건가?
할 수 없이 문을 열어 드리기; 위해
문 앞으로 다가선다.
별안간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번쩍
별이 보인다.
“크억!”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이었던 모양.
안쪽에 “미세요.”라고 써 있으니
바깥쪽은 분명히 “당기세요.”
라고 써 있을 텐데.
누가 이런 몰상식한...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어...어라? 재석씨.”
“어어? 아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채연이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입꼬리가 올라가며 생긋 웃어 보인다.
“재석씨, 좋은 아침!”
네.
뭐 좋긴 한데...
아프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