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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25. 마지막 수업]교실에 들어서니 뚱한 녀석

조준태 |2007.01.11 12:17
조회 88 |추천 0

[040925. 마지막 수업]



교실에 들어서니 뚱한 녀석들의 표정이 나를 맞는다.

아마도 매번 공원에서 진행했던 수업을

교실에서 진행한다고 하니 녀석들의 불만이 가득했을것이다.



어렵사리 첫마디 말을 꺼냈다.



"오늘 수업, 공원이 아닌 교실에서 모이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 수업을 굳이 교실에서 진행하게 된 이유는 말이다..

오늘이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기 때문이다. "



녀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난 선생이라는 명목으로 너희들을 가르쳐왔지만

사실 난 교사자격증을 딴 사람도 아니고

사진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아마 너희들은 대부분 내 나이를 모를 것이다.

나에겐 너희들만한, 중학교 2학년짜리 동생이 있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한다해도,

선생님의 나이를 대강 짐작할 수는 있을거야.

그래. 선생님은 스물 세살이다. 교단이 아닌 밖에서 만났더라면

아마 형, 오빠 정도가 되었겠지.

너희들에게 감이 잡힐지는 모르겠지만

스물 셋이라는 나이는 어른이지만 사회에서는 아직 어린 나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졸업도 하지 않은 주제에

프리랜서 사진가 생활을 하고 있고 지금 너희들 앞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제부터 잠깐의 옛날 이야기를 해 주겠다.

지루할 수도 있고, 지 자랑처럼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이야기 속에서 단 1초간이라도

너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난 그것으로 마지막 수업을 만족하며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녀석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했다.

지금 까지 따라왔던 선생이

교사 자격을 갖추고 있는 이도 아니고

사진을 전공한 자도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하는 듯 했다.



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난 학창시절에 지금 너희들이 양아치,

혹은 날라리라고 부르는 패거리 중의 하나였다.

어린 나이에 배운 술 담배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비슷한 녀석들과 어울리며 놀다보니 수업은 뒷전이고

항상 땡땡이 치고 당구장가서 붙어 있기가 일쑤였지.

성적은 자연스럽게 바닥을 쳤고 학교에서는

항상 우리를 문제아 취급하고.

집에서는 공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대학갈거냐고 닥달하고.

그렇게 항상 내 주위를 맴도는 억압에 견디다 못해 가출도 하고.

그때는 모의고사 점수가 400점 만점이었는데

언젠가는 200점이 나온 성적표를 보고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대학을 갈지 까마득 하더라.

결국 마지막에는 불안감에 잠깐 동안 책을 잡았고

운이 좋았던지 수능 때는 어떻게 350점 정도를 맞아서

간신히 강남대 공대에 입학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더군."



첫 운을 떼고 나자 녀석들의 의심어린 눈초리가

호기심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를 만난건 대학교 첫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 적응을 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준비되어 있는 여행이었다.

숙소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했던 나는

근처에 있던 학생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가 내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오리엔테이션 첫날

저녁 몇몇 행사를 마치고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약간 술에 취해 복도에 나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누군가 밑에서 사발면 두개를 들고 손짓을 했다.

"라면 먹을래요?"

아까 나를 도와줬던 자원봉사자다. 난 흔쾌히 그러겠노라했고

밑으로 내려가서 우리 둘은 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인상이 참 좋았다.

같은 남자였지만 그의 인상은 참 호감이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가 나보다 1년 선배이고 같은 학교

산업디자인과에 재학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 후로 1년동안 깊은 우정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만나면 종종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대학오면 난 모든게 달라질 줄 알았다.

사실 달라지긴 했다.

매일 꼬박꼬박 챙겨 입어야 했던 교복의 제재로 부터도

벗어났고, 술 담배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험을 못봤다고 때리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 난 그것이 완벽한 자유인줄 알았다. 1년을 난그렇게 보냈다.

고등학교 생활의 연장.

매일 수업빠지고 잔디밭에서 술 먹고 드러눕고.

시험때는 아는게 없으니

그저 백지 한장에 편지 한줄 써서 내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다만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것은 그렇게 생활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1학년 기말고사 무렵 미술 관련 레포트가 하나 있었다.

팀 프로젝트 였던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면 안되겠다싶은 마음에

인터넷으로 몇 가지 자료조사를 했다.

링크를 타고 링크를 타고 흘러가던 중에

한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다.

검은색 배경에

홈페이지 주인장이 찍은 사진들이 수없이 걸려있었다.

일기를 들춰보니 그가 살아온 하루하루에 대한 인생철학이

꼼꼼히 메모 되어 있었다. 참 멋진 사람이구나..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이런 사람은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일까. 프로필을 눌렀다.



몇십초간 난 아무 말도 못하고 학교 컴퓨터실에서 나홀로 싸늘한

정적을 느끼며 얼어있었다.

그다. 1년 전 오리엔테이션 자원봉사자.



사실 그것은 정말 몇 억분의 일의 희박한 확률 이었다.

내가 그곳에 접속했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그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 몇 십초간 정적을 느낀 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 나와 고작 한살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 사람은 지금까지

이렇게 인생을 멋있게 살고 있는데. 지금 난무언가.

방종과 자유를 구분 못하고

멋대로 생활하고 있는 나는 정말 쓰레기인가.

한심했다. 죽고싶었다.



다음날 나는 집에 있는 자동카메라를 꺼냈다.

그 사람과 같이 사진을 찍는다고

내가 그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동카메라로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대로 찍기 시작했다.

html 을 공부하면서 홈페이지를 구상해보는것도 잊지 않았다.

3개월 정도 지나고 해가 바뀐 1월 22일 나는 내 사진이 담긴

내 홈페이지를 오픈했다.

그때 이룬 성취감은

내 짧은 20살 인생을 통틀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진은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무심히 지나가고 흘러가는 연속된 시간들 속에서

정지된 영상을 잡아낸다는 것은

참 아름답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정원에 핀 화려한 꽃보다는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나는 잡초의 아름다움이 보였고,

네온이 번쩍이는 도시의 화려함보다는

철거되기 직전 황폐해진 골목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주위 하나하나 어느 아주 작고 작은 것 까지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디지털사진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 어줍잖은 일상의 스케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태어나서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인정받는 것.

하나에 열정을 쏟아 그것을 인정받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대로라면 그 어떤것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대학 2학년, 그래서 난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지지리도 못할 수 있었던 그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기초가 부실하다 못해 없었기 때문에

예전에 있던 책들을 다시 찾아 처음부터 시작했고

수업때마다 조는 버릇을 고치기위해

수업시간 20~30분 전에 들어와서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가 침튀기는 것을 그대로 받아가며

수업에 열중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얼마 못가 그만둘 거라고 말했지만

난 그럴 수록 더 열심히 했다.

사실 그만 두면 너무 쪽팔릴 것 같아서.

니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몇몇 친구들과

쉬는 시간 같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배가 고프면 야참을 시켜서

잔디밭에서 도란도란 앉아 밥을 먹었다.

막차시간에 맞춰 두꺼운 전공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정류장으로

달려가는데 이런게 진짜 대학생활의 낭만이구나 싶었다.

당연히 술마시는 횟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간간히 한번 있는

술자리에서 마시는 술은 더더욱 맛있었다. 공부하느라 지친 몸을

풀기 위해서였는지, 난 술자리에서 더더욱 미친듯이 놀았다.



2학년 1학기 기말을 마치고 성적표를 받았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성적표에는 학비감면액 일백육십만원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장학생이 된 것이다. 그 공부 더럽게 못하던 내가.

기뻐서 학교위에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여기저기 자랑을 했다.

공부 잘하던 놈이 그렇게 자랑하면 꼴값이었을텐데

그래도 꼴통이 노력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고등학교때 친구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대학가더니 뻥만 늘었다고 했다.

부모님도 믿지 못하면서 또 기뻐하셨다.

한번 맛을 보니 이건 다시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년동안 공부하는 생활습관을 들여놓으니 그것을 다음 학기,

또 다음학기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매학기 장학금을 따 냈고

3학년 마지막 학기는 과 수석으로 마칠 수 있었다.

 

 

좋더라.

공부하라고 돈주는 것도 좋고 여기저기서 인정받는 것도 좋더라.

하지만 더 좋은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긴게 너무 좋더라.

하면 된다.

하면 되더라.


 

 

그때 얻은 또 다른 자신감은

지금도 내 삶에 든든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스물 두살,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그때까지도 난 계속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틈틈히 이론도 겸하고 있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체계가 잡히지 않는 것 같다.

학원이라도 가서 이론수업을 들어볼까 생각도 했는데

마침 그때 2학기 강좌에 사진 디자인이라는 강좌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우리과 수업이 아니고 예술단대 전공 수업이다.

학점이야 어차피 자유학점으로 처리되어

학점이수에는 문제가 없지만 예술대생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공대생이 홀로 버텨낼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종종 모델로 쓰던 친구녀석 한 명을 꼬셨다.

내가 네 성적은 책임지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몇일간 녀석을 설득한 끝에 우린 수강신청을 했고

첫 수업때 당당히 맨 앞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출석을 부르는데 다들 예술대생인것 같았다.

우리에게서만 공대생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다들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괜히 이 수업을 신청한건가. 슬그머니 후회가 된다.

교수님이 학생들 카메라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내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당시 s2pro 를 쓰고 있었는데

아는 형님에게서 받은 렌즈에 물려있는

필터나 중고로 받은 악세사리들이 본의 아니게 좀 고급이었다.

교수님이 대뜸 한마디 던지셨다.

"폼 나는건 다 달았네."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애써 웃었지만

내 자존심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쉬는 시간 교수님이

예술대 학생들이랑 담배를 태우러 나가셨는데

내가 뒤에서 담배피고 있는 것을 모르시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공대생 좀 사나 보던데."

울컥한 나는 뒤에서 대뜸 한마디를 던졌다.

"저희 집 못살아요."

교수님은 당황하셨는지 얼굴을 붉히셨고

난 그길로 강의실로 돌아왔다.

오기가 생겼다.

좋은 카메라에 비싼 악세사리 달고 폼 재고 다니는 양아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

내가 이 카메라를 잡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보여주겠다.



레포트 나올 때마다 수권의 책을 읽으면서

몇 시간에 걸쳐 레포트를 완성했고

사진 한장 찍어오라 치면 몇일 날을 잡아

수십, 수백 컷의 사진을 찍어 한장을 골라 제출했다.

처음시간 나를 별로 곱지 않게 보셨던 듯한

교수님은 그런 나를 달리 보셨는지

수업시간마다 내 레포트와 사진을 샘플로 사용하셨다.

운이 좋게 그때 촬영한 사진 한장이

동아일보 공모전에서 1등을 해서

부상으로 사이판행 티켓이 나왔다. 사진은 내가 찍었지만

그 사진을 찍게 된 동기는 교수님 덕분이니 수업을 마치고

교수님께 사실을 말씀드리고 감사하다는 표현을 드렸다.

"비록 너의 전공이 아니더라도,

너 정도면 앞으로 좋은 스승을 만나 크게 될 수 있을거야."



우여곡절이 많았던 사진수업.

마지막 시험 날 그동안 냈던 레포트와 도록을

받으러 가니 교수님이 앞으로 있을 수업에

내 레포트와 도록을 활용하고

싶다고 당신에게 모두 제출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길래

그러시라했다.

강의실을 나오며

처음 수업 때 내 독한 마음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하면 되는구나.



3학년 2학기를 마칠 시즌 즈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나에게 전시회를 열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 당시 paper 라는 잡지에

내 사진 몇 점이 실리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 중략...





해가 지나고 1월경.

나를 지금의 프리랜서로 있게한 작은 사건이 있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장지은 씨라는 분이 연락을 주었는데

자신의 개인 프로젝트를 촬영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내가 사진을 찍어 주었으면 좋겠노라고 하셨다.

나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희산이라는 분이 추천을 해 주셨다고 한다.

희산.. 희산.. 누구지? 낯이 익은 이름인데.

생각해보니 장지은씨가 연락을 주기 하루전날

내가 한사람의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좋은 사진 잘 보았노라고 간단한 인사글을 남기고

내 홈페이지를 메모하고 온 것인데 그분이 촬영자로

나를 추천해주셨다고 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 우연은 참 기가막히게 다가오는것 같다.

여튼 장 선생님(지금은 내가 그렇게 부르고 있다)을 만나서

촬영 콘티를 짜고 장소 섭외를 하고

몇번에 걸쳐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때 장 선생님 홈페이지를 디자인하는 분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 선생님 눈이 워낙 높은게 아닌데

지금 너무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촬영을 마쳤고

그 촬영은 내가 보수를 받고 찍게 된 첫 촬영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사진전공자도 아닌 내가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클라이언트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 선생님은 당시

쇼호스트를 교육하는 학원에서 강사로 계셨는데

그 촬영을 계기로 나에게 몇 명의 수강생들을 소개시켜 주셨다.

면접때 프로필 사진이 필요한데

이전에 촬영한 사진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압구정의 모 스튜디오에서 15만원에 촬영한 사진이라며

그들이 사진을 들고 나에게 찾아왔다.

사진을 보니 내가 더 잘 찍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이 없었던것 같다)

난 같은 돈을 나에게 지불하면

훨씬 좋은 사진을 뽑아주겠노라고 말했고

지인의 스튜디오를 대관해서 그들을 촬영했다.

(당시 나는 스튜디오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난 아마추어라는 생각을 버렸다.

이 사람들은 비싼 돈을 주고

나에게 의뢰를 해온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허점을 보이거나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큰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전에 암시를 걸었다.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촬영결과 그들은 매우 만족했고

또 다른 사람들을 소개시켜준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난 예전부터 무작정 부러워했던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소속사도, 가진 장비도 별로 없지만

카메라 한대로 사람을 만나고 촬영을 하고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았다.

이것은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는 또다른 큰

매력이었고, 즐거움 이었다.



당시 나는 2학년때부터 관리해온 학점덕분에 선배들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고 있었다.

당시 내 점수라면 연대나 고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했다.

스트레이트로 학사과정을 마치고 석사 그리고 연구원,

그리고 박사.

선배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는

꽤 안정적인 생활과 연봉을 보장하고 있었고

그렇게 젊은 나이에 박사라는 직함을 달게 된다는 것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동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군대도 미루고 학점관리에 열을 올렸다.

이대로만 가면 연봉 수천의 밝은 미래가 성큼 다가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난 4학년이 개강할 무렵 망설임 없이 휴학계를 냈다.

나를 이끌어 주려던 선배들에게는 정말 죄송했다.

하지만 난 사진에 미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정적인 생활도 좋다.

하지만.. 난 좀더 뜨겁게 살고 싶었다.

돈을 조금 못벌지언정

하루하루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고 살고 싶었다.

그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그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이 내 마음속에

일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휴학계를 내고나니 한창 총선 시즌이었는데,

당시 알던 선배의 소개로 한영수 전 자민련 부총재님과 한달간

미디어 파트에서 계약을 했다.

사실 선거 자금이 그리 녹녹치 않아

기업에 의뢰하기는 힘들고 해서 나를 불렀다고

당신쪽에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난 의뢰비가 조금 적을지언정,

그 두배, 세배 만큼의 결과물을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당시 일은..



------------------------------ 중략..






그 와중에 너희들을 만났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많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좋은데 어떻게 하지.

오늘 수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너희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 기분이 묘하다.



조금만 더 고생했으면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조금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텐데.

사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공원에 모여

사진찍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너희들과 안녕을 고했으면 편했겠지만.

또 다른 후회를 남기기 싫어서

굳이 너희들을 이 교실로 모이게 했다.

하루 사진을 찍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희들에게 좀더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다시 한번 너희들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내 이기심을 용서해라.



앞으로 너희들이 사진을 전공할지,

아니면 다른일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이 한마디만은 꼭 해주고 싶다.



꿈을 갖고 뜨겁게 살아라.

안정적인 직업보다는

너희들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일을 택해라.

그저 편한 사랑보다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랑을 해라.

그게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칠 수 있는 내 삶의 철학이다.



......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것으로.. 너희들과 나와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다.

그동안.. 고마웠다. 이상.








....................................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짧은 시간

나도 모르게 많은 정을 주었던 녀석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한 녀석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이내 그 작은 교실은 녀석들의 박수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자식들.. 무엇하나 제대로 남겨준 것 없는 철부지 선생에게..



지금까지 어떤 발표회장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고마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반장녀석은 수업후 내내 내곁을 맴돌더니

버스타는 길까지 나를 따라왔다.

우리, 영원한 이별은 아닐거야.

세상은 참 좁다는 것. 우리모두가 알고 있지 않니.

다시보자. 내 생에 첫번째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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